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17. 하얀 죽음 (1)
여정이 시작됐다.
안내는 루돌프가 맡았다.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가파른 오르막과 비탈길, 수직에 가까운 내리막을 지났고 한쪽은 얼음 한쪽은 녹음의 우거진 경계선을 지나기도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 루페르트는 문득 호기심을 느끼고 마를로네에게 다가갔다.
“마리.”
“무슨 일인가요?”
“저분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냐?”
루페르트는 홀로 떨어진 채 휴식을 취하는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저분이 다가오시던데요?”
“그래?”
“네. 성이 포위되고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가오더니 성에 들어갈 방법을 알고 싶냐고 그렇게 말했죠.”
“네 할아버지는 뭐라고 했지?”
“별말 없었어요.”
“아는 사이?”
“그런 거 같진 않았어요. 그래도 불쾌감을 드러내진 않았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뭐, 저와 달리 할아버지는 전하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서 걱정이 됐나 보죠.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들어줄 정도로.”
‘베르크 란은 철혈대제의 챔피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도 못 알아본 건가?’
가장 궁금한 건 마를로네와 루돌프의 관계가 아니다.
베르크 란과 루돌프의 관계다.
죽은 황제가 나타나 뻔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철혈대제의 챔피언은 그러나 루돌프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물론이고 그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은밀한 교감이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베르크 란과 루돌프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나 대황후의 시녀도 클라우데 2세를 알아보지 못했었지.’
어떤 원리로 철혈대제가 과거의 인연들에 인지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권능인지는 확실하다.
‘여신님의 권능인가. 타인의 눈을 속이는 그런 계열의 권능을 클라우데 2세에게 부여한 건가. 그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어.’
테타우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물어보리라.
아니 그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한시바삐 다시 여신님과 만나고 싶다.
그런 찰나에 루돌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그는 호들갑이나 거추장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단지 한마디 말을 하는 것만으로 루페르트 이하 모든 일행이 서늘한 살기를 감지하고 숨을 죽였다.
“저길 보시오.”
루돌프가 베르크 란을 불렀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
늘 무뚝뚝하고 폭력 같은 증오를 버무린 그의 얼굴엔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다.
“무슨 일이오?”
베르크 란에게 있어 루돌프는 철혈대제가 아닌 평범한 타인에 불과했다.
“저기.”
루돌프가 눈으로 뒤덮인 산악 절벽 쪽을 가리켰다.
마치 인간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한 하얀 털로 뒤덮인 두 발로 걷는 무언가가 눈 덮인 소나무 숲 사이를 성큼 걸음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생긴 것도 기묘하지만 공포감을 배가하는 건 그 크기다.
그 괴물은 10m를 족히 넘어갈 침엽수와 거의 키가 비슷했다.
그토록 거대한 것이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원시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저게 뭔 줄 알고 있소?”
베르크 란의 눈동자가 루돌프가 가리키는 지점을 향했다.
“!”
미세하지만 명백한 놀라움이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놀라움은 이내 경계와 더 진한 살기로 대체됐다.
베르크 란의 손이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잘은 모릅니다. 허나……. 저건…….”
마를로네가 어느새 검집을 들고 나타나 조부 옆에 섰다.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목례를 한 후 괴물을 노려보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가문의 숲에서 만난 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이네요.”
지겔슈타트가 나타나 일행 옆에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숲을 거니는 괴물을 응시했다.
그의 목젖이 꿈틀거리며 침을 삼켰다.
곧 지겔슈타트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겁에 걸린 목소리로 말했다.
“트, 틀림없습니다. 저건…… 저건, 울타니아의 설인입니다.”
지겔슈타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필 저 전설의 괴물이 설봉에서 내려올 줄이야……!”
멀리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개가 인간의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섬뜩한 짖음.
“저 괴물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저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후방 경계를 서던 한스 징펠만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그는 지겔슈타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 루페르트에게 아마도 지금까지 보여 줬던 얼굴 중 가장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설인은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가 창조하지 않은 짐승입니다. 인간의 사냥감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죽음과도 같은 적막 속에서 루페르트 일행은 그 끔찍한 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이 세상에 저런 괴물도 존재했단 말인가.’
제국은 물론 제국 내외에 갖가지 괴물이 존재하는 건 익히 알려진 상식이다.
제국 내에만 해도 오크를 위시한 갖가지 괴물들이 제국의 절반을 뒤덮은 광대한 삼림에서 서식하고 있고, 바다로 나가면 크라켄의 자식 같은 오로지 인간을 해치기 위한 마물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 해로를 위협한다.
저 먼 땅끝 리히트 보덴엔 스크라엘링이 무리 지어 호시탐탐 그들의 땅에 발을 디딘 인간을 몰아내려 하고 있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저 먼 남쪽 작렬하는 태양의 사막에선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땅이 있다고 한다.
그 무수한 괴이 중에서 저 설인은 아마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일 것이다.
지겔슈타트, 한스 징펠만은 물론이고 저 베르크 란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니.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괴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효만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의 포효는 단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걸 넘어 사람의 심력 그 자체를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소리 자체가 저주라고 할까.
‘회귀 전에 이 괴물을 안 만난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군. 룸 제국의 일개 군단? 아니, 저런 건 몇 개 군단이 와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인은 한동안 끔찍한 포효를 내지르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눈 쌓인 소나무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움직입시다.”
루돌프가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민한 몸놀림으로 속보로 걸어 나갔다.
일행은 빠르게 숲을 통과했다.
곧 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저분에게 안내를 부탁하게.”
루돌프가 베르크 란을 가리켰다.
베르크 란은 길을 알고 있었다.
