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4. 선거 (1)
“그것은 선제후조차 모르는 욕망이지.”
루돌프가 덧붙였다.
“감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거든. 그 욕망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조차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는 덩어리에 머물고 있어. 그러나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지.”
루돌프의 눈은 제국 전도 중앙에서 살짝 비켜난 지방을 응시했다.
“희미하게나마 그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는 건 골트문트일 게다.”
“골트문트.”
과거의 장인이자, 현재 최대의 위협.
“녀석이 선제후들의 여론을 주도한다. 선제후 중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권을 위해 뭉칠 때 골트문트는 훌륭한 구심점이지.”
그러나 루돌프의 눈에 비친 골트문트의 크기는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게 알고 있지 않나?”
* * *
황제 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고어문트 선제후를 방문했다.
최강의 선제후라는 슈발츠마인 가문답게 성대하고 화려한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어문트에게 부를 안겨다 주는 도로를 따라 고어문트의 수도인 브라이아에 도착했다.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는 성문 밖까지 몸소 나와 신생 슈발츠마인 선제후를 영접했다.
이어진 자리.
루페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오는 선거에서 저를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골트문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그것이 선제후께서 저를 찾아온 목적입니까?”
나긋나긋하면서도 가시 돋친 한마디.
골트문트는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분노의 형태는 그의 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으니.
‘역시 부전자전인가.’
이번 생에서 울피아나를 황후로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독신으로 죽더라도 그 여자와 함께하고 싶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과거의 장인을 보며 담담히 흉중에 담았던 비장의 한마디를 꺼냈다.
“고어문트의 독립을 보장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표정 관리에 능한 골트문트답게 그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차분한 눈동자 깊숙한 곳에 이는 풍랑은 진짜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제후령의 독립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반역적인 언사인지 알고 계시는지?”
“아, 제 배움이 짧아 의도보다 강하게 표현된 것 같군요. 제 의견은 고어문트를 위시한 선제후의 자치권을 대폭 보장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지는 늘 루페르트의 약점이었지만 이제 루페르트는 그것을 무기로 활용한다.
‘루페르트 가우저. 상상 이상으로 큰 남자다.’
더 이상 루페르트 가우저는 시골 출신 무지렁뱅이가 아니다.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인 위협적인 경쟁자다.
그렇게 생각하며 골트문트가 넌지시 물었다.
“선제후께서 생각하시는 자치권의 확장에 관해 구체적인 사항을 듣고 싶군요.”
“선제후의 권한을 늘릴 생각은 없습니다.”
골트문트의 얼굴에 노골적인 반감이 떠오른 그 순간,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보충했다.
“대신 황제의 권한을 대폭 축소할 생각입니다.”
루페르트는 상대방을 보았다.
그토록 거대하고 치밀하며 속을 알 수 없었던 선제후가 지금 정수리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거인의 손바닥 위에 오른 채 춤을 추는 것처럼.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골트문트의 지지를 이끌어 내진 못했다.
다른 선제후처럼 그 또한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답변을 회피했으니.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음을 위한 포석이다.
“골트문트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루돌프가 창밖을 바라보는 루페르트를 응시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은 아쉽군요. 그분이 뭘 원하는 조건을 가지고 갔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골트문트의 지지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그다음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시작하고 있겠지?”
루돌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골트문트가 내세운 후보 카를 호이징거의 비위가 알려진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자세한 사항은 어떤 세력의 개입에 의해 흐릿하게 가려졌으나, 카를 호이징거가 마약에 취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여급 하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까진 가리지 못했다.
“이를테면 마음의 빗장을 푼 격이지.”
루돌프는 즐거워 보였다.
“그대를 만나 그대의 생각을 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고, 자신이 내세운 허수아비를 최후까지 끌고 안았겠지.”
여행자 길드를 위시한 가문의 밀정이 치열하게 움직이며 소식을 전했다.
골트문트는 카를 호이징거에 대해 대단히 실망했으며, 그답지 않게 고성까지 내지르며 카를 호이징거를 책망했다고 한다.
“이제 작은 균열이 생겼군.”
루페르트는 묻지 않았다.
카를 호이징거의 행위 이면에 자리 잡은 내막을.
다만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손을 쓰셨군. 카를 호이징거에게.’
극도로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극도로 비정한 방법.
그것은 철혈의 길이다.
“자, 그럼 이제 다른 얼간이들을 설득해 볼까?”
철혈의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루돌프의 조언은 루페르트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그 보폭이 넓었다.
“……그런 약속을 하라는 말입니까?”
가장 따라가기 어려운 건 루페르트가 봐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허무맹랑한 약속이었다.
‘이건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루돌프는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생각을 읽히는 기분.
루페르트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루돌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면 많은 것들이 변하기 마련이니.”
그렇게 많은 약속이 오갔다.
슈발츠마인 가문의 가로들이 단체로 찾아올 정도로 엄청난 약속들이.
“아니, 갓 우리 가문에 편입된 자가 가문을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건가?”
“아무리 황제직이 중요하다고 하나 우리의 등골을 빼 주면 다음은 어쩌라는 건지?”
가문의 불만이 팽배했으나, 루페르트는 무시했다.
이 또한 루돌프의 생각이다.
“오히려 훌륭한 흐름이군. 우리 가문 안에도 얼간이들의 세작이 있을 터이니. 가문이 부작위로 우리를 돕는 거지.”
선제후들이 루페르트를 부르거나, 또는 스스로 찾아왔다.
그중엔 루페르트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뜸 루페르트의 집무실로 쳐들어온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성을 냈다.
“서신은 보았다만, 지킬 수는 있는 약속인가? 내 듣자 하니 다른 선제후에게도 약속을 남발했다고 하던데.”
