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51화 (51/225)

51화 14. 선거 (2)

“그 작은 소라고둥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

소라고둥 안을 들여다본 적은 없다.

호기심이 없진 않았지만, 루페르트의 신앙심은 그 가벼운 호기심을 덮어 버릴 정도로 강했으니까.

다만 일상을 영위하던 중 얼핏얼핏 보았던 소라고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게도 그러했고.

“텅 비어 있지. 아무것도 없어.”

루돌프는 루페르트와 신앙심의 깊이가 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소라고둥이 그대와 여신의 매개체라는 건 확실하지. 하지만 말이야. 젊은 황제여. 여신이 과연 그 소라고둥 안에 항상 머문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걸까?”

“죄송합니다.”

루페르트가 루돌프에게 정색한 표정으로 아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렴풋이 그의 정체를 파악한 루페르트로서 저 노인은 동경의 대상이자, 되고자 하는 모범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라고 해도 리프니에를 의심하거나 모독하는 건 루페르트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저는 그 사안에 관심이 없습니다.”

루페르트는 딱 잘라 말했다.

루돌프의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

“여신님을 어지간히 존경하는 모양이군.”

“그분은 저에게 모든 걸 주신 분입니다. 여신님이 없었다면 저의 생은 불타는 황궁에서 그대로 끝이 났겠지요. 황궁의 벽에 새겨지지도 못한 미완의 황제로 말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대도 숨기고 싶은 사적인 영역 정도는 있지 않나?”

“……그건.”

루돌프가 소년 같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찰나에 루페르트는 루돌프가 젊어 보이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노인이 아닌 힘 있는 턱과 강렬한 선을 가진 쾌활하면서도 올곧은 눈빛을 가진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 환각은 곧 연기처럼 사라지고, 지혜만 남은 노인의 얼굴이 제자리를 찾았다.

“여신님이 늘 모든 걸 지켜보는 건 아니야. 대부분은 늘 그대 곁을 떠나 있지. 그대도 느끼지 않았나? 여신님이 가끔 지나치게 오래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

그렇다.

리프니에는 말을 할 때보다 말을 하지 않는 때가 더 길다.

분명 루페르트는 그것이 여신이 자신에게 실망했거나 혹은 굳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러는 것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저 노인은 루페르트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분명 들어서는, 듣기 싫은 내용이지만 호기심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멈춰야 하는데. 이 이상의 불경을 여신님께 저지르고 싶지 않아.’

갈등 속에서 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어쩌면 여신은 아주 짧은 순간 그 소라고둥에 머무를지도 모르지. 그대가 강한 충격을 받거나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오 무렵에 여신님은 결코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거지.”

이어지는 말속에서 루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루돌프의 그늘 진 시선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 표정을 보니 이쯤 해 두는 게 좋겠군.”

루돌프는 웃음기를 머문 채 돌아섰다.

“……그 믿음. 소중하게 간직하길.”

뒤돌아서자마자 루돌프의 웃음기가 섬뜩할 정도로 빠르게 지워졌다.

* * *

등의 상처가 아물며 고통이 참기 어려운 가려움으로 변할 무렵, 아카이아 대주교가 사람을 하나 보내왔다.

그는 힐데브란트 주교라는 사람으로 싸움질이나 할 법한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소유자였는데, 생긴 대로 행동도 막무가내였다.

“무례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선제후님의 상처를 봐도 될까요? 꼭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례한 요청이지만 루페르트는 오히려 이를 반겼다.

‘바라던 바다!’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채찍질을 당했는데 이걸 묵히는 건 일생의 손해.

루페르트는 흔쾌히 상의를 벗어 등의 상처를 힐데브란트에게 보여 줬다.

“이건……!!”

힐데브란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였다.

“한 치의 사정도 두지 않은 태형장의 행진이군요!”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하인의 보조를 받아 상의를 다시 걸쳤다.

힐데브란트는 우락부락한 얼굴에 나름 경의를 담아 예를 표한 후 걸걸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곤조곤한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위대한 황제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타락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신앙과 미덕을 숭상하는 풍조는 사라지고 돈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최고라는 망발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귀족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망조 속에서 신앙의 빛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틀에 박힌 소리지만 얼마 전에 호되게 두들겨 맞기도 했겠다, 루페르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신앙의 빛이 희미해지는 시대이긴 하지. 불신자도 이단도 많아지고. 나중 되면 악마 숭배를 하는 놈들마저 나타나는 판국이니. 당장 나만 해도 호라를 안 믿잖아?’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힐데브란트의 말은 이어졌다.

“예전처럼 이단자가 활개를 치진 않지만, 여전히 제국의 절반에는 신교라는 해충이 뿌리 깊게 파고들어 있죠. 당장 선제후의 절반이 신교를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힐데브란트의 눈동자가 루페르트를 은근히 탐색했다.

