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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35화 (35/225)

35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2)

리히트 보덴의 부두는 너무나 낙후되어 범선이 바로 접안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했다.

닻을 내린 때까치호에서 보트들이 부산하게 드나들며 화물을 하역했다.

화물의 대부분은 무기와 철괴였다.

깡! 깡! 깡!

거의 10년 만에 리히트 보덴의 대장간이 가동됐다.

총독처럼 손, 발가락 몇 개를 잘라 낸 늙은 대장장이가 즐겁게 땀을 흘리며 담금질을 했고,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익숙하지 않은 불길과 쇳물의 뜨거움을 지켜보았다.

정착지 입구엔 마을 사람 일부가 방책을 보수했다. 철괴와 마찬가지로 때까치호가 가지고 온 잡목을 눈을 잘라 내 만든 벽돌과 뭉쳐 빙상 위의 정착지 다운 단단한 요새를 구축했다.

외로이 서 있는 망루 위엔 총을 가진 선원 두 명이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며 마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처음과는 전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온순해진 총독이 루페르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제 후보 중 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의 눈엔 선명한 경탄과 경외심이 떠올라 있었다.

신체의 나이나, 태어난 날짜 같은 건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는 루페르트라는 인물 자체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무기를 점검하던 루페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가의 방계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선조인 비두킨트 씨족 일원에 불과할 뿐, 선제후 가문의 일원으로는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힘도 재산도 없는 들러리 후보죠.”

“……그렇군요.”

아서 픽튼의 깊은 눈이 좌우를 살폈다.

루페르트를 비롯한 선원 일부가 작업을 돕고 있으나 때까치호의 승무원 대부분은 배 안에 머물러 있었다.

선원들이 전투 참가를 거부했다.

애당초 계약서상에 해상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전투 이외엔 전투에 참가할 필요가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

해적이나 북부인을 만난다면 모를까, 이런 추운 곳에서 정체불명의 마물과 싸울 의무가 없는 것이다.

일부 적극적인 선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마지못해 짐을 하역하는 정도만 거들 뿐이었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의 시선을 눈치채고 배 쪽을 보았다.

갑판 위엔 베르크 란과 한스 징펠만이 있다.

루페르트의 최강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이 배의 통제에 묶여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크 란을 뺄 순 있지만, 한스 징펠만을 뺄 순 없다.

이는 한스 징펠만이 요구한 일이다.

“저까지 배에서 내린다면 선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평소 온건한 선원이라고 할지라도 빙해의 마물들과 마주치면 판단이 흐려지고 평소라면 결코 상상도 못 해 봤을 일을 저지르곤 하니까요. 선원들이라는 건 바다와 비슷합니다. 잠잠하다가도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날뛰는 파도가 될 수도 있지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고급 선원의 불만도 상당했다.

특히 믿었던 페르난도 오르도 선장이 가장 노골적인 변화를 보였다.

“선원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수시로 돌아갈 걸 요구했다.

남쪽 사람인 그에게 빙해의 추위는 견디기 어려웠을뿐더러 빙상에서 마주친 끔찍한 스크라엘링 무리는 외국인임에도 자신을 써 준 루페르트에 대한 감사를 능히 덮어 버릴 정도의 공포를 선사했으니.

루페르트는 그때마다 거부 의사를 피력했지만, 페르난도의 요구 또한 점점 구체성을 띠어 갔다.

“정착민들과 이야기한 선원들이 말하더군요. 정착지 안에 돈이 될 물건은 하나도 없다고. 제국과 연락이 끊어지고 기근이 닥쳤을 때 저 아서 픽튼이라는 자가 역정을 내며 제국에 바칠 사치품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페르난도의 표정엔 불만이나 불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합리성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점에서 루페르트는 대황후의 충고를 깊이 되새겼다.

‘이래서 외국인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군.’

외국인에게 정착민 몇 명의 죽음 따윈 관계없는 사건이다.

그들이 무슨 험한 꼴을 당하건 몰살을 당하건 잠깐 묵념의 대상이 될 순 있어도 구속될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칼같이 잘라 말할 수 있다.

“남작님께서 전투를 고집하신다면 말리시진 않겠지만, 선원들은 이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는 한 사내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클로버스 주교가 있었다면 선원 상당수를 전투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겠지.’

클로버스 주교는 다른 시간 축에서 만난 사람. 정식으로 대황후의 의뢰를 받지 않는 지금은 별개의 타인이다.

선원들은 썩 괜찮은 전투원이다.

특성상 총기 사용에도 능하고 백병전에 대한 대비도 훌륭하다.

오랜 기아와 영양결핍에 시달린 정착민에 비할 바는 아니다.

페르난도와 달리 고문 슈미트 헬젠은 전투에 적극적이었다.

