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47화 (47/225)

47화 13. 회랑의 노인 (1)

“그래. 루페르트 가우저.”

방 안에 들어선 순간 루페르트는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시련을 이겨 냈다고 하더구나.”

대황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강력한 경쟁자를 모두 배제하고.”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전신에 드리운 채.

“다만, 네가 말한 오크들은 이미 숲을 떠난 것 같다더구나. 네가 말한 그곳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그렇습니까.”

“그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네가 이제 앞으로 봐야 할 건 선거다.”

대황후가 힘겹게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의 즉위식엔 참가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녀의 목숨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루페르트는 죽어 가는 대황후를 보며 그녀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떠올렸다.

“…….”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그녀는 얼마나 많은 걸 베풀었던가.

비록 시련이라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누가 그런 시련이라도 베풀어 준단 말인가?

안젤리나는 아무것도 없는 루페르트의 가능성을 보고 그에게 기회를 줬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가 없었다면 수천 번의 회귀를 해도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왜 눈물을 글썽이느냐?”

침대에 누운 채 안젤리나가 고개를 돌리며, 그녀답지 않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

그녀는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봤다.

갖가지 감정이 어두운 눈동자 안에서 소용돌이쳤지만, 마지막에 남은 건 애정이었다.

“내게 아들이 있었다면.”

안젤리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딱 너 정도의 나이려나.”

루페르트는 살짝 놀란 얼굴로 안젤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내게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말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네가 죽인 그 야수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니.”

“…….”

안젤리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방 한구석을 쓸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거기엔 여러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녀에서 마치 여신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전성기의 여인, 그리고 위엄과 기품을 동시에 갖춘 원숙기의 자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안젤리나 본인의 것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의 자신들을 바라보며 안젤리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다.”

“…….”

“어느 날 갑자기 데려왔지. 자신의 후계를 잇게 하겠다며. 똑똑한 아이였어.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쳤지. 내가 낳은 건 아니지만,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시선은 초상화 중 하나에 꽂혔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가진 귀여운 사내아이의 해맑게 웃는 얼굴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안젤리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짙은 한숨을 토해 냈다.

“루페르트 가우저.”

대황후가 눈을 떴다.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 마리의 범이 됐다고 해서 방심하지 마라. 네 주변은 또 다른 범과 사자가 득실거린다. 그것들은 호시탐탐 너를 견제하며 언제든 물어뜯을 궁리를 할 것이다.”

“…….”

알고는 있다.

선제후가 됐다고 하나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가시밭길이라는 걸.

선거가 남았다.

황제가 되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이전엔 몰표를 받았지만, 지금 그들이 내게 표를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게오르그 아르님이 널 싫어한다는 소문이 들리더구나.”

“그렇습니까?”

“허나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심지어 자신마저 혐오하지. 정녕 위험한 건 골트문트다.”

골트문트.

이 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루페르트도 알지 못한다.

전생에선 최대의 협력자이자 최대의 이해자였는데, 지금은 앞장서서 루페르트를 해하려 한다.

‘역시, 황궁의 습격은 골트문트의 짓이었군.’

“늘 경계하고, 사람을 쉬이 믿지 마라.”

대황후가 입을 막았다.

지긋지긋한 기침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기침을 참으려 했지만 입을 막은 손에서 검붉은 핏물이 손가락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하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대황후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가라. 루페르트 가우저.”

간신히 대황후가 말을 이었다.

“너에겐 할 말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아껴야겠구나.”

“대황후님.”

“앞으로 널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널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은 해 보겠다. 내 귀에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이름이 황제가 됐다는 소리를 담을 수 있도록.”

안젤리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루페르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늙고 추하고 죽어 가는 여성의 미소건만 루페르트는 그 미소에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마치 여신이 웃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루페르트는 방을 나서며 안젤리나의 초상화를 보았다.

‘소문은 진짜였군. 젊은 날의 대황후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죽음과 같은 정적에 휩싸인 방을 나서고 긴 복도를 걸었다.

그 복도 끝에 자리 잡은 커다란 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사람이 운집한 떠들썩한 연회장이 펼쳐졌다.

