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60화 (60/225)

60화 16. 모독자들 (3)

“제국 쪽 산길을 따라 폭도가 접근 중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숫자는 약 5천 정도이며 마을을 거쳐 오며 점점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3시간 뒤엔 성벽에 이를 거 같습니다.”

장교와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소식을 전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는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제반 업무를 처리했다.

폭도의 규모, 무장 상태는 물론이고 그들의 동기까지 속속히 전달됐다.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흉년이 들었고, 가축이 병들어 죽어 밭을 갈 수도 없는데도 자부아 공작은 세율을 낮추기는커녕 부르봉 왕국 내 고향 영지 궁전의 증축을 위해 세금을 더 거뒀다고 하더군요. 북쪽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제국으로 떠났지만, 남쪽 사람들은 이도 저도 못 하는 처지라 부르봉 왕국까지 영민 대표를 보내 탄원했지만, 문전박대를 했다고 합니다.”

다만 루페르트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법사가 있는지는 불명입니다. 마법에 자질이 있는 병사가 가까이서 확인했지만, 마법의 냄새 같은 건 맡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위협, 마법사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저 소녀가 말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용병 집단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분더발트는 마를로네를 힐끗 쳐다보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헨드릭 빌렘 남작의 모독자들입니다.”

최근까지 전장에서 복무했던 분더발트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헨드릭 빌렘 남작?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진짜 남작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 망할 놈에게 작위를 준 적이 없지요. 스스로 남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근본 없는 저지대 놈다운 발상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놈들의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국 북서부, 슈타인마인 주 경계 너머엔 지대가 낮아 수시로 바닷물이 범람하는 습지대가 있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으나, 제국과 다른 왕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습지대를 간척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비옥한 옥토로 바꿔 놓았다.

이후에 저지대로 불린 그 땅 위엔 제국의 대도시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부유한 도시들이 들어섰다.

타고난 반골 기질과 돈에 대한 탐욕, 늘 서로 반목하면서도 외부인에 대해선 똘똘 뭉치는 기질이 그들을 대륙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강자로 만들었다.

철혈대제의 절묘한 정치 공작으로 저지대의 파벌이 둘로 쪼개져 예전만큼의 위세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저지대인들은 대륙 곳곳에서 우월한 지식과 탐욕, 기술의 힘으로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국가라기보다는 느슨한 도시연합이기에 왕은 없지만, 제국을 둘러싼 다섯 강국, 다섯 개의 왕관 중 하나를 당당하게 점하고 있다.

“모독자들은 공성과 수성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각 분야의 마스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저지대인들 사이에서 모독자들은 만 명의 군세와 맞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런 자들이 폭도들을 돕는다는 겁니까?”

“용병들이란 돈만 주면 어디로든 달려가는 무리니까요.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군요.”

“듣고 싶군요.”

“모독자들은 실력만큼이나 몸값이 비싼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저지대의 1급 도시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을 부르는데, 어찌 이 가난한 땅의 농민들이 그들을 고용했는지 의문이군요.”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마르틴 후스가 중얼거렸다.

“뒷배경이 있는 건 아닐는지.”

분더발트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군요. 다만 지금은 뒷배경을 논의할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우리의 사명은 룸왕 전하를 테타우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니까요.”

농민 폭도에 막강한 용병단이 붙었다고 하나 이쪽도 제국 최정예다.

공성전에 작은 재주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루페르트 쪽엔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사람이 있다.

“마법사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제부터 지겔슈타트는 평소보다 강한 힘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귀가 윙윙거리는 듯한 압박감, 때때로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경험 많은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조차 눈치를 볼 정도의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룸 제국에서 마법을 금지했는지 알 것 같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지겔슈타트가 앙상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폭도가 몰려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곳 성벽 위에서 말이죠.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가 되실 분의 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할 겁니다.”

과한 자신감을 드러낸 직후 지겔슈타트는 마를로네 쪽을 힐끗 쳐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이능은 본시 마법사의 소관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도펠죌트너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여 주겠다는 소리다.

마를로네는 억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각의 마법사께서 나서겠다면 마음이 든든하군요.”

“일단 농민을 흩어 놓으면 우리 기병대가 그들을 산중으로 쫓아내겠습니다.”

분더발트 일행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마법사가 나선만큼 그들이 할 일도 줄어들게 되는 법이니.

“오늘 중으로 출발하도록 하죠. 뒤처리는 이쪽에 맡기도록 하고요.”

