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64화 (64/225)

64화 17. 하얀 죽음 (2)

“그 권능을 여기서 사용하는 건 현명하지 않아.”

루페르트를 막은 건 루돌프였다.

“우수한 마법사도 있어. 더욱 조심해도 나쁘지 않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제의 충고다.

루페르트는 즉시 통찰의 만화경을 회수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사과할 건 없네. 급박한 상황에서는 현명한 판단을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오두막 안엔 루돌프와 루페르트 둘만이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지붕에 올라 묵직한 철제 가방을 열어 그 안의 탄환과 장비를 조정하고 있었고 지겔슈타트는 문 앞에 우뚝 서서 모처럼 오랜만에 사각의 마법사다운 오만과 위엄을 과시하며 신비로운 눈으로 다가오는 불빛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적과 가장 가까이 있는 건 베르크 란이다.

그는 오두막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 짧은 스틱 하나만을 든 채 다가오는 적을 동상처럼 서서 미동도 없이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저 사람도 손녀를 걱정하는 걸까.’

“이거 놓으세요. 키 차이가 커서 어깨가 빠질 거 같네요! 그러니 제 발로 걸어갈게요. 보세요? 무기도 없잖아요?”

손목을 잡힌 마를로네가 얌전하게 걸으면서 투정하듯 말했다.

그 음정과 표정은 평소 루페르트를 대할 때와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딱히 두려워하는 거 같진 않네.’

급박한 상황이지만 천연덕스러운 마를로네의 모습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루페르트였다.

한편 루돌프 또한 마를로네를 두건 아래의 어둡고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귀중한 걸 저 계집에게 쓴 모양이군.”

루돌프가 혀를 찼다.

“둘도 없는 지고의 보석을 진흙탕에 처넣었구나.”

루페르트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루돌프가 그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냈다.

냉소적인 비음이 두건 너머에서 들려온 것이다.

처음 알았다.

저 어두운 회랑의 노인이 냉소를 내비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마를로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저 계집이 어떻게 도펠죌트너의 힘을 얻었는지 아나?”

“글쎄요. 그건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이라.”

“내가 저자에게 준 물건이 있지. 그의 모든 걸 빼앗기 전에.”

“베르크 란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질문 자체에 어폐가 있다.

어떻게 자신의 챔피언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루돌프는 베르크 란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의식하는 모습 또한 보여 준 적이 없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나, 이번에 확실히 드러났다.

그런데 왜일까.

이 꺼림칙한, 마치 물과 기름이 서로를 밀어내는 듯한 이질감은.

“나름 기대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작은 사람이었어.”

루돌프는 베르크 란을 매도하고 있다.

매도를 넘어선 진한 실망이 중저음의 칼날 같은 예리함을 가진 음성에서 뚝뚝 떨어졌다.

“하늘이 내린 선물을 갖고 있음에도 두 번의 기회를 전부 저버렸군.”

다음 순간 총성이 울렸다.

지붕 위가 아닌 저 너머다.

총성이 울려 퍼진 직후 웅웅거리는 무언가가 고막을 강하게 밀어냈고, 금속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고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순간 시야가 쥐구멍처럼 좁아져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루돌프는 그 찰나의 혼란 속에서도 모든 걸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법사. 성벽 위에서는 낭패를 봤지만, 역시 사각의 마법사답군. 그 찰나의 시간에 탄환의 궤적을 읽어 내고 은의 방벽으로 총사를 보호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곧 지붕 위에서 한스 징펠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한스 징펠만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물의 표면처럼 일렁거리는 환영을 또렷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환영의 중심엔 거울이 깨진 듯한 균열과 더불어 그의 미간 바로 위에 시커먼 구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적의 총탄이 닿은 자국이다.

지겔슈타트가 아니었다면 한스 징펠만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을 것이다.

“……호겔 프리츠.”

늘 여유롭던 총사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명랑하던 눈동자엔 그가 사냥하던 야수와 다를 바 없는 번들거림이 떠올랐다.

“확실히 실력을 키웠군.”

치지지직-

타오르는 화승을 지붕 위를 엮은 널판으로 가리면서 눈동자가 맹렬히 움직이며 어둠 속의 적을 찾는다.

그의 사냥감은 보이지 않는다.

