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13. 회랑의 노인 (2)
제국 의회가 소집됐다.
선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지 6년이 지난 해였다.
안건은 황제의 선출.
소집자는 선제의 배우자 안젤리나였다.
노예제 티그리트가 남긴 규율에 따라 제국 의회의 개최는 소집 발령 후 100일 뒤, 제도 테타우의 황궁에서 개최된다.
물론 선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 기간 동안 각 후보자는 자신의 능력과 부, 인맥을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표를 확보해야 한다.
또 다른 형태의 경쟁이 그 막을 올린 것이다.
현재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된 건 다섯.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후보 로이겐 뇌르겐틀링. 21세.
루페르트와 작은 악연이 있기도 한 그 거만한 사내는 디터팔츠 선제후의 아들이다.
두 번째 후보는 마티아스. 45세.
그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의 사촌임과 동시에 철혈대제 앞의 황제인 천둥제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세 번째 후보는 카를 호이징거. 19세.
그는 가장 최근에 입후보된 사람으로 마티아스처럼 천둥제의 후손, 정확히는 직계라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바 없으나,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가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다.
네 번째 후보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본인이 입후보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중도에 기권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후보는 루페르트 가우저다.
그는 선제의 혈족이자 슈발츠마인 선제후다.
한때 모든 후보 중 가장 보잘것없는 자였으나 메헨부르그의 야수, 리히트보덴의 식민지 탈환 같은 하나도 이루기 어려운 굵직한 업적을 연달아 쌓았고, 거기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슈발츠마인 선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소문에 따르면 그 루페르트 가우저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에 그 힘은 홀로 사륜마차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이며 목소리는 유리를 깨뜨리고 커다란 술통 하나를 단숨에 비울 수 있을 정도의 대식가라고 한다.
“라고 하는데요?”
이곳은 선제후의 궁전.
루페르트의 집무실이다.
혼자 쓰기엔 황송할 정도로 넓은 집무실 중앙엔 작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말하는 소라고둥이 똑바로 선 채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뜬소문이죠. 소문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절반은 사실 아닌가요?”
“괴력 말입니까.”
“네. 덕분에 그 괴물을 쓰러뜨렸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루페르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씌워졌다.
판텔레온을 처치한 것까진 좋다.
그러나 당시 목격했던 광경은 루페르트의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뭐랄까, 마음이란 것이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고리라고 가정하면 그 일부분이 찌그러졌다고나 할까.
마음을 다독이며 그 찌그러진 부분을 바로 폈지만, 이미 상한 부분은 완벽하게 복구되진 않는 느낌이다.
자꾸 그날의 참상이 떠오른다.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봐서는 안 될 걸 본 느낌이다. 그건 사람이 해서는, 사람이 상상조차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 인간이었던 것과 오크는 안투안 쿠르스트가 이끄는 토벌대가 당도했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남긴 참상과 악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페르트의 마음 한구석에 끔찍한 형태로 유리 파편처럼 박혀 있다.
‘제국 성인. 대체 그들은 누구지? 대체 어떻게 천 년 전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고, 대체 그 괴이한 힘은 뭐란 말인가.’
판텔레온은 인간조차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또 그 생각을 하시나요?”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표정을 읽고 부드럽게 묻는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그날의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럴 거 같았어요. 당신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끔찍한 것들이었죠. 해서 그 계집아이가 죽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했었는데. 그 계집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글쎄요. 소식이 끊긴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뭐,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 괴물도 처치했고요.”
루페르트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가만히 응시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루페르트의 흐릿한 눈동자 위에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여신님.”
“네.”
“그 괴물들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조금은요?”
“정말입니까?!”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신이 대답해 줄 거라 기대도 안 했다.
“네. 제가 알기로 이 세상엔 섭리를 거스른 존재들이 더러 있어요. 당신이 빙해에서 상대했던 그 흉물들.”
“스크라엘링 말씀이군요.”
“그것 외에도 저 멀리 까마득한 남쪽의 사막 쪽엔 영원히 사는 저주에 걸린 사람들이 있지요.”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게 저주인가요?”
“네. 저주가 맞는 거 같아요. 그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말이죠.”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 제국 이외에도 다른 곳의 사정도 알고 있었군. 까마득한 남쪽 사막이라니.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곳의 사정까지 알고 계실 줄이야…….’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그것들 또한 세상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예요. 이 세상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죠.”
“이 세상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
루페르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강렬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놈들이 말했다. 놈들은 제국을 멸하겠다고.’
실로 그러하다.
놈들은 얀란트의 크로지우스가 예언했던 제국을 파멸하려는, 제국의 적이다.
“저는 그것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그 괴물들은 매우 교활하지요. 당신 황제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확실히 제국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그들의 이름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랍니다. 저의 힘과 당신의 용기, 그리고 제가 강조한 황제의 덕목을 이용한다면 당신은 그 괴물을 상대로 능히 싸워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여신님…….”
