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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49화 (49/225)

49화 13. 회랑의 노인 (3)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엔 기하학적인 미를 간직한 잘 정돈된 정원의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양옆에 두 개의 잘록한 기둥을 거느린 발코니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건 최근 몇 달간 오직 루페르트의 특권이었다.

한 사람이 추가됐다.

10분이 지났건만 루페르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자신 옆에서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는 노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 사람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나.’

내심 결정지었다.

이 노인은 그 어두운 회랑에 묶인 수인(囚人)이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노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간과 차원의 벽을 넘어 루페르트가 시간의 책갈피로 저장한 세계에 나타났다.

묘한 침묵이 흐르던 선제후의 집무실에 이윽고 진한 한숨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실례했네. 모처럼 밖에 나오다 보니 살아 있는 햇빛과 풀 내음을 머금은 바람, 흐르는 구름과 무엇보다 저 동화 같은 하늘색이 내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순간 루페르트는 노인이 갑자기 젊어진 것 같은 착시를 느꼈다.

“결과와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게.”

그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거닐었다.

루페르트는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묘한 전율을 느끼며, 그에게 있었던 일을 정리해 노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선거를 준비했고, 어떻게 선거 전략을 짰고, 선제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과 정성, 그리고 처참한 결과에 관하여.

“…….”

노인은 이야기가 지속되는 내내 집무실 안을 거닐다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엔 한 동상 앞에 머물러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피지 않은 풋풋함을 갖춘 소녀의 조각상.

리프니에의 주문품이다.

노인은 꽤 오랫동안 짙은 음영이 드리운 눈동자로 조각상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이 노인은 아마도 선제, 철혈대제. 역시 아내의 어린 시절의 조각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던 걸까.’

둘은 천상의 짝으로 알려졌다.

금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황제와 황후의 이름이 나란히 거론된 건 선제 시절을 제외하면 전무했으니까.

오랜 침묵 끝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건 카를 빔펜의 작품인가?”

“맞습니다.”

루페르트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며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작자를 알리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런 걸 만들 수 있고 만드는 건 오직 카를 빔펜뿐이지.”

‘유명했구나. 그 사람.’

노인은 청초한 모습으로 살짝 뒤돌아선 조각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안젤리나도 그대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그녀의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죽어 가던 대황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지금쯤,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

지난 선거에서 투표를 행사한 표는 총 7개.

한 표는 기권했다.

그 기권표의 주인이 대황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한번 만나러 가세.”

“네?!”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마 대황후께서는 저를 만나 주지 않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말게. 젊은 황제. 다 방법이 있으니. 거기다가 안젤리나 표는 딱히 없어도 관계가 없어.”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집무실 중앙에 놓인 회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루페르트 또한 노인 반대편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루페르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저 노인, 아니 그 불세출의 황제인 철혈대제가 집무를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이건 상상으로도 생각해 보지 못한 기연이다.

두 개로 분열될 뻔한 제국을 하나로 합치고, 저지대의 반란을 위시한 최근 기세가 차오르던 외국 동맹군을 분쇄하여 누란지위에 처했던 제국의 지위를 다시 대륙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저 위대한 황제의 통치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니.

“잉겔하트 공작이라고 했나? 자네의 조언가로 활약했다는 자가?”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잉겔하트-게슈나우 공작이겠지. 안 그래도 좁은 영지가 아들 넷에게 상속돼서 네 개로 다시 쪼개졌거든. 아무튼 그 인간은 썩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성실하니, 큰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작은 잡무나 시키면 되겠지.”

루페르트는 감탄을 담아 노인을 응시했다.

‘이분. 분명 그 회랑에 적어도 10년은 넘게 갇혀 있을 터인데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평범한 사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개에겐 개의 일이 있고 고양이에겐 고양이의 일이 있지. 말도 소도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사육되지 않나? 인간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어. 단지 옷을 입었고 출신과 배경이라는 깃털을 달고 있기에 쓰임새를 알기가 어려울 뿐이지.”

노인은 책상 중앙을 자리 잡은 제국 전도를 응시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령을 위시한 일곱 선제후령, 선제후령만큼이나 제국의 상당 부분을 차치하는 교회령과 세속 군주령, 그 사이사이 요지에 알처럼 박힌 제국 도시들.

이 수많은 독립된 국가와 사회가 느슨하게 연합한 것이 소위 말하는 제국이다.

노예제 티그리트가 세운, 천 년을 향해 달려가는 제국이다.

앞으로 6년만 지나면 제국은 천 년을 넘어선 유일무이한 제국으로 거듭난다.

툭.

노인이 지도 구석 은으로 만든 상자에 담긴 장기말을 하나 꺼내 지도 위에 놓았다.

지도 위에 놓인 장기말은 일곱 개, 모두 선제후령 위에 우뚝 섰다.

“그렇다면 선제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게 핵심이란 건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투표권을 쥔, 저 강력한 선제후가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지난 회차에서 루페르트가 프리드리히와 함께 골머리를 싸매가며 알아내려 하던 것이었다.

