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2. 성 판텔레온 (3)
갑작스러운 여신의 등장에 루페르트는 당혹감과 동시에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강한 혼란을 느꼈다.
‘갑자기 여신님이? 아니, 그보다 지금 상황은 대체…….’
리프니에가 회귀를 거부했다.
툭.
들고 있던 사슴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하얀 털을 가진 머리는 눈이 반쯤 녹은 진창에 빠져 검은 흙색으로 더럽혀졌다.
‘회귀가 안 되다니. 그, 그러면 나는 대체?’
루페르트는 비틀거렸다.
순간 숨이 막히고 눈앞이 흐려지며 사지의 힘이 풀렸다.
어지러움 속에서 리프니에의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거역하기 어려운 밀물처럼 귓가로 밀려 들어왔다.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이 회귀할 때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회귀는 당신의 유희를 위한 게 아니라고. ]
‘유희라니.’
처음 느낀 감정은 반감이다.
‘이게 어떻게 유희란 말인가.’
여신도 보았을 것이다.
루페르트를 덮친 숱한 난관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 사주를 받은 도펠죌트너, 그리고 번번이 죽어 나가던 마를로네.
그 속에서 단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 간 여자를 살리려 드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인가?
[ 루페르트 가우저.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요? ]
여신이 다시 질문을 던져 온다.
그 목소리는 전보다는 약간은 누그러져 있었다.
그 뜻밖의 누그러짐에 루페르트는 오히려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복받치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을 쥐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여신님. 제가 어찌 저에게 모든 걸 주신 여신님에게 불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지가 않네요? ]
“전혀 아닙니다.”
[ 그 여자애. 살리고 싶나요? ]
“아닙니다. 저는 여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뒤이어 희미한 웃음 같은 것이 잔물결처럼 희미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왜, 그 여자를 살리려 드는 건가요?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 주세요. ]
“그, 그건…….”
루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한마디로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너무나 많은 감정의 실타래가 가슴 속에 엉켜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생각했다.
잘린 사슴의 머리가 이쪽을 죽은 눈으로 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북소리?’
북은 동방 침략자들의 악기라고 한다.
150년 전, 테타우를 포위했던 동방 이교도들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 만든 거대한 북을 두드리며 성벽을 오르던 병사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침략자를 떠올리게 하는 그 북소리가 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데 일조했다.
‘그래, 그런 거였나.’
고소가 입가에 서린다.
한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서 재생됐다.
“여신님도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처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루페르트가 가늘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타우엔 999명의 병사가 있습니다. 최초의 황제 시절부터 이어진 긍지 높은 제도의 수호자였죠. 그러나 그들은 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대가 다가오자 미련 없이 제 앞에서 저를 떠났습니다.”
그들만이 아니다.
루페르트를 버린 사람은 셀 수도 없다.
모두가 루페르트를 버렸고, 필요로 하는 순간에 아무도 그 옆을 지키지 않았다.
회귀 전, 루페르트의 폐부를 찌른 건 융커스 베샤문트가 아닌 이름 없는 병사들이었다.
루페르트가 황제라는 것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렁뱅이들이 황제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발길질을 가하고 침을 뱉고 몸에 있는 값진 보석을 다 가져갔다.
반지를 꼈다면 어쩌면 손가락째로 잘라 갔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죽은 체를 하며 술 취한 병사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모습.
그것이 이 명망 높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꼬락서니였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와 회한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지켜 주려 했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억지를 부렸나 봅니다.”
루페르트는 몸을 낮추고 진창에 빠진 사슴의 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진창에 색에 물든 사슴의 목에는 하얀색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이젠 앞만 보고 나아가겠습니다. 여신님. 감사합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또다시 변했다.
이제 루페르트를 걱정하고 있다.
[ 당신에게 아픈 추억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 그건 황제 시절 당신을 계속 짓누르던 마음의 병이었죠. ]
“이겨 내야 할 질병입니다.”
[ 제가 당신의 회귀를 막은 건, 여신의 눈으로 봤을 때 지금만 한 기회가 또 오지 않을 거 같아서예요. ]
“그렇습니까?”
[ 하지만, 음. 당신은 여전히 그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네요. 아마, 미련이라는 이름의 감정이겠지요? ]
“전혀 아닙니다.”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가 점점 기세를 더한다.
숲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엔 기괴한 아우성도 섞여 있었다.
‘대체 누가 북을 치는 거지?’
[ 당신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면, 더 잘할 자신이 있다면 회귀를 허락하겠어요. ]
“아니, 지금도 괜찮습니다. 여신님께서 최적의 결과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 제가 보는 시선과 당신이 보는 시선이 반드시 같을 순 없지요. 루페르트 가우저.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잘 부러지는 존재랍니다. 가장 강인하고 위대한 인간조차 지극히 사소한 것에 무너지곤 하지요. 하물며 당신같이 여리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
“…….”
멀리 숲의 출구가 보인다.
어두운 숲 안과 대조적으로 출구는 빛의 실로 짠 것처럼 눈부시다.