루페르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짧게나마 리프니에를 의심했었다.
그녀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당장 집무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안젤리나를 꼭 닮은 조각상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루페르트가 결국 최후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리프니에뿐이다.
‘호라교 경전에 의하면 호라신도 믿는 자를 몇 번이고 시험에 들게 했다고 했다. 일가족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호라에 비하면 리프니에 님이 날 시험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감사함과 죄스러움을 담아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제까지나 여신님의 신도로 남을 것입니다.”
“그거 고맙네요. 인간의 약속이란 건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요.”
“저는 다를 겁니다.”
“누구나 같은 소리를 하죠. 그런데 루페르트 가우저. 그 괴물에겐 일행이 있는 거 같던데요.”
“그렇습니다.”
아직 일곱이 남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리라.
무엇보다 두려운 건 그것들이 보여 줄 끔찍한 무언가다.
이미 상상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그보다 더한 것이 본다면.
“…….”
마음이 버틸 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나요?”
리프니에가 은근히 묻는다.
잠시 흔들렸던 루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리프니에는 마음을 다잡는 루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소라고둥 전체를 흔들었다.
“그래야죠. 당신은 제국의 황제. 반드시 제국을 지켜 내야 해요. 저는 비록 이름도 없고, 신전도 없고, 신도도 없는 비루한 신이지만 당신을 돕겠어요.”
“여신님……!”
“저밖에 없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조만간 당신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하나가 있을 거 같은데, 물론 들어주겠지요?”
“퀘스트입니까?”
“맞아요. 여신의 퀘스트죠. 물론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할 보상이 주어질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선제후의 집무실 중앙에 자리 잡은 크고 화려한 서재를 응시했다.
서재 위에 황궁에서 보낸 금인 칙서가 놓여 있다.
곧 선거가 있을 것이다.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루페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 * *
“후보가 역대급으로 많기에 표가 분산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되자, 자연스레 가문에 소속된 인재들이 루페르트에게 따라붙었다.
제국 동남부 잉겔하트 공작령의 군주 프리드리히 헤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소국의 군주이지만 영지의 통치는 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보다 권세 높은 상위 군주의 책사로 활동하는 데 특이한 인물이었다.
작은 키지만 움직임은 힘이 있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엔 열정이 느껴졌다.
성실하고 루페르트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리프니에의 평가는 가혹했다.
< “잉겔하트 공작” 프리드리히 헤첸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37세
명성: 꽤 유명함
신체상의 특징: 벗겨진 머리
2. 운명의 실타래
소국의 공작: C+
무능력하지만 일을 매우 열심히 함: C-
가난한 식탁에 딸린 입: D+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C+ (가까이하지 마세요)
‘공작이나 되는 사람 등급이 이렇게 낮다니……. 거기다 가까이하지 말라는 여신님의 주석까지…….’
어지간히 밉보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가 제공하는 정보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중요한 건 과반수를 얻는 거지요. 제국법전에 따르면 황제는 반드시 총투표수의 절반, 즉 네 표 이상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처럼 후보가 난립한 상황에 과반수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황제 선출의 투표권자는 총 여덟 명.
그중 일곱은 선제후며 나머지 하나는 선제 본인 혹은 선제가 지정하는 사람이다.
“일단 선제후께서는 두 표를 확보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연한 일이다.
선제, 클라우데 2세가 지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안젤리나니까.
‘2표를 가지고 시작한다. 한 표는 나, 다른 한 표는 안젤리나 대황후.’
루페르트에게 필요한 건 두 표다.
두 표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루페르트는 황제가 될 수 있다.
선제후 둘만 설득하는 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소리다.
문제는 어떻게 선제후의 지지를 얻느냐다.
“일단 후보를 세운 선제후의 지지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루페르트를 제외하고 후보를 세운 선제후는 고어문트, 노르드마르크, 디터팔츠 세 명이다.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아카이아는 후보를 세우지 않았다.
즉, 이번 선거의 향방은 이 세 군데 선제후령을 공략하는 데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단 사자를 보내 보는 건 어떻습니까?”
프리드리히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득의만면한 얼굴로 묻는다.
마치 모든 수를 준비했다는 표정.
미덥지 못하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여신의 아티팩트, 시간의 책갈피 사용이다.
* * *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선제후 쪽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프리드리히가 활짝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지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도 밤을 새웠다.
선제후가 된 후 루페르트의 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으니.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선제후의 업무에 대한 교육과 인수인계, 가문의 구성원과의 대면식, 우호 관계의 설정, 선제후 영지의 정보 습득 및 관리, 가문에 속한 자들의 관리 등등 하루에만 수십 개가 넘는 결재 문서가 올라오고, 그걸 일일이 검토하고, 서명을 해야 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두 선제후께서는?”
