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41화 (41/225)

41화 12. 성 판텔레온 (1)

부우우우우--

청아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사냥이 시작됐다.

콘라드 회에를 위시한 가문의 가로와 용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슈발츠마인 선제후가의 당주를 차지하려는 10여 명의 경쟁자가 저마다의 수행원을 데리고 태고의 숲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들어간 건 강력한 후보인 에리히 랑에다. 그는 9명의 수행원을 거느렸다.

그 뒤를 외스타슈 포겔, 게오르그 브뤼켄 두 경쟁자가 동시에 이었다.

둘의 수행원은 9명으로 동일했다.

그들이 숲에 진입한 덜 중요한, 명백히 약한 세력을 가진 경쟁자들이 진입했다.

“안투안 쿠르스트가 저 사람 이야기를 하던가요?”

마를로네가 경쟁자 하나를 나무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녀가 응시하는 경쟁자는 베른하르트였다.

안투안 쿠르스트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군소 후보.

그는 단지 네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렸다.

“아니. 언급하지 않았어.”

“역시나. 할아버지 말대로 멍청한 사람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글 읽을 줄 아는 게 벼슬인지. 사실 글 읽는 재주밖에 없으면서.”

마를로네는 망설임 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평소 안투안에 대한 반감이 짙은 모양.

“베른하르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루페르트는 투덜거리는 마를로네를 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녀는 살짝 루페르트를 응시한 후 곧 시선을 살짝 비키며 말을 이었다.

“외가가 고어문트 선제후 가문 사람이죠. 현재 고어문트 선제후인 골트문트의 사촌 되는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래?”

몰랐다.

베른하르트가 그런 이력을 갖고 있다는 게.

알았어도 크게 의식하진 못했을지도 모른다.

베른하르트고 골트문트도 과거엔 루페르트에게 충성하던 유이한 선제후였으니.

“또 하나 있어요.”

마를로네가 나무 뒤로 모습을 완전히 숨기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내가 부르봉 왕국의 공주죠.”

“그래?”

“정확히는 선왕의 딸이긴 하지만. 샤를 7세의. 알고 계시죠?”

“아니.”

마를로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이런 것도 모르냐는 표정이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다.

진짜 모른다.

루페르트의 잘못은 아니다.

그는 뼛속까지 제국인이며, 제국인의 정점인 황제까지 지닌 인물이다.

제국인에게 있어 외국은 옆에 있는 나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외국의 왕이 누구건 뭘 하건 제국인에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제국의 국력이 대륙의 다른 왕국을 아득히 압도하는 일면이라 할까.

하지만 루페르트로 베른하르트라는 인물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고 있다.

최후의 슈발츠마인 선제후 베른하르트.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빼어난 인물이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슈발츠마인 선제후령의 남은 부를 긁어모아 군대를 모집하고 영지를 안정시키고 마지막엔 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분견대를 꺾고 감히 그들이 자신의 땅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그쪽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 테타우 방위전을 직접 돕진 못했지만, 귀중한 자금과 3천에 달하는 병사들을 파견했다.

그 후의에 대한 감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페르트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정이다.

“저 사람. 꽤 위험해 보여요.”

마를로네가 무표정 속에서도 명백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무슨 근거로?”

“도펠죌트너를 고용했거든요.”

“도펠죌트너?”

“아는 사람이죠.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히 강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네요.”

마를로네가 손짓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요. 이쪽으로.”

그녀는 길도 나지 않은 빽빽한 숲 한가운데를 택했다.

곳곳에 덮인 하얀 눈도 눈이지만 죽은 식물의 덩굴과 관목의 잔가지들이 통행을 방해했다.

“저기.”

“말씀하세요.”

“이 길이 맞냐?”

“정확히는 아니네요.”

“그런데 왜 이런 길로 가는 거지?”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죠.”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수시로 주위를 둘러보며 사방을 경계했다.

짧지만 강렬한 설득력이다.

‘일단은 지켜보자.’

그렇게 해서 둘의 사냥이 시작됐지만,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안내를 맡은 마를로네는 욕이 나올 정도로 거칠고 험난한 길만을 골라 갔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걸음걸이로.