결국 찾아낸 해답은 개인적인 이익이었다.

그러나 그 답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잘 모르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정직하게 답했다.

노인의 시선은 지도를 향했다.

“선제후의 일은 영지의 보존과 발전이야. 그들은 신에게 상업의 발전과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지. 하지만 모든 선제후가 같은 소원을 비는 건 아니야.”

노인의 주름진, 그러나 여전히 억셈이 남은 손이 그 장기 말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장기말 아래에 쓰인 문구.

[ 고어문트 ]

“고어문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나치게 부유해졌지. 크로지우스가 일으킨 난 때문에 교역의 중심이던 제국 도시 몇 개가 불에 타고 거기다 새로운 도로와 교역망이 자기 영지에 생기면서 그전까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부를 손에 쥐게 되었어.”

노인은 그 장기말을 만지작거리며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돈은 인간을 변하게 하지. 돈 자체엔 가능성이라는 속성이 있거든. 고어문트 선제후는 신에게 새로운 것을 기도하기 시작했지. 바로 왕조적 야심이란 선제후에게 금지된 것들을.”

“왕조적 야심…….”

“사람들은 크로지우스가 제국을 끝장낼 뻔했다고 떠들어 대고 있지만, 진정한 재앙은 고어문트였지. 천년 간 유지되던 일곱 선제후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으니.”

노인이 장기말을 지도 위에 눕혀서 내려놓았다.

루페르트는 고어문트라는 문구 위에 누운 장기말을 보며 조용히 타오르는 전율이 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

단 한 번도 들은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주제다.

저 크로지우스보다 더 위험한 재앙이 존재했다니.

“선대의 이야기지. 현재의 고어문트 선제후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 골트문트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저 울피아나의 부친이자 은발의 미남자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절 탐탁지 않게 여기더군요.”

“그래?”

“몇 번이고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이에 노인은 웃었다.

“당연한 결과지. 자기 부친이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아마 모든 선제후를 통틀어 가장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제위에 오르는 걸 반기지 않을 인물일걸?”

“그가 세운 후보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축에서 황제가 됐던 자는 카를 호이징거.

선거가 있기 불과 두 달 전 골트문트가 급히 후보에 올린 무명의 젊은이다.

“그래? 그럼 그 젊은이나 한번 보러 갈까?”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긴 눈썹과 음영에 가려져 있지만, 그의 얼굴엔 소년의 호기심 같은 반짝임이 있었다.

의외였다.

어둠과 하나 된 것 같은 사물과 별반 다를 바 없던 저 노인에게 이런 일면이 있다는 건.

똑똑.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루페르트가 묻자 문 너머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잉겔하트 공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루페르트는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이 다시금 장난기를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뜻을 읽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너머를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에게 전해 드려라. 안타까운 일이지만, 생각이 다른 거 같다고.”

잉겔하트는 해고다.

그의 방법은 엉터리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어둠 속의 노인이 곁에 있다.

철혈대제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있는데, 어찌 잉겔하트 같은 하찮은 자를 곁에 두겠는가.

“그나저나 이 문을 나서야 한다는 소리군.”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루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대단히 실례되는 일입니다만 그쪽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노인은 집무실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 시절의 안젤리나의 동상이 말없이 서 있었다.

“루돌프.”

노인이 말했다.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불러주게.”

* * *

제국의 선제후는 제국의 국경 밖에서 왕을 칭하는 군주와 동격이다.

따라서 그의 행차는 철저히 공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다.

그러나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선제후와는 거리가 먼 은둔자의 방식을 택했다.

루돌프는 놀라울 정도로 저택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고, 암행에 필요한 준비와 방식을 꿰고 있었다.

“놀랍군요. 새 선제후께서 이곳을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선제후 저택의 뒤편에 자리 잡은 하역장엔 린넨부르크라는 험상궂은 사내가 있었다.

피부색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그에게선 사막의 색채와 사나움이 느껴졌다.

루페르트는 그가 상의에 달고 있는 브로치를 보았다.

여섯 개의 별.

그것은 한 민족을 상징한다.

‘하브루타 사람인가?’

하브루타인은 사막의 주민으로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이다.

타민족에 섞이는 대신 자신의 종교와 정체성을 유지하려 들기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당하지만, 특유의 근면성과 부유함 덕에 사회 곳곳에서 암약한다.

저 사내, 린넨부르크가 속한 여행자 길드도 그중 하나다.

다만 그 여행자의 길드의 사업이란 게 범법과 준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지라 평판은 썩 좋지 못했다.

‘묘하군. 저잣거리도 아니고 슈발츠마인 선제후 저택에 저런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루페르트를 보며 린넨부르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거의 10년만일 겁니다. 선제후 본인께서 직접 이곳을 찾는 건. 제 선임자의 선임자 일이라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루돌프는 린넨부르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했다.