그처럼 어둠과 하나가 되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눈에 띄는 건 앞으로 흔들리며 다가오는 등불 하나. 마를로네를 붙잡은 자다.

총성이 울려 퍼지는 데도 전진을 멈출 줄 모르는 겁 없는 등불이 만들어 내는 원형의 영역과 그 아래 초연하게 적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마를로네를 보며 한스 징펠만은 담담하게 기도했다.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시여. 제 운과 목숨을 그대에게 맡기겠나이다.”

기도에 맞춰 한스 징펠만은 등불을 든 상대의 심장을 가늠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울려 퍼졌다.

불과 철의 형제단 비전의 기술로 만들어진 황동 탄환은 밤공기를 갈랐다.

순간 등불이 흔들리고, 등불을 든 자의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냈다.

‘명중이다.’

두말할 것 없는 명중이다.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막기 어려우리라.

실제로 지겔슈타트는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적을 발견하고 방벽을 펼쳤으니.

한 명을 죽이고 시작하는 건 사기 진작은 물론 전투의 방향에 큰 도움이 된다.

운 좋게 지휘관이라도 쓰러뜨린다면 이 막간의 싸움은 싱겁게 끝나리라.

탄환이 상대방의 심장에 꽂히는 걸 기대하며 한스 징펠만은 숨을 죽였다.

형체가 움직였다.

“?!”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오른 순간, 일은 일어났다.

검이다.

한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그를 향해 날아오던 탄환을 튕겨 냈다.

“!!”

놀란 건 한스 징펠만이 아니다.

“호오?”

루돌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고, 베르크 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 안엔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탄환을 튕겨 낸다고?”

루페르트도 놀라긴 매한가지.

등불이 움직이며 마를로네를 붙잡은 존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검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훤칠하면서도 넓은 어깨, 균형 잡힌 몸.

그 얼굴은 염소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기괴한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건 누구지?’

의문이 루페르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사내의 검신이 스스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도펠죌트너인가?”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베르크 란이 앞으로 나섰다.

“이름을 밝혀라.”

좀처럼 말이 없던 그는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천둥 같은 일갈을 사내에게 쏟아 냈다.

“내 이름은 베르크 란이다.”

그 이름을 듣자 가면의 사내는 마를로네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마를로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목을 어루만진 후 마치 날아오르는 새와 같은 도약으로 일거에 조부에게 당도했다.

“할아버지.”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강해. 저 사람.”

“알고 있다. 가서 황제, 아니 룸왕 전하를 지켜라.”

“싸울 거야?”

“나 말고 누가 있겠나.”

“우리한텐 마법사가 있잖아? 재수는 없지만……. 아.”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도펠죌트너의 감각이 꿈틀거렸다.

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하고 눅진한 썩은 마법의 기운을 비로소 느낀 것이다.

폭도 속에 있던 그 마법사다.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찍어 눌렀던.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겠어? 내가 싸울까?”

“너로서는 1초도 버티지 못할 게다.”

“할아버지가 그 멍청한 선제후를 지킨다면?”

손녀의 물음에 베르크 란은 스틱을 허리띠에 꽂은 후 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저자를 죽이는 것뿐이다.”

베르크 란은 검과 등불을 든 채 다가오는 가면의 사내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저자는 도펠죌트너다.

모든 증거가 그가 도펠죌트너라는 걸 말해 준다.

마를로네 같은 특별한 경로가 아닌 이상, 모든 도펠죌트너는 베르크 란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한때 제국의 검이었지만 추방되고 빨간 명찰을 강제로 부착당한 채 걸인의 삶을 강요받은 도펠죌트너 사이에서 베르크 란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전설이다.

그런데 저 사내.

베르크 란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다가오고 있다.

틀림없다.

그는 결투를 원하고 있다.

말이나 생각에 의한 결론이 아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내의 인생이 속삭여 주는 예정된 운명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데서 죽을 생각은 없다.’

베르크 란이 검을 뽑았다.

낡고 비루해 보이는 검집 안엔 검은색을 은은하게 머금은 거울처럼 맑은 검신이 숨겨져 있었다.

베르크 란은 두 손으로 검을 잡아 날을 적에게 향하게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검에 불길이 타오른다.

