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12. 성 판텔레온 (2)
‘어떻게 해야 하나.’
마를로네는 그 괴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녀의 검은 괴인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괴인은 단 한 번의 움켜쥠으로 그녀의 목을 꺾어 죽였다.
그녀가 대황후의 안배로 배정된 인물인 건 맞지만, 제아무리 대황후라고 해도 저런 괴물이 숲에 도사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내장에 걸린 자가 숲속을 배회하며 오크를 끌고 다니는 건 물론이고 도펠죌트너의 검격을 맨몸으로 막아 낸다? 이건 나도 못 믿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괴인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한 사내를 생각했다.
마를로네가 아닌, 그녀를 늘 데리고 다니던 이글거리는 분노를 간직한 눈동자를 가진 초로의 사내를.
“베르크 란 말입니까?”
지금 상황을 중재할 수 있는 자는 안투안 쿠르스트뿐이다.
“마를로네. 그 여자애한텐 조금 기분이 상할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자리 아니겠습니까? 이왕이면 으뜸 패를 손에 쥐고 싶군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대체할 사람으로 베르크 란을 지목했다.
‘그 사람이라면, 이겨 주겠지. 그런 확신이 들어.’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스크라엘링의 군세를 일직선으로 뚫고 우두머리를 베어 버리던 모습을.
‘그 사람이라면……!’
“그게, 아마 안 될 거 같습니다.”
안투안이 난색을 표했다.
“이유가 있나요?”
“콘라드 회에를 비롯한 가로들이 그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직접 나선다면 모두의 견제는 물론이고 불필요한 잡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라면 그의 손녀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요?”
“해서 남장을 풀게 했죠. 치졸한 눈속임이지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녀와 그 사람은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만나게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한 가지는 확인했다.
베르크 란은 쓸 수 없다.
‘한스 징펠만이 있다면 쉽게 풀어 나갈 수 있을 텐데.’
지금 한스 징펠만은 빙해에서 바다의 마물을 사냥하고 있다. 그것은 불과 철의 형제단으로서의 의무다.
그의 의무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시간의 책갈피에 저장된 시점으로는 그를 데리고 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남아 있는 것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건가.’
현재 루페르트가 손에 쥔 카드는 마를로네, 그리고 안투안 쿠르스트다.
마를로네는 실패한 카드다.
안투안 쿠르스트는 평범한 카드다.
각각 쓰기엔 못 미더운 카드들.
그런데 이 둘을 합친다면?
“제가요?”
“네. 마를로네 양도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이런 중대사를 맡기기엔…….”
안투안 쿠르스트는 대황후의 사람이지만, 대황후는 엄밀히 말해서 과거의 사람이고 건강도 좋지 않다.
아직 젊은 그로서는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할 것이다.
루페르트는 안투안 입장에선 매력적인 후보다.
선제후가 될 수도 있고 황제도 될 수 있는 사람이니.
어느 한쪽이 되더라도 안투안에겐 득이 될 것이다.
“대황후께서는 마를로네 양에게 일임했지만, 상황이란 늘 유동적이고 변화하기 마련…….”
안투안이 수락했다.
“저를 원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서겠습니다. 물론 저 혼자가 아닌, 제국 수렵대 출신 최고의 사냥꾼들이 함께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부탁이 있는데요.”
“네. 남작님.”
“마를로네도 데려가고 싶습니다.”
두 카드를 동시에 활용한다.
이것이 루페르트의 속내.
그런데 안투안 쿠르스트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진다.
곧 그는 달갑지 않은 한마디를 던졌다.
“그녀는 제가 간다면 아마도 따라오지 않을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그녀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요. 애당초 첫 만남부터가 썩 좋지 않았죠. 남작님이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안투안의 말은 추측보다는 확신에 가까웠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가지 않겠어요.”
마를로네는 단칼에 제의를 거절했다.
“대황후께서는 저 혼자 그쪽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쪽이 그 틀을 깬다면 저도 굳이 따를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생각이 바뀔 여지가 터럭만큼도 없다는 건 꾹 다문 입술과 회피하는 차가운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
어쩔 수 없이 루페르트는 돌아섰다.
마를로네에겐 약간의 호감이 있었다.
연하에다 딱한 사정이 느껴졌으니.
빙상에서 보여 줬던 인상적인 모습도 호감의 형성에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쉽게 만들어진 호감은 쉽게 희석된다.
중요한 상황에서 거절했다.
그것도 매몰차게.
귀엽게 보이던 소녀의 얼굴이 달라 보였고 안투안 쿠르스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사람들이 저 녀석을 싫어하는 이유는 비단 빨간 명찰만은 아니겠지.’
어쩔 수 없다.
두 번째 도전은 안투안과 함께했다.
단 한 명만을 거느렸던 루페르트의 수행원은 일약 8명으로 늘었다.
부우우우우-
두 번째 사냥 나팔이 울렸다.
루페르트는 전과 달리 길이 난 곳을 따라 수행원과 함께 숲속을 걸어 나갔다.
