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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62화 (62/225)

62화 16. 모독자들 (5)

그 사내는 새벽의 미명이 밝아 오는 석주 사이의 회랑에 넓고 강인한 등을 보인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타고난 군주의 위엄이랄까.

절로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눈빛이 닿고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신하의 기분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닮은 색채를 띤 두건을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어슴푸레 속에 잠겨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감정의 격동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그를 폐하라는 호칭으로 부르려고 할 때였다.

석주 사이에서 익숙한 호리호리하고 가벼운 인영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전하. 안녕하세요?”

순간 루페르트는 시종의 말을 기억해 냈다.

‘아, 이 녀석도 있었지.’

마를로네가 루돌프 뒤에 비스듬히 서서 루돌프와 루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아는 사이 맞아요?”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에게 눈짓으로 아는 체를 하고 루돌프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저는요?”

마를로네가 따라온다.

“잠깐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식사가 필요하지?”

“따뜻한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요. 제 발에 맞는 장화가 있다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요구 사항이 점점 많아지는 부분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마를로네를 별실로 안내했고,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함께 임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루페르트는 몸소 물병을 들어 물을 잔에다 따라 내밀었다.

루돌프는 물잔을 가만히 바라보다 단숨에 들이켠 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어문트에서 자부아 쪽에 기이한 사람이 나타나고 농민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감돈다는 소문을 들었지. 그림이 그려지더군.”

“어떤 그림입니까?”

“반역.”

단순하지만 강렬한 울림에 루페르트는 간밤의 피로에 더해 앞이 살짝 아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반역이라…….”

“어쩌면 테타우에선 이미 정치 공작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테타우에서 말입니까?”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군은 포위할 뿐 공성을 할 기미는 없어. 참호도 파지 않고 방책을 강화하지도 않지.”

“시간을 끌겠다는 거군요.”

“여기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국의 미래도 암울해질 거야.”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겔슈타트보다 강력한 마법사가 입구를 틀어막았다.

돌파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그 마법사의 권능의 구체적인 형태는 미지수다.

교활하게도 자신이 지겔슈타트보다 위라는 걸 드러냈을 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철저히 숨긴 것이다.

늘 그렇듯 모르는 것이 더 위험해 보이는 법이다.

“……제국군을 움직여야 할까요?”

“그들이라면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겠지. 하지만 굳이 그들을 희생할 필요는 없어.”

“복안이 있습니까?”

“숨겨진 통로를 알고 있네.”

“숨겨진 통로.”

“그대와 나, 그리고 극소수의 호위만을 동반해야 할 걸세.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발견될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니.”

루페르트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지나칠 정도로 과감한 작전이다.’

성안에 갇혔다고 하나 루페르트에겐 여전히 강력한 호위대가 있다.

현재 자부아 성벽을 지키는 천 명 남짓한 수비대는 가볍게 제압하고 도시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제아무리 성벽을 포위한 마법사와 용병 집단이 전쟁의 프로라고 하나 농민 반란군 따위로 성벽을 넘어 루페르트의 목을 가져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그 호위를 포기할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천히 말라죽을지언정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는 현재와 달리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 불안정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늦출 수가 없다.

“시간을 지체하면 성벽의 인간들을 사주한 자가 목적을 달성하게 될 걸세.”

루돌프가 의자에 앉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조언은 절대적이다.

저 철혈대제라 불렸던 대제의 조언만 한 힘을 가질 발언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쩔 수가 없군요.”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루돌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간의 여운을 둔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문제의 원인이 뭔 줄 아나?”

“원인 말입니까? 글쎄요.”

“세간에서 전하를 두고 말하기를 대단히 비범한 자라고 하더군.”

“비범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다르게 생각하지. 그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는 인쇄소에서 찍어 낸 싸구려 팸플릿이나 대자보, 소문이 전부니까. 대중은 그대라는 사람을 알기보다는 그대가 한 일만을 기억하는 법이야.”

“…….”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쪽의 빈 자리를 어루만졌다.