[ 자, 그럼 회귀를 해 보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을 지키려고 했던 그 여자아이를 살려 보세요. ]
“……여신님.”
리프니에는 종잡을 수 없는 신이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가차 없는 성격도 성격이지만 감정의 변화가 너무 컸다.
솔직히 말하면 짓궂은 어린아이 같은 일면이 있다고 할까.
[ 이건 제가, 아니 어쩌면 당신의 운명이 당신에게 내리는 시련일지도 모르겠네요. ]
소라고둥이 스스로 흔들거린다.
마치 자기를 불어 달라고 아양을 떠는 양.
[ 자, 나팔을 불어요. 어서요. 아까 못 불었던 한을 지금이라도 풀어야죠. ]
‘대체. 여신님은.’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유일한 사도이며 충직한 신봉자다.
부우우우우---
청명한 나팔이 숲속에 울려 퍼졌다.
[ 아주 잘했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정말이지, 제 말을 너무나 잘 듣네요. 모든 인간이 당신 같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
“…….”
[ 하지만 말이죠. 원점으로 회귀는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힘을 낭비하긴 싫거든요. ]
‘뭘 생각하는 걸까?’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여신에게.
* * *
“표정이 어둡군.”
노인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목례를 하고 하켄하임의 풍경을 지나 우울한 휘텐보름 숲의 풍경으로 걸어갔다.
“이상향 같다고 했던가.”
노인이 어둠 속에 총천연색으로 펼쳐진 풍경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 이제는 어떻게 보이나? 여전히 이상향으로 보이나?”
루페르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의자 안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 * *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 거죠?”
정신을 차리니 이미 죽었어야 할 녀석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를로네.”
마를로네가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제 이름은 왜…….”
그녀는 강한 경계심은 물론 불쾌감도 숨기지 않았다.
‘어휴.’
루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런 녀석을 살리려고 여신님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했는지.’
“일단 가 보자.”
“?”
“부대 전진.”
“네. 알겠어요.”
같은 사건의 반복 속에서 변주를 가해 봤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안 될까?”
‘굳이 그 괴인을 만나지 않고도 흰 사슴을 찾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이 녀석으로는 그 괴인을 이길 수가 없으니.’
“서쪽에 가 봐야 흰 사슴은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아이들은 개울가 주변을 좋아하거든요.”
“그건 어떻게 알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부대 전진. 서쪽으로.”
“……네.”
잠시 후.
“봐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실로 그러했다.
전 시간 축에서 보았던 흰 사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숲속에서는 어떠한 울림도 없었다.
‘젠장. 그때 보았던 건 단지 운이었나. 아니면 우리가 못 찾고 있는 건가.’
대신 한 마리 여우가 눈 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경계의 시선을 보낸다.
마를로네는 여우를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맥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요?”
“…….”
“저기. 남작님?”
다음 순간 마를로네와 루페르트는 거의 동시에 북쪽을 응시했다.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곧 한 사내가 숲의 그늘 속에서 이교도의 검을 어깨에 진 채 슬며시 기어 나왔다.
‘이 녀석은?’
틀림없다.
황궁에서 만났고, 2회차 시도에서 안투안 쿠르스트 일행을 홀로 도륙 내던 바로 그 도펠죌트너다.
이름 모를 그는 루페르트와 마를로네를 보자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마를로네가 루페르트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세요.”
“뭐?”
“제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예요.”
‘이 녀석.’
지켜 주는 건 고맙다.
사실 그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그런데.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미묘하게 약하네.’
이름 모를 도펠죌트너가 입을 열었다.
“마리. 오랜만이다. 여전히 작은 체구네. 벌써 다 자란 거냐?”
친근한 어조.
아는 사이로 보인다.
마를로네가 냉소를 머금은 채 사내를 노려보며 답했다.
“할아버지를 찾으세요? 잠시 용변을 보러 가셨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네가 거짓말하는 것도 다 보고. 너에겐 원한이 없어. 마리. 그런데 어쩌겠어? 피차 입장이 다른데.”
그때 마를로네가 눈치를 줬다.
“신호 주면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뛰세요.”
“얼마나 버틸 수 있지?”
“10초? 15초? 어쩌면 5초일지도?”
‘……약해.’
“저 사람, 이름이 뭐지?”
루페르트가 다가오는 도펠죌트너를 향해 물었다.
“알아서 뭐 하게요.”
“말해 줘.”
“……발자크 마이어.”
반쯤 체념한 얼굴로 마를로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 마리.”
마를로네가 바로 불만을 담아 이쪽을 바라본다.
“저기, 그쪽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인데 너무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건…….”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건데. 이름 정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잖아?”
“네?”
루페르트는 어리둥절한 마를로네를 뒤로하고 소라고둥을 들었다.
‘여신님의 말씀이 맞는지도.’
지난 시간 축이야말로 하늘이 도운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 녀석을 보니 썩 나쁘진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요? 남작님?”
‘지난 시간 축은 내 힘으로 이루어 낸 결과가 아니다.’
