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16. 모독자들 (4)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온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소용돌이가 성벽 위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 대기 중인 제국군과 성벽 위를 지키는 자부아군 모두 경외에 찬 얼굴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물러나라.”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낮고 힘없이 발한 목소리는 소용돌이를 타고 증폭되어 종국에는 마치 천둥 같은 울림으로 붉은 산맥의 산봉우리까지 닿는 웅웅거리는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마법사다!”
“마법사야!”
농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형수가 형리를 보고 동요를 일으키는 것처럼 농민들은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돌렸고, 더러는 달아나기까지 했다.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발한 채 지겔슈타트가 코웃음을 쳤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가 하늘 높이 들렸다.
나무로 만든 지팡이의 겉면은 원 재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기름칠한 종이로 뒤덮여 있었다.
수백 년간 거쳤던 무수히 많은 주인들이 지팡이에 마력을 담고 증폭했다. 그 마력을 제어하기 위한 술식이 유구한 세월에 걸쳐 쌓인 지층처럼 지팡이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가 부적 바른 지팡이의 끝단으로 급속도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지겔슈타트의 빛나는 눈이 타점을 찾았다.
어쩔 수가 없다는 문구가 적힌 피눈물 흘리는 여인의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랜 평범한 농민과 구분되는 준수한 복장과 꼿꼿하게 허리를 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쪽이 좋겠군.’
힘의 소용돌이를 지팡이의 끝에 집중시키며 지겔슈타트는 속으로 죽음을 불러오는 주문을 영창했다.
그가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자와 이단을 불태우는 정화의 원소.
불이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깃발을 중심으로 수십 미터에 달하는 영역이 불바다로 화할 것이다.
“불타 죽어라! 제국의 적들아!”
지겔슈타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끝났군.”
분더발트가 중얼거렸다.
그만이 아니다.
모두가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막간의 소요가 끝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페르트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
루페르트의 눈가가 문득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 순간 말도 안 되는 폭력과도 같은 무언가가 코로 밀려들며 폐부를 억누른다.
마치 목이 졸리는 느낌.
루페르트는 갑자기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폭력적인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곧 답이 나왔다.
‘이, 이건?!’
이 폭력적인 냄새는 평범한 향취가 아니다.
섭리를 왜곡하는 힘, 마법의 냄새다.
성 아래에서 루페르트는 능력을 발동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질식할 것 같던 압박감을 토해 내던 기운의 원점을 노려보았다.
“마법사다.”
루페르트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지겔슈타트의 지팡이가 멈췄다.
“?!”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형형한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경직된 얼굴엔 신비로움과 오만이 빠르게 걷혔고, 그 빈자리를 당황과 의문 공포 따위의 감정이 앞다투어 질주했다.
“이, 이런 일이!”
소용돌이가 그쳤다.
“무슨 일입니까?”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팡이에 서려 있던 마법의 기운이 산산이 조각나며 말라붙은 각질처럼 그 기운을 덧없이 흩뿌린 것이다.
“!!”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지겔슈타트는 성벽 아래를 맹렬히 탐색했다.
성벽 아래 누군가 있다.
남루한 로브를 걸치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
손에 들린 건 복장만큼이나 볼품없는 지팡이 하나.
그러나 마법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의 눈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저 남루한 자 주위에 모인 야수처럼 날뛰는 무형의 기운들을, 그 기운들이 또 다른, 지겔슈타트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지겔슈타트가 비틀거렸다.
루페르트가 다가가자 그는 혼백이 빠져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저자는……!! 틀림없습니다. 다섯 개의 이치를 깨닫고 육신 너머의 세계를 직시하는 자.”
지겔슈타트의 목울대가 불안하게 떨리며 불길한 한마디를 마저 쏟아 냈다.
“……오각의 마법사!!”
“제국 전쟁 마법사급이라는 소립니까?”
“그, 그렇습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마법사가 그토록 강력한 존재임에도 정작 전장엔 몇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강력한 마법사 하나를 키우기 어렵다면 그보다 열등한 마법사 여럿을 키우는 게 낫지 않냐는.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에서나 가능한 상상이다.
마법사는 대지와 하늘에서 마법의 기운을 뽑아 그들의 힘으로 치환한다.