아마도 표정 변화를 보려는 모양이다.

신교에 대한 루페르트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루페르트는 아카이아 대주교의 고리타분한 늙은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사람을 못 믿는군, 늙은이. 그렇다고 하나 이런 단순한 인간을 보내다니. 아니, 어쩌면 이조차 그 늙은이의 안배일지도.’

루페르트의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힐데브란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미천한 사견이니 비밀로 해 주시길!”

“심려하지 마세요. 주교님. 제 입은 꽤 무거운 편입니다.”

“역시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슈발츠마인의 선제후다운 배포이십니다!”

루페르트는 입에 발린 칭찬에 미소로 응답했다.

“아무튼, 요즘 세상에 선제후님처럼 신앙심이 깊은 분은 찾아볼 수 없지요. 아카이아 대주교께서는 그 많은 후보 중 선출할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고 계시지만 제가 오늘 두 눈으로 선제후님의 신앙심을 확인했습니다.”

힐데브란트가 등잔처럼 큰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귀띔했다.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힐데브란트는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넙죽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기둥 구석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루돌프다.

그는 닫힌 문 쪽에서 쿵쿵 들려오는 힐데브란트의 발소리를 들으며, 집무실 구석에 마련된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뉘었다.

“이걸로 한 표는 확보했군.”

“확보…… 한 걸까요?”

“저 주교가 말하지 않았나. 아카이아 대주교. 클라인하르트 본인이 뽑을 인물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있다고. 저 주교가 말했다시피, 여전히 선제후의 절반은 신교를 믿고 있어. 그대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구교를 믿는 사람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자에게 표를 행사할 거야. 신심이 사라진 시대에 자네의 행동은 설령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할지라도 아카이아 대주교에겐 충분히 표를 행사할 만한 동기를 준다고 할 수 있지. 애당초 성직 선제후는 그 특성상 기권이라는 행위를 할 수 없거든. 선거에서 기권이라는 행위는 신자의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알다시피 호라교는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나?”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루돌프의 식견에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루페르트에겐 2개의 표가 있다.

아직 두 표가 부족하다.

“나머지 표는 누구에게서 확보해야 할까요? 일전에 루돌프 님은 세속 선제후 중 대부분은 표를 던지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현재 투표권을 가진 세속 선제후는 루페르트를 제외하면 다섯 명.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

디터팔츠의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

노르드마르크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고어문트의 선제후 골트문트다.

과연 이 중에 누가 루페르트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후보를 내지 않은 선제후들은 죄다 표를 던지지 않을 거라고 루돌프가 확언했으니.

느닷없이 나타난 침묵 속에서 루돌프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지도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본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 고어문트 ]

루돌프의 손가락은 운명의 표를 행사할 사람이 골트문트라고 적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믿을 수 없다.

저 골트문트는 자신을 감시한 걸 모자라 몇 번이고 이쪽을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그는 지난 시간 축에서 루페르트를 제쳤던 카를 호이징거를 내세운 자이며 제국의 해체를 소원하는 자다.

루페르트를 뽑을 확률은 영에 수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오직 그만이 그대에게 표를 줄 수가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루페르트의 물음에 루돌프는 특유의 소년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에겐 딸이 있지 않나?”

“…….”

루페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핏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 울피아나는 루페르트에게 있어서 그 어떤 악마보다 가혹한 운명의 심판 그 자체였으니.

“문제라도 있나?”

“그, 그게.”

“그대가 그녀와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건 알고 있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성정이 강한 여자더군. 하지만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그대지. 현재의 그대가 아니잖나?”

“그렇다 하더라도…….”

루페르트는 주저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겠지만, 그녀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루돌프가 그런 루페르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겨우 여자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자가 제국을 구할 수 있겠나?”

“…….”

루페르트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수 없다.

반박을 하려고 생각을 짜낼수록, 루돌프의 의견이 정론이라는 것밖엔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하필 울피아나라니.’

루돌프는 고뇌하는 루페르트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의미심장을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여리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 여리다고 해서 반드시 암군이 되는 건 아니니. 하지만 말이야. 그대의 소원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더 강해졌으면 하는군. 제국을 위해서가 아닌, 그대 자신을 위해서라도.”

“…….”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모자람을 책망함과 동시에 루돌프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떠올렸다.

‘부끄럽다. 정말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 이분은 오직 호의를 가지고 날 대하는데 의심하기나 하고. 여신님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거지. 솔직히 우리 여신님께서는 지나치게 사치를 좋아하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구석도 있으니까.’

툭.

루돌프가 루페르트의 어깨를 쳤다.

마치 친우를 대하는 허물없는 모습.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루페르트를 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걱정 말게. 선제후.”

“네?”

루페르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자 루돌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허공을 그늘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골트문트는 딸을 주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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