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75화 (75/225)

75화 20. 두 개의 길 (3)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3명의 사내를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은 황제가 되실 룸왕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힘이 되어 드리려 합니다.”

갑작스레 루페르트의 측근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루페르트가 산봉우리에 내리치는 벼락처럼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쫓아내듯 제국 의회장에서 쫓아낸 직후의 일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제국 기사 요하네스, 쿠름바하 남작 오토 브라에, 카를로비 남작 베르너.

총 세 명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시선은 싸늘했다.

‘내 측근이 되겠다면 최소한 선제후가 됐던 시점부터 찾아오든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이제 와서 오면 어쩌라는 건지. 가문의 연줄로 날로 먹겠다는 건가?’

첫 번째 장벽은 시기다.

어려울 때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 황제가 되려 하니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두 번째 장벽은 그들의 출신이다.

‘슈발츠마인이라. 내 가문이고 선제후 가문 중에 제일 세가 강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별로 인물은 없는 거 같던데.’

당장 가문 일원 모임에서 이 사람이다! 할 만한 인재는 없었다.

게다가 슈발츠마인 출신 중엔 프리드리히 헤첸이라는 유쾌한 친구가 있었다.

황제 선거에서 무조건 승리를 보장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쳐 놓고는 한 표도 얻지 못한 그 무능한 친구 말이다.

세 번째 장벽은 이들의 젊음이다.

가장 나이가 많다는 오토 브라에조차 서른을 채 넘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은 나이는 반드시 단점과 연결되지만, 너무 어린 나이는 자격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요소다.

‘내 황제 시절에 자칭 수많은 천재를 봤지만, 진짜 천재는 하나도 없었지. 결국 사람의 능력이란 건 경험을 필요로 해.’

마음 같아선 당장 돌려보내고 싶다.

특히 시기가 안 좋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물러났다고 하나 그 죽어 가는 인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을뿐더러 루페르트는 무엇보다 리프니에와 재회하고 싶다.

‘빨리 여신님을 만나고 싶은데, 참.’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마디 정도는 들어 줘야 할 것 같다.

남도 아니고 슈발츠마인 사람들이니.

적당히 상대하다 빨리 쫓아내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굳히고는 루페르트는 턱을 괸 채 당돌한 방문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그런데 루페르트의 의심은 첫 한마디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안젤리나 대황후의 명령입니다.”

가장 연장자인 오토 브라에가 말했다.

“안젤리나 대황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조력자의 이름을 듣자 루페르트는 턱을 괸 자세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황후가? 그녀는 분명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터인데. 어쩌면 지금쯤 죽었을 수도 있고.’

“그게 정말인가?”

곧 황제가 될 사람다운 위엄을 내비치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황후께서 저희를 보냈습니다. 대황후께서 서거하신 이후에 룸왕 전하 혹은 황제 폐하를 찾아뵈라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루페르트의 물음에 세 사내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황후는 전하께서 룸왕의 의례를 치르고 있으실 때 유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런가.”

안젤리나의 죽음은 이미 예상된 일이다.

마지막 만났을 때 그녀는 사실상 망자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영혼이 쇠약한 육체를 떠났다.

루페르트는 잠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숙연한 시간이 지난 후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앉은 세 명의 젊은 귀족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평범하나 안젤리나 본인이 직접 천거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엉터리와는 급이 다르리라.

그들의 능력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긴 하지만 사실 루페르트에겐 아직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썩 빼어나지 않다.

정치 공작 쪽이나 정계에 관한 사정엔 밝지만, 실질적인 업무 능력이나 보좌력을 알아보는 재주는 부족하다.

그러니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엉터리를 측근으로 기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루페르트에겐 비장의 한 수가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쓰겠냐.’

모처럼 루페르트는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했다.

적당한 방 안에 한 명씩 몰아넣고 루페르트 본인은 불경한 빛이 보이지 않을 장소에 숨어 그들 하나하나를 여신의 권능으로 뜯어 보는 것이다.

최초의 통찰 대상은 오토 브라에였다.