지겔슈타트가 보여 줬던 권능의 소용돌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한 장소에 끌어 쓸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바로 여기에 열등한 마법사 여럿이 우수한 마법사 하나를 감당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우월한 마법사는 주변의 모든 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다른 열등한 마법사가 사용할 몫까지.
사각의 마법사는 그 아래 다른 모든 마법사를 압도한다.
그러나 그가 전장의 여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각의 마법사 위에 오각의 마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전, 전쟁 마법사급입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모든 권능을 강탈당한 지겔슈타트의 얼굴엔 베일처럼 늘 감싸고 다니던 신비로움도 오만함도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엔 창백하고 삐쩍 마른 사내가 있었을 뿐이다.
사각의 마법사는 부러졌다.
탕!
아래에서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멀다.
총탄이 닿을 거리가 아니다.
실제로 반란군은 대포의 사거리 바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툭.
자부아 공국의 깃대가 꺾였다.
산맥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받아 우아하게 나풀거리던 깃발이 지면에 처박히는 광경은 성벽과 성 아래의 모든 이가 볼 수 있었다.
성벽 너머에서 함성이 터졌고, 성벽 위와 아래엔 싸늘한 침묵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전하. 몸을 피하십시오.”
한스 징펠만이 철제 가방에서 신들린 손놀림으로 총기를 조립하며 급히 다가왔다.
“아까 말한 배신자 형제의 짓입니다.”
“배신자 형제?”
그러고 보니 아까 한스 징펠말이 말했다.
저 아래엔 불과 철의 형제단을 배신한 자가 있다고.
“매잡이 프리츠.”
한스 징펠만의 분노에 찬 눈이 성벽 아래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 솟은 장식이 달린 투구부터 시작해 온통 붉은색의 옷으로 치장한 사내를 향했다.
움푹 들어간 눈에 툭 튀어나온 광대, 감정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무표정으로 무장한 그 사내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형제 중 가장 장거리 사격에 능한 자였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그의 손에 들린 다른 총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긴 총신을 가진 길쭉한 총을 노려보았다.
“형제단에서 쫓겨난 후 실력을 더 키운 모양이군요.”
도제로 보이는 사내들이 장창만 한 꽂을대를 그 총구에 쑤셔 박고 재장전을 부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헨드릭 빌렘의 패거리에 들어갈 줄이야.”
지겔슈타트의 무참한 패배, 한 발의 저격으로 꺾여 버린 군기.
두 가지 사건은 자부아군의 사기를 바닥에 처박기에 충분했다.
“도망쳐야 해!”
“승산이 없어!”
병사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무기까지 내던지지 않았지만, 창과 총을 쥔 그들의 손엔 경련이 일어났고 다리엔 이미 힘이 빠져 자세가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기세를 타고 공격해 온다면 이들은 주저 없이 달아날 것이다.
반면 제국군은 건재하다.
두 개의 사건이 사기에 영향을 끼친 건 같지만 그들은 공포에 떠는 대신 호라신에 대한 기도를 올리거나 품 안의 술을 들이켜며 다가올 전투와 죽음을 담담하게 가슴 속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예병과 잡병의 차이라고 할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성벽 아래로 내려갔던 마르틴 후스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순간 루페르트는 그가 입은 번쩍이는 흉갑과 챙 넓은 모자에 꽂은 화려한 깃털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생각했다.
불길함이 짙어지는 가운데 한스 징펠만이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몸을 숙이십시오! 라우켄 백작님!”
총성이 울렸다.
라우켄의 백작, 마르틴 후스가 불이 꺼진 양초처럼 덧없이 쓰러졌다.
“즉사다.”
“심장이 뚫렸어!”
제국 병사들이 죽은 기병대장의 시체를 확인했다.
“도망쳐야 합니다.”
루페르트를 늘 옆에서 모시던 시종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붙여 준 그 사내는 말수가 적고 성실했으나, 공포는 그다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디로?”
탕!
한스 징펠만이 매잡이 프리츠의 것만큼은 아니나, 과도하게 긴 총으로 프리츠에게 맞섰다.
무정한 총탄이 서로를 노리고 대기와 바람을 가르고 양쪽을 오갔다.
불과 철의 형제단 사이의 대결.
탕!
두 자루의 총이 경쟁하듯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콩을 볶는 소리를 내며 파편과 가루를 만들어 냈다.