‘이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안투안 쿠르스트가 사냥꾼으로서는 평범하다고 해도 그와 그의 부하들은 전투가 가능한 사람이다.
루페르트는 그들이 다른 시간 축에서 한스 징펠만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
‘괴인의 두꺼운 피부는 아마 팔꿈치 아래에서 손까지 영역으로 보였어. 다른 부분은 적어도 액면으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빗발치는 총탄이 그의 머리나 팔이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을 꿰뚫을 수 있다면 의외로 쉬운 상대일지도 몰라.’
머리를 싸매는 난제가 의외의 장소에서 쉽게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행운이 따라 줬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말 없는 소라고둥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
느닷없이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위기 감지?!’
“크아아아악!!”
뒤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즉시 돌아보자 멋들어진 망토를 두른 사냥꾼 하나가 모자가 벗겨진 채 앞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쓰러지는 사내 뒤에 누군가 있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저 얼굴은?!’
틀림없다.
두 번째 궁정 모임의 밤, 황궁의 정원에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던 사내였다.
여신 리프니에의 말에 의하면 저 사내의 정체는 또 다른 도펠죌트너다.
일행의 후방을 잡은 그는 두 자루 장검을 바람처럼 휘두르며 일행을 잇달아 도륙했다.
스걱- 스걱-
목이 날아가고 팔이 날아간다.
탕!
응사하는 탄환은 한참 떨어진 허공만을 맞출 뿐.
“물러서라!”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세계 속에서 안투안 쿠르스트는 의연함을 잃진 않았으나, 선명한 당혹까진 숨겨지지 않았다.
“진형! 진형!”
그제야 루페르트는 저 사내의 검이 동방인의 검처럼 끝이 휘어진 만곡도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다지 중요한 발견은 아니지만.
도펠죌트너가 폭풍처럼 이쪽을 덮쳤다.
순식간에 여섯 명이 토막 났다.
안투안과 나머지 하나가 앞을 막고 총을 겨누지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계단 앞에서 루페르트는 한 소녀를 떠올렸다.
험한 길만을 얄미울 정도로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그 소녀를.
‘녀석의 말이 맞았군.’
“남작……!”
안투안 쿠르스트의 목이 날아갔다.
도펠죌트너는 목전에 있다.
“당신에게 원한은 없지만.”
그가 시간을 줬다.
천금 같은 시간이다.
“죽어 줘야겠어.”
도펠죌트너가 검을 겨누었다.
루페르트는 칼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될 거 같은데.”
“?”
루페르트는 지체 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간이 정지해 버리는 찰나의 흐름 속에서 칼날이 파고들었다.
마침내 시간이 굳어 버렸을 때 섬뜩한 칼날은 루페르트의 심장 바로 앞까지 닿아 있었다.
* * *
“꽤 자주 드나드는군.”
시간의 복도.
미지의 노인이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말을 걸어온다.
“단기 회귀라도 사용하는 모양이지?”
“네. 아마 그런 걸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걸 거듭하면 분명 나아지는 건 맞아. 하지만 단순한 반복만으로는 큰 걸음을 옮길 수는 없는 법이지.”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음영 아래 가린 나머지 영역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이라면. 이분에게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큰 걸음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생각을 해 보라고 하겠지.”
대답했다.
저 미지의 노인이.
루페르트는 또 다른 형태로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이라는 건 의외로 좁고 딱딱하게 굳은 녀석이야. 경험과 선입견, 습관 등에 의해 형태가 갖춰지고 좀처럼 변하려 들지 않지. 내가 권하는 건 행동이야.”
“행동?”
“뭐든 해 보게. 그대는 뭐든 할 수 있으니. 스스로 가능성을 확장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이고 거기서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르지.”
노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루페르트는 그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시간의 복도에 떠오른 두 개의 창 중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하켄하임이 아닌 휘텐보름 숲으로.
* * *
“제가 이 숲의 지리를 잘 아냐고요?”
흐릿한 안개가 낀 듯한 몽환적인 눈동자 아랜 진한 불만이 비 오는 날의 시내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그건 제가 대답할 문제가 아닌 거 같네요. 그건 그렇고 질문이 너무 많지 않나요?”
마를로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미 땀을 비 오듯 흘리던 루페르트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는 남작님의 사냥 안내를 맡았지, 말 상대를 맡은 게 아니에요. 그건 제 의무가 아니기도 하고요.”
“네 의무가 뭐지?”
잘못 평가했다.
마를로네는 울피아나와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그녀 또한 사람을 지치게 하는 여자다.
울피아나처럼 먼저 해코지를 가하는 건 아니지만 어떠한 접근도 불허한다.
이야기를 섞으면 섞을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루페르트의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루페르트를 당혹하게 할 정도였다.
‘대체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뭐냐? 안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싫어할 만한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의무요?”
마를로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돌아서서 투명하리만치 차가운 눈으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숲 안에서 당신을 도와 사냥을 완수할 것.”
그녀는 숲 안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그 이외의 의무는 없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돌아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루페르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녀석이군.’
