76화 20. 두 개의 길 (4)
“…….”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루페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마치 그 문자로부터 도망치듯이.
조각상이 다가오며 그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퀘스트를 하나 주겠다고 했었죠?”
“여, 여신님. 이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 가련한 안젤리나는 자신도 모르는 부정한 저주로 오염된 상태예요. 이대로 놔두면 그녀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겠지요. 제국을 위해서 그녀의 영혼을 위해서 시신에 새겨진 저주를 제거할 필요가 있어요.
안젤리나의 시신을 가지고 오세요! 그것이 더 부패하기 전에! ]
“이건…….”
루페르트의 손이 의지와 관계없이 떨기 시작했다.
의도는 좋다.
필요성도 알겠다.
하지만 이건 묘를 파헤치고 시체를 끄집어내는 행위 아닌가.
그것도 모르는 타인도 아닌 누구보다 큰 은혜를 진 안젤리나를.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손만큼이나 떨리는 눈동자로 조각상을 바라보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네!”
조각상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 *
슈발츠마인 선제후의 뒤편, 사람의 발길이 여간해서 미치지 않는 그늘 진 영역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 가우저.
이 저택의 주인이자 3일 뒤 황제가 될 고귀한 그 옆엔 시종 하나 호위 하나조차 없었다.
반쯤 열린 문 안에 마련된 조촐한 골방 안엔 고약한 타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문 너머엔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는 건장하고 비열해 보이는 사내가 환각 성분을 일으키는 잎을 둥글게 말아 피우고 있었다.
허리를 잔뜩 젖힌 채 앉아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곧 출입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허리를 세워 침입자를 응시했다.
“오. 선제후님.”
사내가 미소 지었다.
그의 이름은 린넨부르그.
슈발츠마인 저택 안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여행자 길드의 파견인이다.
그는 루페르트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하시러 오신 겁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각 탓인지 아니면 잘려 나간 무릎 아래에 엉성하게 장착한 의족 탓인지 그는 크게 한 번 몸을 휘청였다.
루페르트는 겨울의 안개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린넨부르그가 루페르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려 나간 손가락뼈였다.
상하지 않도록 약품으로 처리한 그 뼈의 중간 마디 즈음엔 빛을 잃은 호박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걸 가지고 테타우의 ‘회차로’로 가십시오.”
루페르트는 말없이 뼈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린넨부르그가 떠나려는 루페르트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선제께서 그리했듯이 혼자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계심이 많은 친구들이라서요.”
루페르트는 밤의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회차로라 불리는 곳은 테타우 안에서 이교도인, 특히 하브루타인이 모여 사는 구역이다.
법으로 정한 건 없지만 테타우에서 살아가는 하브루타인은 예외 없이 접고 어두운 골목과 기형적으로 높이 쌓은 위태로운 건물이 밀집한 마치 흰개미 집 같은 영역 안에 둥지를 튼다.
‘여기가 회차로인가.’
하브루타인 구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갈 일도 없었고 볼 일도 없었다.
하브루타인 구역 같은 혐오시설은 황제의 발코니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가려 있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3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손에 예외 없이 이국적인 날이 초승달처럼 휜 단검이 들린 걸 보았다.
하브루타인이다.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다가가 빛바랜 호박 반지를 낀 손가락 뼈를 보여 주었다.
하브루타인들이 뼈를 보고는 일제히 검을 검집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한 사내가 희미한 빛이 드리운 영역에 나타나 입을 벌려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혀가 없다.
아마 모두 혀가 없고 말을 못 한다는 걸 알리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잠자코 있으니 삼인조는 루페르트를 좁고 어둡고 악취 나는 골목으로 안내했다.
깊은 밤이지만 창문은 열려 있었고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 일행이 지나가자 말소리는 그치고 창문이 서둘러 닫혔다.
대신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는 쥐새끼 같은 경계와 두려움, 시기로 가득 찬 시선들이.
“이쪽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내들은 루페르트는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매음굴이었다.
싸구려 분 냄새와 역겨운 욕정의 냄새로 가득 찬 홀은 세 개의 원료를 알 수 없는 연료를 태우는 화로가 밝히고 있었다.
칠흑 같은 통로 쪽에서 곧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저 여자는?’
틀림없다.
카를 호이징거의 장례식에 나타나 루돌프에게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 여인이다.
치렁치렁한 옷을 걸쳤음에도 본능을 자극하는 육감적인 선과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사막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아찔한 미녀였다.
그녀가 루돌프에게 했던 것처럼 정중하고도 고혹적인 몸놀림으로 인사했다.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귀인을 배알합니다.”
여성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매음굴의 주인입니다.”
“이름이 뭔가?”
“말하는 꽃에게 이름은 의미가 없지요. 굳이 이름으로 불러 주시겠다면 록산느. 록산느가 좋겠네요.”
“부르봉 출신인가?”
“아니오. 제가 직접 지은 거랍니다.”
“직접?”
“저는 부모에게 이름을 지음 받지 못했어요.”
록산느가 잿빛의 옷소매를 올려 손목에 새긴 문신을 보여 주었다.
[ 8134 ]
“나면서부터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죠.”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며 록산느가 미소 지었다.
뭇 남성을 홀리고도 남을 정도의 미소건만 루페르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험한 여자다. 울피아나와 또 다른 의미로.’
남성의 본능 그 자체를 폭력적으로 잡아끄는 고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단지 그것뿐, 루페르트는 실체가 없는 연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자신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루페르트는 딱딱하게 용건을 말했다.
“어떻게 봉사하면 될까요? 고귀하신 분이여.”