분더발트가 허리를 숙인 채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탕!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슈욱-
치명적인 한 발이 아슬아슬하게 루페르트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일어서 있다고 해도 맞지 않을 지점을 지나갔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상기된 분더발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포위당했습니다.”
제국 보병 연대장이 현실을 말했다.
마법사는 꺾였고, 기병대장은 죽었다.
제국군이 건재하다고 하나 자부아군의 사기는 와해 직전에 몰렸다.
무엇보다 저쪽의 전력을 가늠할 수 없다.
최소 확인된 것만 해도 귀신 같은 총솜씨를 지닌 불과 철의 형제단, 그리고 오각의 마법사다.
반격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수성 측이 움츠러든 것이 명확해지자, 반란군 측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백기를 들고 성벽 아래 나타나 요구 사항을 말했다.
“우리의 요건 조건을 말하겠소. 당장 룸왕을 이쪽으로 보내시오. 지위와 고귀함에 부족함 없이 정중하게 대접할 것을 조상과 땅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그들의 목적이 명확해졌다.
처음부터 그들은 루페르트를 노리고 왔다.
“답변이 없으시다면 좋습니다.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룸왕 전하의 신병을 이쪽에 인도하기 전까지 포위는 계속될 겁니다.”
이름 모를 대표의 말대로 포위가 시작됐다.
공포가 성안에 전염병처럼 감돌았다.
가장 큰 문제는 비축된 식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군량미는 일주일 안에 동이 날 것이고, 곧 성안의 가축의 씨가 마를 것이다.
또 한 달이 지나면 역병이 돌고 두 달이 지나면 지옥도가 뭔지 보게 될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이상 지겔슈타트는 회의에 나오지 않는다.
보다 우월한 마법사에 꺾여 버린 그는 방안에 틀어박힌 채 물과 음식조차 기피하고 있다.
회의를 주재하는 건 이제 분더발트 하나.
들판에 핀 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억센 잡초의 꽃처럼 분더발트는 위기 상황에 귀족 이전에 군인이라는 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의 방법은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이쪽이 보다 안전하고 위험도 적을 수 있겠죠. 하지만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뭔가 하기도 전에 스러지겠지요.”
“두 번째 방법은 뭡니까?”
“병사들이 힘을 잃기 전에 성문을 열고 싸우는 겁니다.”
“빨리 죽느냐, 천천히 죽느냐의 차이겠군요.”
“안타깝지만 그런 상황입니다.”
원군이 오지 않을 거라는 소문은 이미 성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 와중에 농민 폭도들에게 식량을 실은 수레 행렬이 도착했다.
병사들은 농민 폭도 사이에 배급되는 곡물 포대가 고어문트에서 만든 것을 발견했다.
골트문트, 고어문트의 선제후가 저 농민 반란군의 배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설상가상으로 고어문트 지방은 붉은 산맥의 바로 위.
당장 원군을 보낼 수 있는 건 골트문트뿐이다.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분더발트가 결심한 듯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질문을 던졌다.
“전하와 고어문트 선제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분더발트의 입장은 이해가 간다.
군대의 지휘자로서 무조건 확인해야 하는 문제다.
혹 고어문트가 배후라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해야 하는 게 최선의 선택지니까.
“으음…….”
루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회귀에서 골트문트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건 맞다.
몇 번이고 정치 공작을 펼쳤으며 암살 시도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의 작품일까?
그건 알 수 없다.
적어도 골트문트는 이번 선거에서 그에게 투표했다.
‘골트문트. 그 사람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 하나 이번 일의 배후라고는 단정하기 어려워.’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공기.
변화.
변화가 필요하다.
이 억눌린 공기를 날려 버릴 산뜻한 바람이 필요하다.
“전하.”
시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신분이 모호한 자가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변화를 갈구하는 욕망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에 나타났던 마를로네라는 여성입니다.”
“그, 그래……?”
루페르트의 얼굴에 진한 실망이 드러났다.
마를로네 하나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시종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만이 아닙니다. 한 초로의 사내도 동반하고 있더군요.”
“그 사람 이름은? 베르크 란인가?”
처음보다는 덜 뜨거운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빨리 말하세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하더군요.”
“안드리아의 루돌프……?”
거듭 실망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드디어 이채가 떠올랐다.
‘저를 도우러 오신 겁니까?’
드디어 불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변화의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