< “쿠름바하의 가난한 남작” 오토 브라에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중앙 제국인

분류: 수재

성별: 남성

연령: 28세

명성: 일부에게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살림 잘하는 노총각 영주: B-

인심 좋은 인육 배급자: C+

제국의 유능한 총신: A

3. 특기사항

- 낮은 단계의 인간성 결여

4. 등급

A

“…….”

능력 자체는 대단히 뛰어나다.

전사도, 사냥꾼도 마법사도 아닌 관료로서 A등급 이상을 받은 건 이 사람이 처음이다.

황제가 될 루페르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그런데 결점 또한 뚜렷하다.

‘인심 좋은 인육 배급자라니. 여신님다운 표현이군. 거기다 인간성 결여……?’

그런데 운명의 실타래는 무조건 실현되는 미래는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 브라에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합격.

다음은 최연소자인 요하네스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경한 녹색 빛이 어른거렸다.< “주판을 든 기사” 요하네스 폰 리터 하임멜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천재

성별: 남성

연령: 22세

명성: 거의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불면증

2. 운명의 실타래

악명높은 “요하네스 사기”의 창시자: A-

제국의 적: A

제국을 떠받치는 황금 기둥: A+

3. 특기사항

- 중간 단계의 양심 결여

4. 등급

A+

‘뭐, 뭐냐. 이놈은?!’

능력 하나만은 입이 떡 벌어진다.

루페르트의 가장 우수한 영혼 동맹인 한스 징펠만과 같은 등급.

무려 재정 관료로 제국을 떠받드는 황금 기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관료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제국에서 문관으로 이 정도 찬사를 듣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 친구, 극도로 위험하다.

‘제국의 적이라니. 최악의 범죄자나 대역죄인에게 붙이는 칭호 아닌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게다가 악명 높은 요하네스 사기는 뭐냐? 이 친구.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드는데.’

특징이 보인다.

이 요하네스라는 친구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지만 또한 극도로 위험하다.

양날의 검이라고 할까.

하지만 잘만 쓸 수만 있다면 요하네스는 어떤 관료보다 루페르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전쟁에 문외한이라고 하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라는 것을 루페르트도 모르진 않으니 말이다.

슈발츠마인의 재정이 윤택하고 루페르트 본인 또한 리히트보덴에서 올라오는 부유한 수입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이라는 건 상상 이상의 돈을 요구한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저 골트문트조차 3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파산에 몰아넣는 것이 전쟁이다.

유능한 재정 책임자는 내전기를 대비해야 하는 루페르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합격.

루페르트는 요하네스라는 이름 또한 기억에 새겼다.

남은 건 하나다.

앞선 둘을 보며 루페르트는 안젤리나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인재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걸까. 통찰의 만화경을 보면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역시 안젤리나 대황후는 대단한 사람이었어. 통찰의 만화경이 없음에도 이런 인재들을 발굴하는 걸 보면.’

궁금한 게 있다.

왜 이런 인재를 발굴하고도 그녀가 죽은 이후에 루페르트를 찾아오라고 한 것일까.

그건 마지막 후보의 능력을 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불경한 빛이 서렸다.< “카를로비의 완고한 남작” 베르너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중앙 제국인

분류: 범재

성별: 남성

연령: 25세

명성: 일부에게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무명의 군주: B-

오크에게 매달린 시체: C-

제국의 총신: B

3. 특기사항

- 흔들리지 않음

4. 등급

B

두 사람이 지나치게 색채가 강해서일까.

베르너 남작은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등급도 그렇고 운명의 실타래도 그렇다.

특출난 구석은 없다.

하지만 특기사항이 눈에 걸린다.

‘흔들리지 않음이라. 정신적인 면을 말하는 건가.’

오토 브라에와 요하네스는 저마다 정신이나 마음에 문제를 노출했다.

하지만 베르너의 경우엔 정신적인 문제는커녕 오히려 강인한 정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특징마저 있다.

루페르트는 앞선 두 사람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올곧은 눈빛을 가진 베르너라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황후가 아무 이유 없이 평범한 자를 선택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분은 이 사람의 내면의 강인함을 보고 선택했을지도.’

합격.

루페르트는 마지막 후보인 베르너 또한 선택했다.

다시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관식에 참석하라. 그대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

오토 브라에, 요하네스, 베르너 삼 인은 루페르트에게 예를 표했다.