한때 철혈대제 아래서 제국의 이름으로 무수한 제국의 적을 분쇄했던 투사들의 검이 제국의 변경에서 서로 경쟁하듯 불타올랐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그 경합의 증인이다.

그리고.

“이건 꽤 흥미롭군.”

한 사내만이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계승자가 둘이었나?”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저 루돌프의 눈동자 주변에 불길한 녹색의 안광이 일렁거리는걸.

‘저건? 통찰의 만화경?!’

지금까지는 사용하는 입장이기에 알지 못했다.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할 때 그 불길한 안광이 얼마나 크고 눈에 잘 띄는지.

단지 잘 띄는 것만이 아니다.

제아무리 미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조차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게 할 정도의 불경함이 서려 있었다.

‘이 정도였나?’

루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나 쓰고도 들키지 않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꽤 흥미롭게 됐군.”

루돌프의 눈동자 주변에 서린 안광이 사라졌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습니까?”

“알다마다.”

루돌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세.”

“네?”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베르크 란이 목숨을 걸 동안 여기를 빠져나가자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돌프는 불타는 검을 든 채 가면의 사내와 대치한 베르크 란의 넓은 등을 주름이 팬 눈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겠지. 져서 바닥에 나뒹굴겠지. 그가 죽였던 상대방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땅이나 하늘을 맥없이 응시하겠지.”

“그 사람이 진다고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네.”

루돌프가 먼저 오두막의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루페르트가 그의 뒤를 따라가려 할 때 누군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를로네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따라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찰나의 마주침 속에서 루페르트는 느꼈다.

마를로네의 늘 흐릿했던 눈동자 안에 그토록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 감정은 안도, 놀라움, 그리고 실망으로 이어졌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상황을 읽어 낸 것이다.

루페르트가 자신의 조부를 버리고 달아나는 결정을 했다는걸.

“…….”

그녀는 어두운 오두막 안에 홀로 남았다.

바깥엔 과거의 황제가 기다리고 있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인연도 끝이군. 베르크 란.”

그 미소는 루페르트에게 전에 느꼈던 이질감을 상기시켰다.

결코 하나로 섞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다름.

“자, 가세. 루페르트 가우저. 총사와 마법사를 부르게. 그들은 여차할 때…….”

루돌프가 중간에서 말을 멈추고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철혈대제라 불린 그 정도 되는 자가 애송이 황제의 감정을 읽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루페르트의 표정과 태도, 거기에 서린 강한 주저함과 반감을 순식간에 읽어 냈다.

루돌프의 미소가 걷혔다.

얕은 한숨을 내쉰 후 루돌프가 물었다.

“저 싸움의 끝을 보고 싶나?”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겨울보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오두막 너머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가면의 사내와 베르크 란이 마침내 격돌한 것이다.

그 싸움은 이쪽에선 관측할 수 없다.

다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파공음의 짧은 간극, 변화무쌍한 그 위치,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이 그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섬뜩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게 도펠죌트너라고……?”

창백한 얼굴로 지겔슈타트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란 말인가?! 그들의 권능이?!”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가 합류했다.

하지만 마를로네는 여전히 오두막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한스 징펠만이 오두막에 접근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를로네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네. 루페르트 가우저. 우리가 얻어 낸 기회가 아니야. 우리의 적이 우리에게 수여한 기회지.”

루돌프가 출발을 종용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루돌프가 은근한 노기가 드러냈다.

“…….”

이유는 없다.

정말이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머릿속을 맴도는 수천 개의 단어와 그 번뇌 속에서 서서히 루페르트의 생각이 형태를 갖춰 나갔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 누구든 좋다.

어떤 사람이든 좋다.

적어도 그는 나를 위해 싸우고 있다.

죽음마저 불사한 채.

버림받고 죽었던 황제를 위해서.

어찌 지켜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누구라도 좋다. 날 위해 싸워 준다면.’

루페르트의 눈앞에 과거의 풍경이 떠올랐다.

자신을 버리고 황궁을 떠나던 근위병들.

황제의 애타는 호소를 무시하던 기사와 전사의 후예들.

불타는 황궁 속에서 이름 모를 병사에게 유린당하던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

폐부를 뚫고 들어오던 칼날의 섬뜩함과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고통.