이름 모를 귀족들이 술잔을 들며 소리쳤다.

“선제후 전하가 오신다.”

“선제후 전하, 오래 장수하길.”

모든 이의 눈이 루페르트에게 집중됐다.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이다.

황제가 하는 일이 남에게 보이는 것이기에.

그러나 그때와 지금과는 시선의 온도가 다르다.

질투, 선망, 존경.

뜨거운 느낌이다.

여간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이런 느낌이었나.’

황제 시절과는 다르다.

거저 얻은 지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자리다.

루페르트는 이날 느꼈던 감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뭐지? 이 사람들. 이게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사람들인가.’

황제 시절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에 속한 군주와 귀족들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엔 그들을 부러워했고 경외했다.

같은 가문 출신이라고 하나 가문의 중심부에 근접한, 날 때부터 고귀한 그들의 태생을 부러워했으니.

실제로 그들은 세련됐고 권력이 있었으며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 보인다.

평범하다.

아니, 평범한 정도면 다행이다.

명백히 격이 떨어지는 인간들이 눈에 밟힌다.

콘라드 회에 같은 드러내놓고 탐욕을 드러내는 기회주의자들, 시련에서 패배했음에도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에리히 랑에 같은 속 좁은 인간들, 달콤한 말로 환심을 사려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는 치들.

심지어 시종이 늘 옆에서 지켜보는 정신 박약아도 있었고 대황후보다 건강하지만, 정신은 나가 버린 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었다.

“그, 그래서 이번 선제후가 누구야? 루돌프냐? 루돌프. 그 자식. 황제잖아?”

예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던 광경이다.

“…….”

사람의 파도에서 잠시 벗어난 후 루페르트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았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그에게 있어 여기 있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큰 도움을 줬던 사람들.

당연한 일이지만 빨간 명찰을 단 그들은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영원히 사회의 주변부를 살다 죽어 가는 것이 그들의 숙명.

‘그들에겐 변변한 감사의 말도 못 했는데.’

잠시 씁쓸한 기분에 잠겨 있는 사이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열댓 명의 사내가 의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것은 썩어 가는 나무 방패를 이어 만든 고색창연한 의자였다.

비두킨트의 의자.

슈발츠마인 가의 시조였던 위대한 전사가 앉았던 자리라고 한다.

이 자리에 앉아 장미 덩굴을 이어 만든 화관을 씀으로써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가의 선제후의 자격을 얻는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선제후인가.’

그토록 고대했던 자리지만 막상 손에 쥐니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허무한 타이틀이 없다면 루페르트는 감히 황제가 될 꿈조차 꾸지 못할 것이다.

가문의 군주와 귀족들이 거대한 회관을 양분해 마주 섰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짧은 창과 방패.

그들은 창대의 끝으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족장, 선제후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비두킨트 이래 천년을 이어진 의식이 시작되려 한다.

“선제후님.”

시종 하나가 정중하게 루페르트를 부른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기다리는 가문의 전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창대가 땅을 울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

잠시 루페르트는 압도되는 기운을 느꼈지만, 예의 치매 걸린 노인의 방정맞은 한마디가 막상 든 경건한 기분을 깔끔히 날려 버렸다.

“뭐?! 루페르트 가우저?! 가우저? 그게 누구야? 루돌프의 집 나간 동생? 루돌프한테 동생이 어디 있어.”

표정 관리를 하며 루페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전사들을 향한다.

그 끝에 비두킨트의 의자가 있다.

쿵! 쿵! 쿵!

그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창대가 일사불란하게 바닥을 두드린다.

마치 거부를 뜻하는 듯한 격렬한 울림.

이에 가문의 가장 힘 있는 자들이 그에게 창과 방패를 내밀었다.

가문의 창과 방패를 든 채 루페르트는 좌우를 둘러보며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나에게 이의를 제기하는가?”

쿵!

전사들이 후창한다.

“아무도 없소.”

다시 루페르트가 말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누가 나에게 도전하겠는가?”

쿵!

또다시 전사들이 후창한다.

“아무도 없소.”

루페르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의 명에 따르라. 나의 명은 곧 부족의 명. 부족의 명에 거역하는 자는?”