소라고둥이 있는 자리다.

리프니에가 없었다면 그 숱한 업적을 과연 해낼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중도에 죽거나 포기하거나 아니면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페르트 자신이 말한 대로 그는 지극한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대의 적이 위명만을 듣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있어. 이번 사태 또한 그 일환이겠지.”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움직이세.”

“벌써요?”

“명심하게.”

루돌프가 바람처럼 문을 나섰다.

“늘 상대의 생각보다 빠르게.”

* * *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분더발트는 강한 반감을 드러냈으나, 루페르트의 뜻은 확고했다.

무엇보다 루페르트의 부드러운 한마디가 완고한 연대장의 고집을 누그러뜨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대와 그대의 뛰어난 장병들은 이런 궁벽한 산맥에서 죽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목숨들입니다. 그대들에게 어울리는 더 위대하고 격이 높은 전장이 있을 것입니다.”

분더발트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자신을 설득한 듯 결심한 얼굴로 완고한 얼굴을 들어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의 손엔 죽은 기병대장의 투구에 달렸던 붉은 깃털이 쥐어져 있었다.

깃털을 꼭 쥐며 분더발트가 물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루페르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공멸을 면하기 어려우니.”

“알겠습니다. 전하의 명을 받들어 성의 수비 및 기만 공작을 펼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정치 공작을 타파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대로 원군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전하.”

분더발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반드시 탈출하십시오. 이 분더발트 백작과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전하의 전장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궂은 곳을 맡을 기회를 주십시오!”

마주 잡은 두 손이 힘을 더했다.

분더발트의 설득이 끝난 후 루페르트는 탈출 행렬에 낄 인선을 발표했다.

탈출 인원은 총 다섯 명이다.

루페르트와 루돌프, 마를로네와 한스 징펠만.

그리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베르크 란이다.

형식적인 지위라고 하나 무려 왕이자 선제후인 신분에 시중을 들 시종이 없다는 건 위신에 손상이 가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시종을 포함하지 않았다.

체력도 약하고 전투에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약간의 편의를 위해 적대적인 영역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라고둥이 없는 현재 루페르트는 그 어떤 위험 요소도 배제해야 한다.

“그럼, 이 인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와 극소수 장교의 배웅을 받으며 루돌프가 말한 비밀 통로로 향했다.

비밀 통로의 입구는 붉은 산맥의 낭떠러지가 바로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첨탑에 숨겨져 있었다.

루돌프가 판자를 치우자 구멍 하나가 드러났다.

까마득한 과거에 용변을 보던 곳이다.

수백 년 전에 용도가 바뀌었지만, 당시의 꿉꿉한 악취가 첨탑 안에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한스 징펠만이 씨익 웃었다.

“호오? 선조의 근심을 덜어 내는 장소를 통해 탈출하다니. 이거 꽤 흥미롭군요.”

늘 모험을 찾는 그에겐 화장실 구멍을 이용한 탈출도 이색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루돌프와 마를로네가 먼저 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둥그런 구멍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건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그 사이에 흐르는 실개천이 전부지만, 구멍 바로 아래 발을 디딜 수 있는 돌출부가 있었다.

루돌프는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민첩함으로 바위와 틈새를 잡고 능숙하게 절벽을 타고 절벽 사이에 난 좁은 통로에 진입했다.

그다음은 마를로네다.

루페르트와 뒷사람을 위한 로프를 쥐고 훌쩍 구멍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장 가볍고 민첩하며 이능의 힘을 지닌 도펠죌트너답게 언제나처럼 가볍고 살랑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절벽을 타고 루돌프가 들어간 바위 사이의 틈새에 진입했다.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만일에 대비한 보험이다.

한스 징펠만이 나섰다.

“다음은 제가…….”

“아니. 제가 가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고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진 높이에 대한 본연적인 공포를 느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다.

가야만 하는 길이다.

침을 꿀꺽 삼키고 루페르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구멍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구멍으로 내려가기 전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첨탑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루페르트는 물끄러미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응시했다.