그 시점에서 루페르트는 원점 회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녀석으로는 무리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한스 징펠만을 데리고 와야 해. 이 녀석과 함께하다간 괴인을 처치하기 전에 화병으로 죽을지도 모르니.’
운명의 실타래는 둘을 거의 동일한 장소로 인도했다.
“음? 누가 감히 나의 숲에 더러운 흙발로 걸어오는가?”
백내장으로 눈이 하얗게 뜬 괴인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에게 눈짓했다.
그녀로서는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동안의 악감정이 아무래도 좋다는 감정으로 이어졌다.
‘최소한 놈의 약점만이라도 파헤칠 필요가 있어. 가라, 마리. 가서 내게 길을 보여다오.’
루페르트는 팔짱을 낀 채 마를로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양상은 전과는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녀의 검격은 통하지 않았고 괴인의 반격은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 몰아넣었으니.
거기까진 아무런 감명을 받지 않았지만, 그다음 벌어진 일은 잠시 냉각됐던 루페르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나, 남작님……!!”
다리를 후들거리며 검에 의지해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도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의 앞을 막아섰다.
“가세요! 내가 최대한 버텨 볼 테니…….”
‘이 녀석.’
붙임성은커녕 매몰찬 거절만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최초의 인상은 살아 있다.
그녀는 의무를 준수하는 용병들의 신조의 굳건한 신자다.
루페르트가 리프니에를 따르는 것처럼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속한 적도 없던 제국 보병대의 규율을 따르는 것이다.
계약이 죽음보다 우선한다는.
그다음부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루페르트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는 비틀거리는 마를로네를 껴안은 채 바람처럼 숲을 질주했고 마물과 괴인을 따돌렸다.
뒤편에서 음산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품 안의 마를로네는 그러나 죽어 가고 있었다.
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듯 동공은 의미 없는 왕복 운동을 거듭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가 입 밖에 낸 건 매도나 원망이 아닌 사과였다.
“당신을 돕지 못해서.”
“거기까지. 말을 아껴라.”
인간의 죽음은 몇 번이고 보아 왔지만, 강한 기시감이 루페르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 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재미 삼아 던진 부지깽이에 등 쪽에서부터 몸통이 관통되어 죽어 가던 소녀를 안고 그녀의 유언을 들었었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지켜 주세요. 제 실패로 인해 할아버지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이 녀석.’
루페르트는 과거에 보았던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때도 그녀는 조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저 나이 때 할 수 있는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다.
“왜 그렇게 조부를 챙기는 것이지?”
해서 물었다.
지금이라면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몇 차례 불안하게 움직였고 이윽고 그녀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야 할아버지가 날 키웠으니까…… 당신네 일족이 붙인 빨간 명찰을 단 채…… 젖먹이이던 날 안고 온갖 모욕과 협박을 받아 가며 날 키웠으니까…….”
마를로네의 얼굴에 무한한 감사와 더불어 헤아릴 길 없는 분노가 드러났다.
“당신네 일족만 아니었더라도……!”
그 얼굴을 보며 루페르트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이 녀석이 증오하는 건 내가 아닌, 우리 일족 그 자체였던 모양이군.’
아이러니한 일이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에 소속된 자가 그 가문을 증오한다는 건.
해묵은 분노와 관계없이 마를로네의 목숨은 경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차가운 손이 루페르트의 얼굴을 움켜쥐듯 붙잡더니, 이내 스르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약속하세요. 하, 할아버지를 변호, 변호해 주겠다고.”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지?”
“그, 그건…….”
“네가 나에게 뭘 해 줄 수 있다는 말이냐?”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루페르트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
천진난만하리만치 순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말했다.
“저기. 저기 있네요.”
“…….”
“저기요. 저기.”
마를로네의 몸이 꺾였다.
생명이 다한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고 자신도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원점으로 돌아가자.’
무심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페르트의 눈이 과할 정도로 커졌다.
죽어 가던 소녀가 바라보던 방향엔 순백의 사슴이 무구한 눈으로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 * *
저기 숲의 출구가 보인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자리는 이제 루페르트의 것이다.
손에 든 건 흰 사슴의 목.
그는 범이 될 자격을 얻었고 한 마리 범이 된 상태에서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과 자웅을 겨룰 것이다.
하지만 강하게 마음을 짓누르는 게 있다.
한 소녀의 죽음이다.
‘이게 맞는 건가.’
늘 틱틱거리고 거리를 두려는 스스로 미움을 자초하는 소녀였다.
하지만 마지막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루페르트의 가슴 한구석을 강하게 울렸다.
이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냉정하게.
마치 철혈대제처럼.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처럼 사슴만 사냥해서 빠져나가는 방법 같은.’
아직 볼에 그녀의 손이 어루만지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적어도 그 녀석은 날 지키려고 했어.’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었다.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제국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맑고 청량한 나팔 소리가 가문의 숲 위에 울려 퍼졌다.
‘원점으로.’
어두운 복도를 연상하며 루페르트는 세상이 변하길 시작했다.
그런데.
“음?”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재차 나팔을 불었다.
다음 순간 차디찬 음성이 의식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 싫어요. ]
여신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