쿵!

“오직 죽음뿐.”

마지막으로 루페르트는 자신의 창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들이 우리를 지켜보신다.”

전사들이 화답했다.

“우리 또한 신들을 지켜보리라.”

루페르트는 몸을 돌렸다.

방패로 엮어 만든 비두킨트의 의자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손엔 창, 한 손엔 방패를 들고 자리에 앉자 가문의 중진이 갓 딴 장미 덩굴로 엮은 화관을 루페르트의 머리에 씌웠다.

장미의 날카로운 가시가 살갗을 파고들어 상처가 나고, 피를 내게 했지만, 루페르트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쿵! 쿵! 쿵!

창대가 바닥을 울린다.

루페르트 또한 창대로 바닥을 두드렸다.

소리 없는 함성 속에서 새로운 선제후가 탄생했다.

* * *

“정든 이곳을 떠난다니, 참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이제 더 이상 위버하임에 머물 이유는 없다.

선제후가 된 루페르트의 처소는 같은 주에 속한 슈발츠마인가(家)의 성으로 옮겨질 것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위버하임을 찾아왔다.

물론 여기엔 리프니에의 독촉이 있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사당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그나저나,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이번에 상상 이상의 일을 해 줬어요.”

위버하임이 다가오자 리프니에가 갑자기 칭찬의 말을 건넸다.

판텔레온을 죽인 이후에도 별말이 없던 그녀다.

선제후에 오를 때도 아무 말도 없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루페르트의 얼굴에 화색이 돈 건 당연한 수순.

‘여신님. 삐친 게 아니었구나. 아니, 이제 와서 풀린 걸까.’

“설마하니 그 괴물을 죽이다니. 이거,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을 다시 봐야겠는데요?”

“그 말씀은 제 빈약한 평가를 수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음, 솔직히 당신 평가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소라고둥이 없는 자신을!”

“그, 그건 그렇지요.”

“그나저나 그건 도착했으려나.”

“그것이라니요?”

“어머. 설마 잊었나요? 전에 제 조각상 주문했잖아요?”

“아. 그렇습니다. 확실히 디터팔츠의 카를 빔펜이라는 사람에게 주문했습니다.”

리히트 보덴에서 돌아온 후 루페르트는 탐욕을 드러내는 리프니에의 성화에 결국 사당에 금칠을 하는 대신 조각상 하나를 만들어 주기로 합의했었다.

‘열네 살 정도의 소녀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지. 그것도 조각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14세. 14세 때의 모습을 조각해 달라고.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뢰였지.’

의뢰는 확실히 했다.

그런데 조각이란 게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본 적이 있다.

황궁의 벽에 조각된 역대 황제의 조각상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루페르트가 황제가 된 지 5년이 지난 뒤에서 조각사들이 선제의 조각상을 다듬고 있었다.

‘그게 그리 빨리 되는 건 아닐 텐데.’

전혀 아니었다.

리프니에의 사당 안에 떡하니 등신대의 조각상이 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아, 그 사람요? 네. 직접 마차를 몰고 왔지 뭐예요. 뭔가 이상해 보였어요. 넋이 좀 나간 느낌? 그래도 보수는 충분히 제공했답니다.”

집사 세바스티안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렇군.”

루페르트는 하인들을 물리고 사당 안에 들어갔다.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렸다.

“어머.”

리프니에가 조각상을 발견했다.

“정말 잘 만들어졌네요.”

루페르트도 조각상을 보았다.

열네 살 정도 소녀의 느낌.

앳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품이 느껴졌다.

‘카를 빔펜. 놀라운 실력이군. 단시간 내에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과연 여신님이 그 이름을 알 정도구만.’

그런데.

이 조각상의 얼굴, 이상할 정도 눈에 익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고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끝에 정확히 일치되는 얼굴이 운명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잠깐. 이건.’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소라고둥이 조각상 옆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이거 보세요. 저랑 완전 판박이에요.”

여신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건 안젤리나 대황후의 어린 시절 모습이잖아.’

“저를 꼭 빼다 닮았다고요.”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혼백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심해의 악취를 느낀 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