이제 한 가지가 남았다.

왜 안젤리나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 루페르트를 찾아가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베르너가 봉인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전하께서 이유를 물을 때 대비해 저에게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루페르트는 베르너에게서 서찰을 받아 들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조촐한 편지에선 은은한 장미 향이 피어 나왔다.

루페르트는 편지의 겉봉을 단단하게 조여 맨 붉은 봉인을 응시했다.

편지는 개봉된 적이 없다.

루페르트는 베르너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강직한 면을 믿고 편지를 맡긴 것이군.’

편지를 개봉했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진한 장미 향이 실내 전체를 채울 것처럼 화려하게 퍼져 나갔다.

안젤리나의 처소를 항상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장미들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안젤리나의 마지막 메시지를 눈으로 읽어 나갔다.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선제와 함께 있겠지.

내 보아하니 그대 주변에 함께 전장에 서 줄 사람은 몇 있으나 궁정에서 세울 인재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선제 이전의 천둥제도, 선제도 유능한 총신을 궁정 안에 남겨 두고 제국 전역을 동분서주하며 제국 전체를 태워 버릴 법한 불길을 수습했다.

내가 준비한 3인은 가능성을 가진 뛰어난 젊은이다.

잘만 쓸 수 있다면 그대의 으뜸가는 총신이 될 것이다.

허나 그들에게도 단점은 있다.

특히 요하네스는 가장 뛰어나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이다.

그의 심장엔 제국이 없다.

그대의 시대가 선제의 시기보다 더 어려우리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일견 모든 문제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부분은 미봉책이며 시간이 지나면 곪거나 터질 성격의 문제니까.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안정을 원한다면 베르너 하나만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완벽한 인선이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토록 위험한 화약을 왜 군대가 고수하는지 생각해 보라.

추신. 내 그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독인지 약인지는 그대가 결정할 일.

새로운 황제 폐하의 앞길에 영광이 있기를.

아울러 살아생전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한 무심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를.

안젤리나.

편지를 움켜쥔 루페르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안젤리나 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루페르트는 세 사람을 내보낸 뒤에도 한참 동안 서재에 남은 채 짙은 여운에 잠겨 있었다.

* * *

“전하!”

“아니, 전하께서?!”

느닷없는 루페르트의 귀환에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하인들이 더럽혀진 망토를 푸는 가운데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문의 경비병이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감히 도펠죌트너 따위가 선제후의 사적 영역에 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눈치.

루페르트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물러서라.”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흐르는 건 만성적인 의구심과 회의.

여전히 그들은 루페르트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가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페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해라.”

베르크 란이 고개를 숙이고 마를로네가 활짝 웃는다.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재회가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루페르트의 심장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을 때부터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여신님……!!’

저 너머 화려한 문 너머에 소라고둥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모든 걸 주고 현재를 있게 한 만변의 제공자.

리프니에가.

문을 열고 루페르트는 제단 위에 우뚝 서 있는 소라고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 돌아왔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런데.

“음?”

소라고둥이 말이 없다.

“여신님? 주무세요?”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어 쓰다듬어 보기도 했고 감히 불경을 무릅쓰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머, 어딜 보는 거예요. 파렴치하게.”

등 뒤에서 영원히 잊을 없는 싱그럽고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신님?!”

루페르트의 눈이 핏발이 설 정도로 커졌다.

틀림없다.

뒤에서 들려온 건 틀림없는 그의 여신의 음성이다.

그런데.

‘뭐, 뭐냐? 이건?’

그의 뒤에 서 있는 건 소라고둥도 신적인 광휘 같은 것도 아니었다.

“루페르트 여기예요 여기!”

그것은 조각상이었다.

안젤리나의 어릴 적 모습을 참고했다는 피어나기 전의 장미의 꽃봉우리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녀의 조각상이다.

그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상의 눈동자엔 있어서는 기묘한 광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어때 보여요?”

조각상이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 이건…….”

“저예요. 저! 리프니에.”

“!!”

조각상이 활짝 웃었다.

“당신의 여신님이죠.”

루페르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핵심 퀘스트(중요!) ]

“!!”

그 아래의 행을 본 순간 루페르트의 얼굴은 핏기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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