린넨부르크는 루돌프를 유심히 봤지만, 그의 얼굴까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만 루돌프의 수완과 지식에 탄복하는 눈치.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며 조심스레 묻기까지 했다.

“실례지만 그쪽은 우리 여행자 길드와 거래를 튼 적이 있으신가요? 저보다 실무를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서 묻는 말입니다.”

이에 루돌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소싯적에 여행자 길드에 몸담은 적도 있었지.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최근 사업은 어떠한가? 잘되고 있는가?”

“그게 최근은 어렵습니다. 새로운 도로가 닦이고 치안이 좋아지면서 도적도 줄고,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도니 경쟁자도 많아지고. 심지어 고어문트에선 우리 길드를 드러내 놓고 배격하는 눈치지요.”

“세상이란 바다는 늘 변하기 마련이니, 시대에 던져진 자는 언제나 그 흐름을 눈여겨봐야지.”

필요한 걸 모두 얻은 후,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조용히 고어문트 선제후령을 향한 짧은 여행에 나섰다.

카를 호이징거는 이곳 슈발츠마인에 있었다.

루페르트처럼 드렌부르그라는 작은 영지의 남작을 맡아 체류하고 있다고.

하루는커녕 2시간도 걸리지 않는 여정이다.

신록이 돋아나는 봄의 풍경을 보며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루페르트는 루돌프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여행자 길드에 계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 소리다.

나라에서 인정했다고 하나 린넨베르크의 행색을 보면 알겠지만 반쯤은 깡패 집단이다.

골트문트가 괜히 배격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이민족 집단에 몸을 담은 적은 없네.”

루돌프가 웃으며 답했다.

“거짓말을 한 거지.”

“그렇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건 아닙니다.”

“호라도 말했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말이야. 거짓이라는 게 반드시 나쁜 것일까?”

“글쎄요. 반드시는 아니겠죠.”

“거짓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지. 수가 뻔히 보이는 천박한 거짓, 말하는 자신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로 기만적인 거짓이 있는 반면 타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선의의 거짓도 있어.”

루돌프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두건의 음영이 가린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중앙에 루페르트의 앳됨이 남은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황제는 늘 거짓을 가까이해야 하지. 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신과 달리 유한한 권능을 가졌기에 만인의 청을 전부 들어줄 순 없거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좋은 황제는 좋은 거짓말쟁이라고.”

“모든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어.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러나 아무 약속이나 허투루 어긴다면 평판에 금이 가게 되겠지. 고로 우리는 잘 고르고 선택해야 하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멀리 푸른 하늘 아래 아담한 푸른 지붕의 저택이 보인다.

기묘하게도 그 장원은 위버하임과 거짓말처럼 닮아 있었다.

“카를 호이징거 남작님 말씀입니까? 남작님은 지금 저택에 계시지 않으세요. 실례지만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저택의 고용인이 의심쩍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루돌프가 무뚝뚝한 어조로 답했다.

“한스라는 사람이오.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전해 주시게.”

저택을 떠나면서 루페르트가 물었다.

“그냥 가명을 밝히는 것보다 돈이라도 쥐여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돈을 주면 반드시 우리를 남작에게 말하겠지. 먹을 걸 주면 다시 찾아오는 짐승처럼 말이야. 그건 불필요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그보다 남작은 어디에 있을까? 짐작 가는 곳은 없나?”

당연히 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로 향했다.

카를 호이징거.

장래의 황제는 주점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또 내가 이겼네! 하지만 이 돈은 모두의 것. 나 혼자 가지진 않겠어! 어이! 모두에게 한 잔 돌려! 카를 호이징거, 아니 카를 3세가 사는 거야!”

저 대책 없는 탕아.

추하고 천박한 여자와 깡패, 비열한 아첨꾼에 둘러싸인 자가 장래의 황제다.

“…….”

루페르트는 착잡한 눈으로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판박이다.

과거의 자신과.

아니 적어도 자신은 저렇게까지 추잡하게 놀진 않았다.

그런데 저 자격 없는 인간이 황제란다.

‘역시, 선제후가 원하는 황제는 꼭두각시라는 소리인가? 그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 그럼 다시 묻지. 선제후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두 번째 질문이다.

루페르트는 여전히 루돌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안의 감정을 읽어 내지 못했지만, 그가 나름 정리한 역사와 사고를 담아 담담한 목소리에 풀어냈다.

“그들은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닐까요?”

정확히는 황제로부터의 자유.

철혈대제 같은 폭군 아래서 눈치를 보고 노예처럼 기어야 했던 시절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선제후들의 목적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의 자신이나 카를 호이징거 같은 자를 황제로 세울 일은 없었을 터이니.

“반은 맞는 소리군. 하지만 진실에 근접하진 못했어.”

루돌프가 미소 지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답을 갈구하며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을 본 겁니까. 당신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은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담고 있었다.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알지 못하는, 당신이 아는 진실을……!’

잠시 후, 루돌프가 얕은 탄식과 함께 짧은 침묵을 깼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제국의 해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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