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14. 선거 (3)
등에 새겨진 딱지가 저절로 떼어지고 가려움이 가시길 시작할 무렵,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에게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청했다.
때마침 시의적절하게 리히트보덴에서 진상품을 보내왔다.
노르드마르크의 상회를 통해 운송된 진상품엔 평소 보던 일각고래의 뿔만 아니라, 영롱한 색채로 사람의 눈을 홀리는 진주 또한 가득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동봉한 아서 픽튼의 서신엔 아래와 같은 글귀가 투박하고 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약소하지만 선제후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다음에 연락선이 올 땐 황제가 된 선제후님의 소식을 듣고 싶군요.
‘아서 픽튼.’
루페르트가 슈발츠마인을 손에 넣었다고 하지만 모든 재정을 자신이 관리하는 건 아니다.
슈발츠마인에도 선제후 궁정이 있고 궁정의 재정은 가문의 일원들로 구성된 가신들이 관리한다.
재정 지출의 큰 방향과 방침을 정할 순 있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다.
애시당초 별다른 작위도 돈 되는 영지도 없는 루페르트에게 리히트보덴이라는 든든한 자금줄은 루페르트가 정치를 할 수 있는 힘 그 자체다.
돈이 모든 게 아니라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군주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개인의 알량한 충성심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쉽사리 증발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루페르트는 보석함 안의 진주 중 가장 알이 굵고 색깔이 좋은 것 몇 개와 일각고래의 뿔 중 최상품을 뽑아 골트문트에게 줄 선물로 준비했다.
“호오. 이게 그 일각고래의 뿔입니까? 상아보다 더 윤기가 돌고 감촉이 좋으며 색채 또한 아름답군요.”
선물을 싫어하는 군주는 단 한 명도 없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골트문트도 예외는 아니다.
있는 놈이 더 밝힌다고 그는 루페르트의 진귀한 선물을 보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꽤 오랫동안 그것을 감상했다.
“최상품의 진주군요. 이건. 이런 건 얕고 따뜻한 남쪽 바다에선 나지 않는 것이지요. 아내가 대단히 좋아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선물이고 정치는 정치다.
골트문트는 누구보다 그 양자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다.
선물을 바라보던 흐뭇한 시선이 날카로운 경계의 시선으로 바뀌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인 물음.
예상된 반응이다.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와 꽤 오랫동안 함께했으니까.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는 골트문트의 특기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저렇게 표변하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귀한 선물로 골트문트의 마음속 어딘가엔 루페르트의 평가가 살짝 올라갔다는 걸.
총점이 100점이라면 10점 정도는 가뿐히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고서도 루페르트의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전매특허인 포커페이스조차 흔들릴 정도의 감정의 폭풍이 내면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표정 관리가 안 돼!’
어쩔 수 없다.
오늘의 목적은 루페르트에게 아마 이 세상에서 자신을 파멸시켰던 융커스 베샤문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여인 울피아나니까.
이번 생엔 절대로 황후로 맞이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그 무시무시한 여자를 자신에게 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
‘진짜 골트문트가 그녀를 내게 내주면 어떻게 하지? 회귀를 해야 하나? 아니, 그 전에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선제후님?”
골트문트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 친구. 이런 사람이었나. 촌뜨기라고는 하지만 지난 회합에서 그는 상당히 세련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순수한 실력으로 선제후 자리를 꿰찬 모두가 주목하는 신성 아닌가?’
골트문트의 시선이 의문에서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할 때였다.
“저기.”
루페르트가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라고둥을 꽉 쥐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오랜 습관인지 아니면 리프니에에 대한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졌는지.
그런데 그 작은 손짓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 흐음. ]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충 무슨 사정인지 알겠네요. ]
‘여, 여신님!’
[ 참으로 꼴불견이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정말이지 여자한테 몇 번 당했다고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도저히 안 되겠어요. 당신의 평가를 하향해야겠네요. 여자아이한테 지는 남자로! ]
‘크윽.’
[ 하지만 제가 있잖아요? ]
‘여신님.’
루페르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저질러 버리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이 보증했다.
그 말은 어떤 울림보다 그 어떤 선언보다 루페르트에게 명확하게 와닿는다.
루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골트문트를 의젓한 눈빛으로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만.”
루페르트는 소리 내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일전에 말씀 주신 따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여신의 응원이 있다고 하지만 마음의 엉킴까진 풀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계 이상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법 교수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세련된 언어와 정중한 귀족의 화법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단어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요? 제 여식에게 말입니까?”
골트문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루페르트는 그것이 골트문트가 불쾌감을 느꼈을 때 보이는 습관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뭐라도 끝을 봐야 한다.
황제로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루페르트는 축구의 달인으로 집요한 골잡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크윽!’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지장.
그러나 뭐라도 내뱉어야 한다.
“그, 그러니까. 한눈에 반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폭탄과도 같은 고백에 골트문트가 입을 다물었다.
“?!”
