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14. 선거 (4)
‘한스.’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카를 호이징거는 선인도 아니지만, 악인도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을 고칠 생각은 없다.
‘다 너를 위해서다. 나쁘게 생각 마라.’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말했다.
격이 다른 자는 결국 다투기 마련이니 그 다툼이 커지기 전에 미리 헤어지는 것 또한 친구들에 대한 예의라고.
어쩌면 그들이 황제가 된 이후에 발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복잡한 심경 속에서 한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하지만 내 말. 명심해. 그 친구들. 네 편은 절대 아니야. 전에 네가 그 사고를 쳤을 때도 그 녀석들이…….”
카를 호이징거가 손짓했다.
‘한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좀 아프겠지만 널 위한 거다. 아니, 우리를 위한 거야.’
험상궂은 사내들이 나타나 한스를 에워쌌다.
“카를?! 카를?!”
당황하는 한스가 카를을 불러 보지만, 카를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한스!!”
뒤이어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고 구슬픈 비명이 들려왔다.
앞으로 그를 볼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기 저편엔 보다 세련되고 멋진 친구가 있으니까.
그중 하나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욕정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요염한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가르테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여인.
이민족인 하브루타인답게 그 용모는 제국인과 조금 달랐지만, 그 차이가 오히려 제국 여인과 뚜렷이 구분되는 매력으로 여겨질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지적이었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며, 밤에는 갖가지 쾌락의 기술로 동정이었던 카를 호이징거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가르테는 마음의 병을 낫게 만드는 미약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마르가르테는 요염한 표정을 지은 채 위를 바라본다.
건장한 하브루타인들이 숙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거기엔 갖가지 향료와 목욕물과 침대가 있었다.
잠시 후, 카를 호이징거는 미약에 취한 채 잦아드는 쾌락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저기. 카를.”
마르가르테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를 보며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한바탕 정사를 치렀지만, 그녀의 굴곡 있는 뒷모습을 보니 카를 호이징거는 욕정이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응. 자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고.”
“당신 뒤에 골트문트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래. 그 양반이 내 뒷배경이지.”
“요즘은 어때?”
그 물음에 카를 호이징거의 얼굴에 격한 분노가 스스럼없이 묻어 나왔다.
“아주 날 안 좋게 보고 있어. 화대를 받고도 안 받았다고 사기를 치는 술집 년 하나 홧김에 밀쳐서 죽인 거 뭐가 대수라고. 귀족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년은 예전 같으면 광장에서 돌로 찍어 죽였을 건데!”
“설마 그 사람이 널 후보에서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날 후보에서 사퇴시킨다고?”
“보조금도 끊었다며? 알현을 요청해도 받아 주지도 않고?”
부드럽지만 가혹한 진실의 연타.
카를 호이징거는 울상을 지으며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마르가르테는 검은 눈동자로 카를 호이징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교태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은근히 말했다.
“그 사람에게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날 벌레처럼 보던 그 여자?”
카를 호이징거는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안 드는 년이야.”
“골트문트에게 그 딸을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어림도 없을걸? 안 그래도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데.”
“딸 쪽에서 네가 좋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날 싫어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내를 검은 눈의 여인이 가만히 쳐다본다.
촛불이 일렁거리며 타들어 가는 가운데, 마르가르테는 붉은빛의 약제가 든 약병을 흔들며 교태로운 눈웃음을 머금었다.
“이 약을 써 보는 건 어때?”
“약?”
카를 호이징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과 미약에 취한 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 여자 마르가르테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적을 안겨다 주었던가.
원하는 여자를 바로 안게 해 주었고, 도박판에서 몇 번이고 거액의 돈을 따게 할 정도로 신통력이 있는 여자다.
‘이 하브루타 마녀. 다른 건 몰라도 신통력 하나만은 확실하지.’
욕망을 어설프게 숨기며 카를 호이징거가 물었다.
“무슨 약이지?”
마르가르테가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사랑의 묘약이야.”
“사랑의 묘약……?”
카를 호이징거의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응. 그 어떤 사람도 거역할 수 없는.”
마르가르테는 속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카를 호이징거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때? 해 보지 않겠어?”
카를 호이징거의 눈이 그토록 흔들리는 건 약 기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 * *
황제 후보 중 하나였던 카를 호이징거가 변사체로 발견된 건 선거가 있기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가까운 곳이기에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함께 장례식을 보러 갔다.
다른 시간 축에서 황제로 선출된 남자의 장례식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묘역, 관, 묘비 모두 상급의 재료를 사용했지만 모인 사람이 지나치게 적었다.
“…….”
그 자리엔 검은 두건을 쓴 두 사내가 있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장례식의 풍경을 응시했다.
공허하고 쓸쓸하다.
우울한 부슬비가 내리며 망자의 죽음을 슬퍼할 뿐, 살아 있는 인간 중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재산은 어떻게 하나?”
“남긴 재산이 없다고? 아니, 골트문트한테 받은 게 있을 거 아닌가?”
“골트문트가 어떤 인간인데. 어험! 선제후는 계산이 칼같은 사람이야. 돈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소액을 가불하는 식으로 용돈을 줬다지 뭐야. 그마저도 후반기엔 끊었던 모양이군. 재산 같은 게 모일 리가 있나.”
형제와 친척들.