부우우우우---
또 하나의 시간이 덧없는 모래가 되어 바닷속으로 흩어졌다.
* * *
“발자크 마이어?”
퍼즐 맞춰 가는 기분이랄까.
시간의 책갈피를 이용한 회귀는 수중에 쥔 것이 별로 없다.
한정된 단서와 실마리, 자산만으로 어려운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리프니에가 원점 회귀를 금지한 이상 이것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 루페르트의 눈앞엔 아마도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으뜸 패가 서 있다.
베르크 란. 철혈대제의 챔피언이.
“그 친구가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까?”
“다른 경쟁자에게 고용된 거 같더군요.”
“어쩌면 저를 노릴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그는 쓸 수 없는 카드다.
발자크 마이어의 이름을 들먹이고 위험성을 언급했지만, 베르크 란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건가요? 남작님.”
“…….”
‘괴인도 그렇고 발자크 마이어도 그렇고, 이 녀석이 혼자서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건가요?”
“저기. 마리.”
“너무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건…….”
“뭐 어때. 여기서만 함께할 건데. 네 계약. 숲 안에서만 날 지켜 주는 거 아니었냐?”
“……어떻게 그걸?”
“만약에 말이야.”
손에 쥔 건 마를로네라는 어중간 카드.
하지만 쓸 수 있는 건 이 녀석뿐이다.
적어도 그녀는 루페르트를 버리고 달아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루페르트가 해야 하는 일은 명료하다.
이 빈약한 카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결국은 괴인을 만나야 한다. 괴인 쪽엔 사슴이 확실히 있었으니. 요는 그 괴인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만약에 말이지.”
“네.”
“숲에서 괴물을 만났다고 치자고. 네 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네.”
“어떻게 해야 할까?”
루페르트는 숲의 괴인을 생각했다.
“일단은 도망 다니는 게 맞겠죠.”
반면 마를로네는 발자크 마이어를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 괴물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거든?”
“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이란 건 강과도 같다.
각기 다른 곳에서 발원해 서로가 알지 못하는 산천과 평원을 흐르지만 하나로 합쳐지면 결국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바다라는 모든 강들의 종착점으로.
“글쎄요.”
마를로네가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겼을 때 그녀는 턱 끝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는 습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를로네가 이내 조부와 같은 짙은 녹색의 눈동자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저 혼자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면, 그쪽도 뭔가 역할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마를로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작이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하는.
하지만 이게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이란 건 대체로 기분을 나쁘게 하는 한다.
밑바닥 인생은 물론 저 구름 위의 황제까지.
그런데 저 남작.
“역시 그렇겠지?”
웃고 있다.
그 이후는 지루한 숲길의 연속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숲과 관목, 질척이는 눈과 진흙, 지긋지긋한 이끼 낀 숲의 냄새.
조부가 말했다.
이 숲은 원수의 숲이라고.
자신에게 모든 걸 주고 모든 걸 빼앗아 가 버린 가증스러운 일족의 숲이라고.
하지만 그 앞에 일족의 우두머리가 한 줌도 안 되는 사냥꾼을 끌고 나타났을 때 조부는 어떻게 했던가.
죽일 수 있었다.
죽여서 분풀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부는 고개를 숙였다.
늑대처럼 살아가던 그는 유순한 한 마리 개가 되어 죽어 가는 여자에게 복종한 것이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곳이야. 이곳은.’
이제 목적지다.
흰 사슴이 노니는 개울가가 앞에 펼쳐질 것이다.
빠르게 끝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비친 건 비현실적인 괴이였다.
하얗게 눈이 멀어 버린 자가 마물을 이끌고 숲을 배회하고 있다.
‘이 사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느껴진다.
저 인간 모습을 한 괴물 주변을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죽음 그 자체야…….’
도망쳐야 한다.
이길 수가 없는 상대다.
그런데.
“?!”
그 사내, 루페르트 가우저가 그 괴인을 향하고 있다.
그녀가 지켜야 할 사람이 어쩌면 저 발자크 마이어보다 더 위험한 괴물에게 몸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말려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안녕하세요?”
루페르트 가우저가 괴인에게 말을 걸었다.
동시에 그가 눈짓했다.
늘 흐리멍덩하고 쓸데없이 낙천적으로 보였던 그 투명한 눈동자는 지금은 그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빛을 내뿜으며 괴인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비로소 마를로네는 저 사내의 뜻을 파악했다.
‘설마?’
그녀는 사냥 전 루페르트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이게 감당할 수 없는 괴물? 거기다 자신을 미끼로 쓴다고?!’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합니다.”
루페르트가 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인은 입술 근육을 의미 없이 꿈틀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눈먼 자에겐 이름이 필요 없지. 진실을 보는 자에겐 이름조차 또 하나의 어둠이니까. 그러나 세간에선 날 이렇게 부르더군.”
눈먼 자가 씨익 웃으며 흉악한 치열을 드러냈다.
“판텔레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 제국 성인 판텔레온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