‘젠장.’

평소 체력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뒤를 따르는 것조차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마를로네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도 관목과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나비처럼 나풀나풀 잘도 지나갔다.

겉보기엔 쉬워 보이는 길이지만 직접 따라가 보니 보통 험로가 아니다.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는 경험을 한 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의 뒤통수를 조금은 분한 눈길로 노려봤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거지?’

틀림없다.

지금까지 보여 준 행태로 보아 확실하다.

곧 마를로네도 루페르트의 분한 시선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라?”

마를로네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외로 잘 따라오시네요.”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천천히 가고 있어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가요.”

“길을 알기나 해?”

“네.”

마를로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못 미더운데.’

순간 루페르트는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의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이 느낌은? 위기 감지?!’

기묘한 느낌을 받은 건 그만이 아니다.

마를로네가 자세를 낮추고 루페르트 옆에 다가가 스커트 안에서 한 자루 짧은 검을 검집째로 꺼냈다.

“쉿.”

루페르트는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군데군데 하얀 눈이 쌓인 어둡고 귀기 어린 숲엔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흘렀다.

만물이 잠드는 시기인 겨울인 걸 감안해도 지나칠 정도로 이 숲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경쟁자가 추적한 건가.’

루페르트는 자신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는 마를로네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이 녀석이 강한 건 맞아. 하지만 총기를 들고 전투에 능한 다수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도펠죌트너는 무적이 아니다.

그들도 총탄 앞에서는 공평하다.

과거의 대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도펠죌트너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어느 쪽이 됐건, 우리를 해치려는 적이 누구인지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죽음에 준하는 위기가 다가오지만 태연할 수 있다.

리프니에의 가호가 그와 함께하니까.

하지만 얼마 후, 루페르트에게 위기를 느끼게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당황했다.

‘저, 저건 뭐냐?’

넝마를 걸친 괴인이 숲을 배회하고 있다.

한겨울인데도 팔뚝과 무릎 아래 맨다리가 드러날 정도로 얇은 넝마, 신발도 없이 맨발로 눈과 날카로운 가지와 자갈이 칼날처럼 박힌 흙길을 걸어 다녔고 걸음걸이는 규칙 없이 오락가락했다.

광인을 연상케 하는 풍모지만, 그의 두 눈동자는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백내장, 흔히 민간에서 성 판텔레온의 병이라 불리는 눈을 멀게 하는 병에 걸린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만으로 갖가지 경이를 경험한 루페르트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문제가 되는 쪽은 그 사내의 뒤다.

창백한 피부에 추악한 용모, 원시적인 갑주를 걸친 인간을 닮은 그렇기에 더 소름 끼치는 마물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

‘오크.’

오랜 탄압과 조직적인 사냥으로 제국 내에선 거의 씨가 말랐다고 여겨지는 사악한 종족.

그러나 그들은 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영역 곳곳에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페르트의 고향과도 같은 하켄하임을 불사르고 파괴한 것도 이 마물들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군. 오크가 인간을 따르고 있다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루페르트는 사냥 전 사냥터지기의 말을 떠올렸다.

‘그 사내의 말이 옳았던 건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마를로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랑 여기서 지낼 땐 저런 건 본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하지?”

“일단은 최대한 숨어 보죠.”

마를로네는 괴인 뒤를 따르는 오크들의 숫자를 속으로 헤아렸다.

삼십, 아니 오십 마리는 족히 넘으리라.

대부분 원시적인 활과 창으로 무장했지만, 간혹 석궁을 든 놈도 보인다.

아마 인간을 죽이고 약탈한 모양.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루페르트와 마를로네는 나란히 관목 아래 엎드린 채 이 기괴한 풍파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광인이 먼저 그들을 지나쳤고, 무기를 든 오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놈들은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벅.

루페르트 뒤에서 한 마리 짐승이 나뭇가지를 밟았다.

찰나라는 시간 속에서 루페르트는 운명의 야속함을 느꼈다.