오직 돈만을 이야기할 뿐, 망자에 대한 예의 같은 건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온 것만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를 전부 갖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것이 나를 제쳤던 남자의 최후인가.’
루페르트는 오싹한 공포에 잠겨 들었다.
남의 일이 아니다.
그 또한 중도에 죽었다면 비슷한 형태의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카를 호이징거는 형제라도 많았지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에 편입되기 전엔 친척 하나 없는 몸이었다.
‘이것이 황제가 되었던 사내의 최후인가.’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루페르트와 루돌프에게 다가왔다.
펑퍼짐한 옷과 면사포로 몸과 얼굴을 가렸음에도 미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체형과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루페르트는 빨려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국엔 보기 드문 색채.
미지의 여성은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보고는 루돌프에게 목례를 했다.
‘아는 사인가?’
루돌프가 손을 흔들자 그녀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등 뒤로 참배객의 싸늘한 목소리가 화살처럼 꽂혀 들었다.
“저 여잔가? 형을 갖고 놀았다는 여자가.”
“하브루타인과 놀아났다고 하더니. 진짜였군.”
“구원받지 못할 족속들과 놀았으니 동생도 구원받긴 글렀구만.”
의문의 여성이 떠난 직후 한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검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가릴 수 없는 가난함과 비천함이 드러나는 촌스러운 사내였다.
그 사내는 막아서는 장의사들을 밀어내고, 땅에 반쯤 파묻힌 망자의 관을 붙잡은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이 멍청아! 내가 그렇게! 그렇게 그것들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왜 너는 모르냐? 너는 한낱 권력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의 이름이 누군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를 호이징거. 나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지만, 너는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군. 적어도 직언을 할, 그리고 너의 죽음을 위해 울어 줄 친구가 있었으니.’
사내의 애도를 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이걸로 또 한 표 확보했군.”
“……이것도 당신의 안배입니까?”
“골트문트도 의외로 과격한 구석이 있군.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어문트 선제후가 그를 죽인 겁니까?”
“간단한 공작을 했지.”
“공작요?”
“사람의 본성이라는 건 대체로 현재 가진 지위나 재산, 권력에 의해 가려지기 마련이지. 흔히들 농부는 선량함과 가까운 속성이 있다고들 표현되지 않나?”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느낌이 있지요.”
“하지만 모든 농부가 선량할까?”
“그건 아닐 겁니다.”
루페르트는 보잘것없던 남자 정원사 막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 호이징거의 인격을 확인했지. 나름 귀족치고는 소탈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골트문트가 뒤를 봐주기 시작한 뒤부터 본성을 드러내더군. 그래, 한 마리 개라고 할까. 개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우게 하고 사람을 물어뜯게 만들었지.”
장의사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우울한 노래 속에서 망자의 관이 장지에 매장됐다.
여러 개의 삽이 흙으로 관을 덮는 가운데, 머리가 벗어진 구교 신부가 향로를 흔들며 틀에 박힌 기도문을 외워 댔다.
“골트문트가 이해타산적인 인간인 건 맞아. 자신의 왕조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딸도 거침없이 카드로 쓸 인간이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장지 쪽에서 누군가의 구슬픈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독 초라하게 차려입은 보잘것없는 사내의 것이었다.
“카를! 우린 친구였잖아!”
카를 호이징거의 형제들이 불쾌하면서도 수치심이 깃든 얼굴로 그 사내를 바라본다.
그들도 알고 있다.
피로 이어진 형제자매보다 저 사내가 망자를 기리는 마음이 더욱 크다는 걸.
그의 곡소리가 커질수록 묘지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자네가 골트문트라면 사람을 물어 죽이고 오물을 뒤집어쓴 미친개한테 귀한 딸을 내주겠는가?”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루돌프는 소년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슬픔, 후회, 면피.
루돌프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승리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이것이 철혈의 길인가.’
결과만 놓고 보면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약간의 공작만으로 후보를 제거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왜일까.
이 익숙한 반감은.
문득 마를로네의 무표정한 얼굴이 루페르트의 눈앞을 흐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늘 안개가 낀 듯한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그를 질책하는 것처럼 비쳤다.
“…….”
사내의 곡소리를 뒤로한 루페르트의 앞에 제국의 수도 테타우의 성벽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현재까지 확보한 표는 셋.
세속 선제후 중 하나.
성직 선제후 하나.
루페르트 가우저 본인의 표.
남은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선제가 지정한 자, 안젤리나의 표다.
지난번,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표를 행사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루페르트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가문의 가장 큰 어르신인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할 순 없었다.
‘결국 나머지 하나는 대황후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그분을 만날 수 없는 지금,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루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은 언제나 그렇듯 야릇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입을 여는,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만 하는 그의 모습은 리프니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성격도 태도도 느껴지는 성숙함도 전혀 딴판이지만 말이다.
이제는 이 노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는 루페르트를 황제로 만들어 주려 온 사람이니까.
루페르트의 시선을 느꼈을까.
침묵에 잠겨 있던 루돌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집무실 한구석을 차지한 소녀의 조각상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음영에 가려 희미한 눈동자 너머로 갖가지 감정의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그녀를 만날 시간이 왔군.”
“안젤리나 대황후 말씀입니까?”
“그녀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최후의 한 표를 받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