안내역을 인계받은 그는 주변의 산봉우리의 형태를 보고 지형을 가늠한 후 거침없이 일행을 다음 목적지로 안내했다.
그의 길은 거칠고 험했으나 적어도 루돌프가 안내했던 길 같지도 않은 험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베르크 란의 걸음이 워낙 빨라 루돌프 때와 달리 루페르트는 숨이 차는 걸 느꼈다.
‘발걸음이 상당히 빠르군. 이 사람.’
그 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나 살펴보았다.
한스 징펠만은 낯빛 하나 호흡 하나 틀어지지 않았고 나머지도 사정도 마찬가지.
지겔슈타트 정도가 루페르트와 비슷한 숨참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루페르트에게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갈 만합니까?”
“네. 이 정도는.”
참았던 거친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쉬며 지겔슈타트는 저만치 앞서가는 베르크 란의 등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갈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하가 함께하고 있는데.”
자제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지만 원래 싫어했던 도펠죌트너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전처럼 드러내 놓고 비난하진 않지만 지겔슈타트의 표정과 목소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루페르트는 이 사내를 데리고 온 걸 조금은 후회했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민가가 보였다.
목동들이 거처로 쓰는 간이 오두막으로 안은 비어 있었다.
오두막 안에 들어가자 꾸릿한 냄새가 코안으로 확 밀고 들어왔다.
“전하께서 묵기엔 지나칠 정도로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밤의 추위와 이슬을 피하기엔 여기만 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여긴 룸왕이자 선제후이오, 곧 황제가 될 루페르트가 묵기엔 지나치게 누추한 곳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괘념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런 곳에선 몇 번이고 신세를 졌으니까요.”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짚을 정리한 후 보란 듯이 편안하게 누웠다.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르자 루페르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제 후보가 되기 전에 잠시 목동 일을 한 적이 있었죠.”
“그렇습니까?”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핏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조부 때부터 의절한 사이라서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의지할 곳도 없고 결국 하켄하임에서 갖가지 일을 하며 살았죠.”
다사다난했던 과거의 풍경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억나는 건 헤아릴 수 없는 밤하늘의 별들, 그 별자리를 보며 플루트를 불던 과거의 자신, 스쳐 지나가는 양과 충성스러운 사냥개.
하켄하임 시대의 삶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빈곤하고 비루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냥 그대로 하켄하임에서 목동이나 하며 사는 삶이 내게 맞았을까.’
“저기.”
옆에서 마를로네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희미한 불빛 탓인지 늘 눈동자에 머물러 있던 안개가 보이지 않는다.
명백히 흥미가 있는 듯한 시선.
‘이 녀석이?’
흔치 않은 사건에 루페르트는 흥미를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마를로네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거세해 보신 적 있으세요?”
“거세……?”
루페르트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갑자기 무슨 주제냐?’
“아니, 목동이라면 다 하잖아요? 씨 숫양 하나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새끼 때 거세하는 거.”
“저기, 그건 잘 모르겠는데.”
“목동 하신 거 맞으세요?”
마를로네는 이상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다행히 그녀의 열의는 바깥에서 들려온 조부의 근엄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마리. 무엄하게 전하한테 뭐 이상한 걸 묻고 있냐?”
“궁금해서요.”
“할 일 없으면 땔감이나 모아 와라.”
“네.”
마를로네가 자리를 뜨자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이 들어왔다.
한스 징펠만은 사냥꾼이자, 총사답게 오두막 여기저기를 살피며 총안구로 쓸 만한 틈새나 방벽 등을 살핀 반면 지겔슈타트는 바로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하.”
“네. 무슨 일인가요?”
“방금 저도 그……. 소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문제가 있나요?”
“아니 지나치게 허물이 없는 거 같아서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 호기심이 강한 모양이겠죠.”
“도펠죌트너는 실제 연령보다 나이가 어려 보입니다.”
“그런가요?”
“스물 아니, 어쩌면 서른을 훌쩍 넘었을지도 모르지요. 손녀라고 하지만 딸일 가능성도…….”
그때 바깥에서 또 한 번 베르크 란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일곱입니다.”
지겔슈타트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와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감히 도펠죌트너 따위가…….’
그러나 그의 분노는 강풍 앞에 촛불처럼 꺼졌다.
거의 모두가 동시에 남쪽을 노려보았다.
곧 시선들이 서로 맞부딪쳤다.
한스 징펠만이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추격자가 있습니다.”
남쪽에 불빛이 어른거린다.
등불이다.
숫자는 다섯.
한스 징펠만의 총기에 희미하게 타오르는 화승을 제외한 모든 불이 꺼졌다.
“음.”
루돌프가 소리를 냈다.
베르크 란은 물론 한스 징펠만마저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놀라움이 역력하게 묻어 나왔다.
루돌프가 루페르트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무래도 버거운 상대가 온 모양입니다.”
“버거운 상대라고요?”
떠오르는 건 단 하나.
루페르트는 저 오만한 지겔슈타트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 두건을 쓴 마법사를 떠올렸다.
‘설마 그 마법사가 나를 추적한 건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엔 검, 한 손엔 누군가의 팔을 잡아끌고.
그에게 붙잡힌 건 다름 아닌 마를로네였다.
‘저 녀석!’
잠깐 땔감으로 주우러 가는 사이에 붙잡힌 모양이다.
그런데 그 마를로네가 붙잡혔다는 건 또 다른 사실을 나타냈다.
루페르트는 어둠 속의 사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다. 들킬 위험이 있더라도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길한 녹색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천변만화하는 녹광 속에서 빛나는 문자가 떠오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루페르트의 어깨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