“당신은?”

“저, 전하!”

루페르트 앞에 깡마른, 잿빛 로브를 걸친 훤칠하게 키 큰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그는 다름 아닌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였다.

미지의 마법사에 기가 꺾여 두문불출하던 그가 갑자기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 하러 온 거지?’

아무리 그가 사각의 마법사고 마법 대학을 대표하는 자라고 해도 이번 계획을 반대한다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놓고 성벽 위에서 싸워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은 개처럼 달아난 주제에 이제 와서 루페르트의 중대사를 막는 건 선을 넘은 행위다.

반감은 루페르트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냉담한 시선으로 이어졌다.

“전하.”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물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은밀히 피신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찾아왔습니다.”

“이 계획에 이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정수리를 드러낸 그의 모습엔 과거의 신비로움은 그 작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또한 평범해진 것이다.

더 강력하고 더 신비로운 존재에 의해.

“당신의 이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직이 위험합니다.”

“하오나.”

“당신은 그 마법사 상대로 날 지켜 줄 수 없지 않소?”

“!!”

지겔슈타트의 훤칠하고 깡마른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루페르트는 슬슬 인내의 한계에 달하는 걸 느꼈다.

‘더 이상 내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하겠다.’

지겔슈타트에 대한 반감은 그의 반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저 아래 절벽 사이의 틈새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로프를 잡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소녀와 그 조부는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가장 어렵고 위험할 때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이다.

계약에 묶인 차가운 관계라 할지라도 루페르트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겔슈타트는 그들을 몇 번이나 무시했고 욕보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던 저는 제 앞길을 가겠습니다.”

이것은 루페르트의 뜻이다.

그 어떤 주장과 궤변도 꺾을 수 없는.

“전하!”

“뭡니까?”

“저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루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저 신비롭고 고고한 척을 하던 사각의 마법사가 고개를 숙인 채 부탁하고 있다.

“제 사명은 전하를 옆에서 지키는 일입니다. 한 번 추태를 부린 점은 뼛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 마법사 상대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 마법사만 아니라면 충분히 전하의 여정에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그의 음성엔 오만함도 신비로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존감을 빼앗긴 사내의 간절한 바람만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한다.’

이 청까지 뿌리칠 순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겔슈타트는 정당한 루페르트의 수호자다.

게다가 저렇게까지 자존심을 꺾었다.

이 이상 그의 체면을 무시하는 건 그만이 아니라 마법대학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

“…….”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의 어깨를 잡았다.

“지겔슈타트 법사.”

“전하.”

“당신이 저를 따라오시겠다면 저야 오히려 기쁠 따름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중에 당신만큼 높은 진리를 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

지겔슈타트의 몸에 떨림이 있었다.

그 생생한 떨림을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외의 힘을 지닌 강력한 존재도 결국은 사람.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

냉담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그다운 온화함이 돌아왔다.

“동행을 원하신다면 이쪽에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그는 탈출구 아래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를로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돕는 또 다른 사람들. 즉, 도펠죌트너에 대한 위협이나 멸시는 가급적 피해 주셨으면 하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겔슈타트가 답했다.

그가 약속을 어디까지 지킬지는 의문이지만, 이것으로 황제의 진용은 갖춰졌다.

수백 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의 해우소로 쓰이던 구멍을 통해 미래이자 과거의 황제가 빠져나왔다.

발밑에 펼쳐진 건 까마득한 낭떠러지.

루페르트는 로프에 의지해 위태로운 절벽을 타고 자신을 향해 뻗은 하얗고 가는 손을 응시했다.

손과 손이 허공에서 맞잡았다.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마를로네라는 소녀의 손이 기이할 정도로 차다는걸.

“어서 오세요. 황제 폐하.”

차가운 손이 그를 힘껏 잡아당겼다.

동시에 가벼운 빈정거림이 찬바람처럼 루페르트의 귓가에 살랑거렸다.

“왜 꾸물거리시나 했더니 짐덩이 하나를 달고 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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