천하의 골트문트가 당혹감을 얼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음모에 능한 그라고 해도 루페르트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이다!’
루페르트는 호흡을 고르며 최대의 자기기만을 마무리했다.
“따님을 주십시오!”
차디찬 시선이 느껴진다.
루페르트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골트문트를 응시했다.
선제후가 이보다는 더 차가울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거절합니다.”
* * *
영지로 돌아오는 길.
루페르트는 채찍질을 당했을 때보다 더 넋이 나간 얼굴로 간신히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
거의 혼백이 다 빠져나간 얼굴.
‘황제가 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그 앞엔 루돌프가 앉아 있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며 뭐가 그리 웃긴 지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살짝 원망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루돌프 님께서 즐거우시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합니다만…….”
“즐거워. 즐겁고말고. 정말이지 그대를 보고 있으면 실로 오랜만에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
루돌프는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축 늘어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루돌프가 은근히 사람을 골리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
잠시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정돈된 후,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투박한 형태였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은 어떤 감언이설보다 확실하게 골트문트의 마음에 새겨졌을 테니까.”
“그럼 그분이 저에게 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솔직하게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은 부족해. 하나가 더 남았지.”
루돌프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그런가요? 그 하나라 함은?”
“그건 이미 진행되고 있네.”
루돌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그 미소에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수렁을 연상했다.
* * *
카를 호이징거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허름한 영지에서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살던 하급 귀족이었다.
철혈대제 이전의 황제 천둥제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천둥제라는 작자가 좀 자식을 많이 남겼어야지.
사생아를 포함하면 아들만 30명이 넘어간다.
그중에 분명 큰 지분을 차지한 자식도 있겠지만, 적어도 카를 호이징거의 부친은 그 정도로 많은 애정을 받진 못했다.
그는 하급 귀족에 머물렀고, 그 자식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존경도 없고 기대도 없는 삶.
그러던 어느 날 카를 호이징거의 인생은 갑자기 변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군인이나 돼 볼까 기웃거리던 그에게 한 사내가 찾아왔다.
그의 정체는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
일면식도 없는 중년의 미남자는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야. 당신 같은 선량한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걸세.”
상상도 못 한 작위, 영지, 부유함이 선물로 주어졌다.
꿈만 같았다.
원하던 미주(美酒)도 마음대로 먹고 계집질도 마음껏 했다.
옆에는 든든한 호위가 지키고 서 있었고, 언제라도 호위를 이용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도 무지하고 촌스러운 고향 친구들 대신 세련되고 우아한 사람들이 측근으로 붙었다.
황제 후보가 된 이후 얼마 동안은 고향 친구들과 함께했지만, 친구 사이 간이라고 해도 격차가 크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지는 법.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던 친구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한 녀석만이 끈덕지게 옆을 지켰다.
한스라는 이름의 평민이다.
돈 좀 만진 상인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그쪽도 아들이 많아, 막상 물려받을 게 없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오늘도 찾아왔다.
“저기. 카를.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네 새 친구들 말이야. 다 좋다 이거야. 하지만 한 달 전부터 옆에 나타난 사람들 말이야. 평판이 안 좋아. 여행자 길드 출신이라고 하던데. 너도 알잖아? 여행자 길드가 뭐 하는 인간들인지? 하브루타 사람 패거리잖아?”
한스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괜찮은 친구다.
평소엔 띠껍게 대하지만 속이 깊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지혜의 편린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진정한 조언을 하는 친구였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한스는 짜증 날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와 카를의 생각을 바꿔 놓곤 했다.
충동적으로 외국 상선에 타려고 했을 때 막아 주던 것도 그였다.
그 외국 상선은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켄의 자식이라 불리는 바다 괴물에게 당해 침몰했다.
한스가 아니었다면 카를 호이징거도 물고기의 상차림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이제 카를 호이징거는 제국의 황제마저 바라보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중심부에 선 자다.
상대는 보잘것없는 상인의 자식.
재산이라도 많다면 모를까, 가진 거 하나 없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구혼조차 못 한 채 그녀가 늙은 용병한테 시집가는 걸 지켜볼 정도로 무력한 인간이다.
그의 조언이 인생에 도움이 된 건 맞다.
목숨을 건진 것도 맞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그 본질은 아무리 속이고 감추어도 바꿀 수 없다.
“어이. 한스.”
카를 호이징거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와 너와는 입장이 다른 거 같다.”
모두 알고 있지만 감히 말하기 어려운 한마디가 친우의 입을 통해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우리 집안이 가난하고 물려받은 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희들과 섞이긴 했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나와 네가 같지 않다는 거.”
“그, 그건 맞아.”
친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카를 호이징거는 그 모습을 보며 냉담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만나지 말자.”
“조,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스가 고개를 들었다.
평민, 상인의 아들치고는 지나치게 올곧은 눈빛.
카를 호이징거 마음 깊숙한 곳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가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 몇 번이고 자신에게 조언을 하던 바로 그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