루페르트의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작지만, 결코 꺼뜨릴 수 없는 불꽃이 타올랐다.

‘나 또한 그 싸움을 기꺼이 지켜볼 것이다.’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에게 손짓했다.

계속해서 베르크 란을 엄호하라는 뜻이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 어둠 속에 숨겨진 각각의 적수를 대비했다.

루돌프가 뒤돌아섰다.

“그대는 자상하군.”

칭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허나 자상함은 평범한 자의 덕목이야.”

담담하고 부드러운 말이 채찍처럼 루페르트를 질타했다.

특히 평범하다는 말이 무엇보다 루페르트의 마음을 날카롭게 긁었다.

‘평범하다라…….’

“명심하게. 천 번의 채찍질 뒤에 보여 주는 한 번의 자상함이 수십 년간 베푼 자상함보다 더 심심한 감사를 받는다는 것을.”

그때 먼 곳에서 음산하고 음울한 마음 그 자체를 긁는 듯한 기괴한 포효가 들려왔다.

모두의 얼굴에 본능적인 경악이 떠오르는 가운데 외마디 외침이 저편에서 터져 나왔다.

“서, 설인이다!”

포효가 다시 한차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직후 전장의 소음이 사라졌고 오싹한 적막이 자리를 채웠다.

쿵! 쿵! 쿵!

발소리가 들려온다.

대지를 흔들고 태산마저 떨게 할 정도의 격렬한 진동이 믿기 어려운 속도감으로 거리를 좁혀 온다.

설인이 다가온다.

기록된 역사 이전부터 살아 있었을 불가해한 존재가 전설을 찢고 나와 현재를 파멸하기 위해 진군한다.

그 거역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무력한 도주뿐이다.

한스 징펠만이 서둘러 지붕에서 내려오고, 마를로네마저도 오두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리 없는 혼란 속에서 루돌프는 탄식하며 뒷짐을 진 채 돌아서서 진동이 울리는 방향을 그늘진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발 디딜 틈 없이 흩뿌려진 과거의 업보가…….”

옛 황제의 그늘 진 시선은 이어서 루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새로 싹을 틔우려는 업보를 물어뜯으려 하는군.”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늘 어둠에 가린 두건 아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감정의 색채를.

루페르트의 생각이 맞다면 그 감정은 동정 혹은 연민이리라.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

위기다.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위기가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측량하기 어려운 위기가 다가온다.

‘뭐지? 이 위험의 크기는……?!’

느닷없는 고함이 오두막 바깥에서 들려왔다.

“달아나!”

누가 그 말을 한지 알 수 없다.

모든 걸 찢어발기는 야수의 포효가 모든 걸 덮어 버렸으니.

루페르트는 우두커니 선 채 자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도했다.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원토록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산이 쓰러지며 이쪽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달아나십시오! 전하! 설인! 설인이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그 목소리 또한 설인의 포효에 잠겼다.

“…….”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언젠가 생각했었다.

죽음에도 색채가 있다면 하얀색이리라.

지금도 그 생각은 같다.

몽롱함 속에서 루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 쪽을 어루만졌지만, 그가 기대하는 소라고둥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신님.”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에 홀로 남겨진 과거의 황제는 옆에 없는 여신을 찾는다.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신님!”

보인다.

저기 눈보라를 몰고 이쪽을 향해 곧장 달려오는 괴물이.

그것은 다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다섯 개의 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겹눈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역겨운 곤충의 군집처럼 빽빽한 그 수십 개의 겹눈은 오로지 하나의 상을 담고 있었다.

바로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다.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저 괴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루페르트 가우저를 노린다는 것을.

하얀 죽음 속에서 루페르트가 느낀 건 터무니없는 불합리함으로 뭉친 의문이었다.

‘왜? 왜 하필 나를……?’

우두커니 선 채 루페르트는 다가오는 하얀 죽음을 응시했다.

‘여신님.’

그의 여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손을 포개듯이 잡았다.

“뭐 해요?”

루페르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붙잡은 여성을 응시했다.

“마리……!”

그녀가 황제를 잡아당겼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아마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눈보라와 눈사태가 죽음의 흰색으로 모든 걸 덮어 버렸으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