“말 그대로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신다고 합니다.”
“애매모호한 표현이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당장 트라이아 선제후는 고어문트 선제후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노르드마르크 선제후와도 앙숙이지요. 디터팔츠 선제후와는 중립적인 관계지만, 지켜야 할 의리는 없습니다. 고로 우리 쪽에서 약간의 약속을 해 준다면 가볍게 넘어오지 않을까요?”
“흐음.”
말은 그럴듯하다.
실제로 선제후 간의 관계는 사실이기도 했고.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는 골트문트와도, 게오르크 아르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그쪽에서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고 그걸 전달하도록 해 봅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처음 선거전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방법이 없어 보이던 황제 선거지만, 막상 들어가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프리드리히가 무능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두 표를 획득한 상황에서 나머지 두 표를 얻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선제후 두 명만 구워삶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의 조언에 따라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두 군데 선제후에 대한 포섭 작전에 들어갔다.
수많은 서신이 오갔다.
선제후들이 원하는 건 당연히 이권이다.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를 비롯해 제국 도시에 관한 영향력 상승 등등 선제후의 요구는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중엔 무리한 요구도 있었고 쉬운 요구도 있었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 그리고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구분하여 협의를 이끌어 갔다.
쌓이는 서신의 양과 합의된 사항이 많아질수록, 루페르트는 흐릿하던 윤곽이 확연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을 남겨 놓고 한 장의 서신이 도착했다.
평범한 서신과는 다르다.
두루마리 겉봉부터 금박에 장인이 아로새긴 갖가지 화려한 장식과 문양으로 가득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안엔 무려 레벤호스트 본인이 친필로 쓴 서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 트라이아는 슈발츠마인 선제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바이오.
‘저 레벤호스트가 날 지지하는군. 날 그렇게 업신여기던 그 멋쟁이 선제후가.’
레벤호스트의 지지 선언은 루페르트를 강하게 고무시켰고, 불안을 확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건 가능할지도?”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는 친필 서신은 보내지 않았지만, 거의 비슷한 급의 확약을 해 왔다.
루페르트의 가슴은 전례 없이 두근거렸다.
‘보인다. 황제의 자리가. 황궁이. 황궁의 벽이 내 눈에 보인다.’
최대의 난관이 의외로 쉽게 넘어갈 조짐이 보인다.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흘러 선거일.
테타우의 황궁 안에서 선거가 진행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가 이루어졌고, 곧 중재자인 아카이아 대주교가 결과를 발표했다.
“걱정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선제후님.”
자신보다 더 의기양양한 프리드리히를 뒤에 거느린 채 루페르트는 발표를 기다렸다.
곧 아카이아 대주교가 제국 의회의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 로이겐 뇌르겐틀링 1표. 마티아스 1표…….”
순조로운 출발.
이변은 없을 것이다.
‘내 표와 대황후의 표. 거기다 선제후 두 명의 표가 나에게 있다.’
루페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카이아 대주교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카를 호이징거 4표.”
“?”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4표? 카를 호이징거가?’
루페르트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활동했던 루페르트나 로이겐과 달리, 카를 호이징거는 불과 두 달 전에 나타난 아무 명성은커녕 정보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그자가 4표라고……? 그 무명의 인간이 황제가 된다는 소린가?!’
“그리고 마지막. 루페르트 가우저.”
아카이아 대주교의 주름진 눈이 루페르트를 향한다.
“1표.”
[ 역시 예상한 그대로네요. ]
리프니에가 혀를 찼다.
[ 빨리 나팔을 부세요. 지금 당장! ]
* * *
“…….”
어두운 회랑.
루페르트는 조금은 얼빠진 얼굴로 어슴푸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1표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분명 내가 얻어야 할 건 4표인데. 어째서 1표지? 대황후는? 대황후께서는 내게 투표하지 않으신 건가?! 아니 대황후의 표를 얻었다고 해 봐야…….’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아니,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프리드리히가 아무리 무능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사안이 단순한 만큼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아니, 그런 약조까지 받았는데.’
[ 루페르트 가우저. ]
회랑 너머에서 뚜렷한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보이지 않는 여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 여신님.”
[ 제가 볼 때 이번 사안은 당신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요. ]
“……그, 그렇습니까?”
[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당신을 도울 테니. 이를테면 조력자지요. ]
“조력자요?”
[ 네. ]
순간 루페르트는 앞을 보았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크고 기골이 장대한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한.
그런데 이 사내.
루페르트가 아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늘 이곳의 의자에 앉아 있던 그 노인?!’
늘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루페르트 앞에 서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했나?”
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건의 그늘에 가려진 그럼에도 선명히 보일 것 같은 강렬한 안광을 내뿜으며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이번엔 함께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