“무덤에 묻힌 시체 한 구를 꺼내 줘야겠다.”
“어떤 시체인가요?”
“…….”
“가릴 거 없어요. 저희들은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분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 부디 기탄없이 말해 주세요. 형제들의 입속을 보지 않으셨나요?”
“안젤리나 대황후. 그 시체를 묘에서 파내 집무실에 몰래 가지고 와 줬으면 한다.”
록산느의 사막 빛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양이류 맹수가 발톱을 수납하듯 본심을 숨기고 훈련된 미소로 위장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언제가 좋을까요?”
그 기분 나쁠 정도의 유연함에 루페르트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철혈대제라 불렸던 선제의 모습을 말이다.
‘역시 선제의 사람인가.’
마음에 선이 그어지지 않은 듯한 사람.
루페르트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개의 왕관을 쓸 때까지.”
“곧 소식이 있을 거예요.”
루페르트가 돌아섰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려던 루페르트는 살짝 몸을 돌린 채 손에 쥔 손가락뼈를 록산느에게 보였다.
“이건 누구의 뼈지?”
흐릿한 어둠 속에 반쯤 잠겨 있던 록산느가 긴 담뱃대를 꺼내 붙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흡입하고는 연기와 함께 말을 토해 냈다.
“열병의 메아불린.”
“…….”
“믿기 어렵지만 제국 성인의 것이라고들 하더군요.”
* * *
“거기 빨간 명찰 둘.”
반짝이는 은빛 투구를 쓴 기병대 장교가 투구만큼이나 우아한 백마를 이쪽으로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하게 석조 포도 위를 걸으며 리듬감 있는 소리를 내는 4개의 다리를 보며 마를로네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그녀 옆엔 베르크 란이 언제나처럼 꺼질지 모르는 분노를 녹색 눈동자 안에 갈무리한 채 다가오는 장교를 노려보았다.
장교는 그들을 힐끔 내려다보다 이내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을 짓고는 보지도 않은 채 무언가를 베르크 란에게 던졌다.
마를로네가 비단 천에 싼 것을 낚아채고는 내용물을 열었다.
“와.”
마를로네가 내용물을 베르크 란에게 보여 주었다.
강보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두둑한 전표였다.
“할아버지! 이거 좀 봐! 10,000탈러가 넘겠는데?”
마를로네는 막대한 금액을 보고 기뻐했지만, 베르크 란의 얼굴엔 일말의 기쁨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를로네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가운데 베르크 란이 장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이게 전부요?”
“이게 전부다.”
“사면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
“불만이냐? 빨간 명찰.”
“……아무 불만도 없소.”
베르크 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남에게 보이지 마라. 도펠죌트너! 혹 시기심 많은 이웃에게 신고를 당하기라도 하면 써 보지도 못하게 몰수당하게 될 테니까!”
장교가 사라졌고 공터엔 둘만 남았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베르크 란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무너진 석조포도가 직사각형 형태로 넓은 면적을 차지했고 그 너머엔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버려진 정원이 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너머 높게 솟은 담장 위엔 그보다 더 아찔하게 솟은 종탑과 황궁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연병장이었지.”
한숨을 토해 내며 베르크 란이 입을 열었다.
무거운 한마디였지만, 그 심정이 손녀에게까진 와닿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어떻게 할까?”
마를로네가 전표가 든 보자기를 내밀며 물었다.
“당연히 챙겨 둬야지. 우리를 기다리는 형제들도 있을 터이니…….”
베르크 란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진한 피로가 주름진 얼굴 위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번 여정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마법사도 어려운 상대였고 전설 속의 설인은 평생을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술안주가 되고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짓누른 건 염소 가면을 쓴 남자다.
‘그 녀석.’
베르크 란은 알고 있다.
그 염소 가면이 자신과 같은 검술을 사용하고 있다는걸.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딴 것보다 수천 배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 염소 가면은 자신의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 나는 황제의 챔피언이다.’
베르크 란의 시선이 버려진 공터 정북 쪽에 반쯤 무너진 채 서 있는 단상을 향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색채조차 떠오르지 않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는 그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그가 주저앉은 공터엔 번쩍이는 검과 군청색의 제복을 입은 도펠죌트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과 오를 맞추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머리 위엔 죽어 가는 사자가 수놓아진 군기가 휘날렸다.
검은 연대.
최소 다섯 번 이상의 전투에서 적 전열에 뛰어든 검증된 도펠죌트너만이 들어갈 수 있는 현존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
그들을 통솔하는 단상 위에 서 있던 다름 아닌 젊은 날의 자신이었다.
“…….”
베르크 란은 바닥을 움켜쥐었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살폈다.
굳은살로 가득 찬 거칠고 큰 손.
흉터 하나 없는 것이 평생의 자랑이었다.
그 손에 작은 흉터가 새겨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상처지만 그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 사내에게 강렬한 박탈감을 주었다.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그의 손녀가 퀭한 눈으로 응시했다.
전표를 낡은 가방에 챙기면서 여전히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부의 허망한 욕망을 지켜보았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모자를 푹 눌러써 지저분한 주걱턱만을 드러낸 그 사내가 다가오자 마를로네가 전표 하나를 던졌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결투를 준비한다더군.”
마를로네가 조부를 대신해서 물었다.
“어떤 결투?”
전표를 받아 든 사내의 턱이 움직여 씨익 웃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
“유서 깊은 부족 간 대리 결투를 말이야.”
베르크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은 채 그는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흉측한 정원의 바람과 가지를 떨게 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아니, 베르크 란은 알아보려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