온몸이 눈처럼 하얀, 순백의 아름다운 수사슴이 당당한 가슴과 뿔을 드러낸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 사냥의 목적물이 너무나도 빠르게 루페르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재액 또한 몰고 왔다.

“응?”

눈이 먼 괴인이 루페르트 쪽을 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싯누런 색에 군데군데 이가 빠진 흉측한 치열을 드러낸 그가 고함을 질렀다.

“거기 누구야? 누가 감히 나의 숲에 허락도 없이 찾아왔냐 이 말이다.”

마를로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는 조부처럼 매섭게 적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지?”

루페르트가 물었다.

“우두머리를 해치우는 게 최선으로 보이네요.”

마를로네가 검을 뽑았다.

그녀가 검을 가슴 앞에 직각으로 세우며, 이제는 잊힌 전사 집단의 구호를 나지막한 어조로 읊조렸다.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검신이 붉게 달아오른다.

눈앞이 보일 리가 없는 광인이 히죽 웃었다.

‘희미한 명암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건가.’

별걱정은 하지 않는다.

오크 같은 마물을 거느리고 있지만 결국 평범한 인간.

상대는 저 베르크 란의 손녀다.

빌헬미나 패거리를 양 떼처럼 도륙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루페르트의 관심은 다른 영역으로 옮아갔다.

‘천하의 슈발츠마인 가문의 숲에 저런 광인과 마물이 돌아다닐 줄이야. 평민은 물론 여간한 귀족조차 얼씬도 못 하는 영역인데. 그래서 저런 부정한 것들이 모여든 건가?’

제국엔 이런 숲들이 몇 군데나 있다.

각 선제후 가문은 물론이고 권세 높은 군주들은 저마다 사냥터라는 이름의 녹음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제국 멸망기에 제국을 파도처럼 휩쓸었던 그 많던 마물은 이런 곳에서 창궐했을지도 모르리라.

루페르트가 생각에 잠긴 동안 마를로네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걷다 기습적으로 몸을 탄환처럼 날려 광인에게 쇄도했다.

평범한 인간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속도.

도약이라 불리는 도펠죌트너의 간판과도 같은 권능이다.

‘끝났군.’

마를로네의 불타는 검이 아름다운 호를 허공에 새기며 광인의 목을 향해 베어 들어갔다.

루페르트는 준비한 총기와 석궁을 점검하며 오크들을 노려보았다.

놈들이 공격해 보면 이쪽도 응전해야 하니.

그런데.

“어?”

마를로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불타는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검신이 광인의 팔에 박혔다.

‘어떻게 이런?!’

헐렁한 소매 안에 숨겨져 있던 광인의 팔은 마치 나무껍질을 연상케 하는 울퉁불퉁한 조직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의 검은 그 조직의 일부분만을 간신히 파고든 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의 뼈와 살을 가볍게 가르는 제국의 검이 겨우 광인의 살갗 일부에 고목처럼 박혀 버린 것이다.

“!!”

광인이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마를로네는 즉시 검을 놓고 몸을 피하려 들었지만, 그 앙상한 가지 같은 손은 마를로네의 목을 움켜잡고 그대로 꺾어 버렸다.

소녀의 몸이 허공에 들린 채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리!”

광인이 이쪽을 바라본다.

상상할 수도 없는 기괴함과 증오를 담아.

루페르트는 온몸이 벌레에 파먹히는 듯한 끔찍한 공포를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소라고둥을 들었다.

‘빌어먹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청아한 나팔 소리가 창백한 숲속을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처럼 무너지는 순간 루페르트는 광인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먼 광인은 그러나, 이쪽을 똑바로 본 채 희게 웃었다.

* * *

“…….”

팔부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저마다 권세를 자랑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조차 않은 자들이 경쟁자랍시고 나타났을 땐 솔직히 자만했었다.

마를로네도 훌륭한 징조였다.

조금 투덜거리긴 하지만 대황후가 보낸 사람이자.

존재 그 자체만으로 성공의 구 할을 보장하고 있으니.

“저기, 아까부터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세요?”

마를로네가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하하…….”

그러나 이제는 어이가 없다.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

저 숲, 가문의 숲 안엔 괴물이 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