“최대한 피를 덜 보는 방향으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룸왕 전하의 발에 하찮은 피를 묻히는 건 제국에 오물을 묻히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마를로네의 경고는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루페르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상황이 기묘한 건 맞아. 하지만 이 정도의 전력이다. 멸망기의 제국도 아니고 전성기의 가락이 남은 제국군과 제국 마법사를 상대로 누가 감히 맞설 수 있단 말인가?’

평온하면서도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끝났다.

“저기.”

그림자 속에 소리 없이 머물러 있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전하.”

“아, 너 거기 있었구나. 한마디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저 이제 가 봐도 되죠?”

“내 인장을 찍은 서류를 시종이 가지고 있을 거다.”

“고마워요.”

마를로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구름 위를 산책하는 듯한 명랑하고 가벼운 걸음걸이.

복도를 향해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섰다.

“전하.”

“뭐냐?”

“전 분명히 경고했어요.”

늘 무표정한 얼굴 구석에 희미하지만 명백한 실망감을 드러낸 채 그녀는 다시 돌아섰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 *

자부아 산악지대의 백성이 떼를 지어 자부아 공국의 수도인 드부이성 앞에 몰려들었다.

농기구와 몽둥이, 아마 경비대에서 탈취했을 조잡한 구형 총기 등으로 무장한 그들 위엔 무릎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받는 여인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섬뜩한 그림 아래엔 ‘어쩔 수가 없다’라는 룸어로 적힌 문구가 핏빛으로 갈겨 쓴 것처럼 적혀 있었다.

“저들이 폭도군요.”

드높은 성벽 위엔 루페르트를 위시한 제국의 장수들이 서서 몰려드는 폭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폭도들은 수레에서 미리 준비한 목책으로 도로를 막고 도시를 포위했다.

대표라는 자가 앞으로 나와 뭐라고 떠들었지만 그건 루페르트 일행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자들을 응시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

최근까지 전쟁을 경험한 그들의 안목은 예리했다.

“역시 평범한 폭도군요. 기율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전열을 보십시오. 장비도 형편없기 짝이 없군요.”

“말을 타고 다니는 장정이 여럿 보이지만 백 명도 채 되지 않고 제대로 된 기마술도 기병 전술도 훈련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말을 탄 기수. 딱 그 정도 수준이군요.”

순식간에 적의 상태를 파악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공격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은 지겔슈타트다.

그가 손을 한 번 휘저으면 저 폭도들은 시체 몇 구를 남긴 채 흩어질 것이다.

문득 루페르트의 눈앞에 복도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마를로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요.”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들어 포위군을 살폈다.

행여나 마를로네가 말한 그 강대한 마법사가 있는 걸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

‘마법사는 없다.’

망원경으로만 들여다본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테타우에 있을 영혼 동맹 피리스의 능력인 마법사의 후각까지 발휘해서 꼼꼼하게 적진을 살폈다.

마법의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루페르트에겐 날카로운 눈이 있다.

동행한 한스 징펠만이다.

그는 투박하지만 확실한 성능의 단 안경으로 적진을 차분히 관찰한 후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는 마법과는 연이 없어서요. 누가 강대한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스 징펠만의 냉담한 시선이 적진 후방에 화살처럼 매섭게 꽂혔다.

“배신자가 하나 있는 거 같더군요.”

지휘부로 보이는 어두운 실루엣 중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붉은 투구를 쓴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는 장창을 연상케 하는 긴 총을 등 뒤에 창처럼 세워 메고 있었다.

‘매잡이 프리츠.’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불타는 마을과 시신이 널브러진 광경이 떠올랐다.

아울러 마을 입구 옆에 인형처럼 서 있던 갈 곳 없는 쌍둥이 또한.

‘결국 다시 만나는군.’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을 돌아보며 물었다.

“배신자요?”

“우리 형제단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꽤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설마하니 저지대에 있었을 줄이야.”

한스 징펠만은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늘 온화한 그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허나 지금 들을 이야기는 아니다.’

이 전장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대기가 거칠어졌다.

옷깃은 휘날리지 않지만 명백한 강풍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성벽의 한가운데로 모여들고 있었다.

두 눈에 형형한 빛을 번득인 채 지겔슈타트가 성벽의 난간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루페르트는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아찔한 마력의 폭풍이 저 사내의 몸에서 휘몰아치고 있다는걸.

‘이것이 사각의 마법사인가?!’

시공을 뒤틀고 섭리마저 부정하는 자.

제국의 마법사가 성벽 위에 서서 아래의 열등한 자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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