이에 루페르트는 게오르크 아르님에게 은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게오르크 아르님의 눈동자가 루페르트의 입가에 고정됐다.
여기 오기 전, 루돌프가 한 말이 있다.
“높은 사람일수록 할 수 있는 거짓의 종류는 늘어나는 법이지. 물론 높은 사람이 거짓을 남발하면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지겠지. 고로 현명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내가 생각할 때 최고의 거짓말은…….”
루돌프가 미소를 머금었다.
은은하면서도 신비롭고 위험과 권위가 느껴지는 힘을 머금은 미소.
‘이것이 황제의 미소인가.’
그 미소는 단지 미소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미소를 머금은 채 루돌프가 덧붙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지.”
그 미소는 늪이자 펄이며 욕망을 삼키는 소용돌이다.
같은 미소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재현됐다.
게오르크 아르님은 굳은 얼굴로 저 젊은 선제후의 미소를 노려보았다.
‘이 친구.’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실로 만만치 않다.
별 볼 일 없는 무지렁뱅이가 아니다.
‘왜일까. 이 친구에게서 클라우데 2세의 냄새가 느껴지는 건.’
이 친구는 위험하다.
그것도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조건은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달콤했다.
‘설마 이 친구가 감히 날 상대로 약속을 어기겠어?’
게오르크 아르님은 물러났다.
자신이 오류에 빠진지도 모른 채.
“저 친구는 자네에게 투표하지 않겠지.”
루돌프가 안락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저에게 표를 안 준다는 말씀입니까?”
“줄 인간이 아니야. 남 잘되는 걸 죽어도 못 보는 인간이지. 하지만 적어도 타인을 뽑지도 않겠지.”
그만이 아니다.
루돌프는 레벤호스트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같은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나마 표를 줄 만한 건 아카이아 대주교인가?”
유일한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굳이 그를 찾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 그보다 몇 배는 수고로운 행사를 치러야 했다.
5월이라고 하나 타는 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
한 사내가 맨발로 뜨거운 대지 위에 서서 앞을 노려본다.
그 앞엔 채찍을 가지고 양옆으로 도열한 사내들이 두건을 쓴 채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사내는 맨발로 뜨거운 대지를 걸으며 행렬의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채찍들이 사내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피가 튀고 발걸음이 휘청거리지만, 사내는 굳은 얼굴로 행렬의 끝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이른바 태형장의 행진.
호라신에게 제국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룸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행사다.
“……크윽.”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루페르트는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 상처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 정말이지, 야만적인 행사네요. ]
오랜만에 여신님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야만적인 행사네요.”
[ 제국인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원 제국, 룸인들의 잔혹성과 포악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그 강성하던 룸 제국이 천 년도 버티지 못해 멸망하고, 그 룸 제국의 후예라고 칭하는 나라조차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는 룸인들이 저지른 죄악의 업보라고.
[ 그나저나 루페르트 가우저. 잘 배우고 있나요? ]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 쪽을 쳐다봤다.
안락의자에 앉은 노인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의 오수를 즐기는 모양.
“정말이지, 너무나 배울 게 많아서 걱정입니다.”
루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채찍에 맞은 상처에 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크윽! 가, 가끔 이상한 일만 시키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 당신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아마 다음에 우리가 만날 땐 당신은 황제가 되어 있겠죠? ]
“그랬으면 좋겠군요.”
[ 여전히 확신이 없네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
“……죄송합니다.”
[ 당신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지만 저는 당신이 평범하기에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당신은 이미 많은 일들을 해냈잖아요? ]
“그렇습니다.”
[ 용기를 가지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어쩌면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요. 게다가 저 말고도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네요. ]
과연 그 말대로였다.
시녀가 문을 두드리더니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루페르트는 엎드린 채 편지의 발신인을 읽었다.
[ 피리스 ]
‘피리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
루페르트는 고양이처럼 눈이 큰 붉은 머리 아가씨를 떠올리며 편지를 개봉했다.
남작님, 잘 지내고 계시죠?
저 정규 과정에 들어갔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거의 역대급으로 빠른 승급이라고 하네요.
지도 교수님도 생겼어요. 놀랍게도 헬브라이트 베틀렌 교수님이세요! 남작님이 저에게 사 줬던 그 책을 쓰신 분 말이죠! 매일매일이 꿈속에 사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중심엔 남작님이 있답니다!
좀 더 노력하고 남작님에게 도움이 되도록 정진할게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마법적인 날을 기다리며, 테타우에서 피리스가.
편지를 읽는 내내 루페르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피리스. 너도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그러나 피리스. 그런데 난 이제 남작이 아니라 선제후님이란다…….’
루돌프가 눈을 떴다.
“오. 선제후.”
루돌프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 아는 사람에게 편지가 와서요.”
“여잔가? 그것도 나름 마음을 줄 정도로 매력 있는 여성일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뭐, 남자라는 건 단순한 생물이니. 나도 그런 적이 있기도 했고.”
“당신께서 말입니까?”
“나도 사람이니. 괴물처럼 보지는 말게. 그보다 진짜 괴물한테 연락이 온 거 같던데.”
루돌프가 소라고둥을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괴, 괴물이라니요.”
“괴물 맞잖아? 그런 걸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뭘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갑작스러운 루돌프의 언사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을 느꼈다.
‘아니, 농담치고는 과한 거 같은데. 그보다.’
“저기, 리프니에 님이 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못 들어.”
“?!”
루돌프가 빙그레 웃었다.
“알려 줄까? 우리의 여신이 언제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
“?!”
‘이건, 농담이 아니다.’
“리프니에의 패턴이 알고 싶나?”
‘진심이다. 이건.’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어쩌면 저 노인, 루돌프는 리프니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