“스크라엘링. 책으로만 보던 그 빙상의 마물을 보게 될 줄이야. 한 마리 잡아서 해부를 해 보고 싶군요.”

슈미트 헬젠을 따르는 선원도 다수 있다.

슈미트 헬젠을 포함해 열다섯은 족히 넘는다.

상당한 전력이다.

허나 루페르트는 슈미트 헬젠을 배에 남겨 두기로 했다.

그만의 생각이 아니다.

[ 저 사람은 남겨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

오랫동안 침묵하던 여신님이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전투 중에 배가 떠나 버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나팔을 불어야 하니.

애당초 슈미트 헬젠은 페르난도를 견제하기 위해 들인 인물이다.

리히트 보덴에 도착할 때만 해도 페르난도는 믿음직한 선장이었지만, 지금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선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다른 배의 한 축, 군터 야스펠은 조용히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그가 루페르트의 방침에 적극 따르지 않는 건 명백한 사실.

루페르트는 상당한 보수를 약속하며 선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전투에 투입하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저 망루 위에 서서 스크라엘링을 감시하는 십 대 소년 선원 이외엔 아무도 뭍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루페르트와 아서 픽튼이 전투 준비를 하며 동분서주하는 동안 스크라엘링 무리는 더욱 가열차게 그 숫자를 불렸다.

“못해도 천 마리는 족히 넘을 거 같네요.”

선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에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이렇게 많습니까?”

아서 픽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숫자가 불어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들의 본진은 저 까마득한, 말 그대로 빙하로 뒤덮인 바다 건너의 영구 동토거든요.”

“지금까지 어떻게 버틴 겁니까?”

정착민 수의 숫자는 이백 남짓.

제대로 된 전투원은 여성을 포함해 절반에 불과하다.

“제가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아서 픽튼은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하고 강한 힘의 소유자다.

손가락이 몇 없지만 무기를 쥐는 자세나 사람들을 가르칠 때 힘참은 확실히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상당한 강자다.

하지만 그 혼자서 저 많은 무리를 상대할 수 없다.

당장 도펠죌트너인 마를로네마저도 숫자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우두머리가 있습니다.”

아서 픽튼이 조용히 적들의 비밀을 말했다.

“우두머리요?”

“네. 스크라엘링. 저 저주받은 자들에겐 전투 무리를 이끄는 족장 같은 게 있지요. 그놈만 쓰러뜨리면 저 마물들은 왕겨처럼 흩어집니다.”

아서 픽튼이 무너져 가는 예배당 지붕 위로 루페르트를 데리고 왔다.

아서 픽튼의 억센 손이 눈 덮인 가죽을 벗겨 냈다.

“이건?”

가죽 안엔 거대한 석궁이 숨겨져 있었다.

“발리스타라는 고대의 무기입니다. 룸인들의 무기지요.”

정착민 장정 두 명이 거대한 화살을 힘겹게 들고 올라왔다.

아서 픽튼은 그 거대한 화살을 손가락 3개밖에 없는 한 손으로 가볍게 잡으며 발리스타의 장전대에 올려놓았다.

“이 녀석으로 우두머리를 관통했죠.”

아서 픽튼이 장전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지만 상박이 터져나갈 정도로 육중한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철컥-

발리스타의 장전이 완료됐다.

아서 픽튼은 그 거대한 고정 포대를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돌리며 사각을 보더니 힐끗 뱃전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함께 데리고 온 분 중에 도펠죌트너가 있던데.”

“두 명입니다.”

“…….”

아서 픽튼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전장에서 황제의 검은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동료지요. 그런데 그중 하나. 저 배에 타고 있는 사람.”

“그의 이름은 베르크 란입니다.”

“베르크 란이라.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인데 아무튼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군요.”

“과거에 철혈대제 아래서 복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어쩌면 그때 함께 전장에서 싸웠던 도펠죌트너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서 픽튼의 얼굴엔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제에 대해 잘 아십니까?”

“선제 말입니까?”

아서 픽튼의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번뇌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으리라.

“글쎄요. 제가 그분을 옆에서 모시긴 했지만,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잔인한 통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잔인하고 비정했죠. 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좋았습니다. 늘 승리했고 늘 성공했죠. 그 과정에서 늘 희생이 있었지만, 그분을 믿고 따랐습니다. 우리 같은 자에게 승리만큼 신뢰감을 안겨다 주는 과실은 달리 없었으니까요.”

승리를 말하는 사내의 얼굴엔 그러나 짙은 패배감이 묻어 있었다.

“……정작 자신이 희생양에 오르기 전까진 말이죠.”

루페르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모호함이 젊은 황제의 몸을 달게 했다.

‘철혈대제.’

루페르트는 한 사내를 생각했다.

홀로 영원한 시간의 틈바구니에 앉아 있던 노인을.

* * *

스크라엘링의 결집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밤이 찾아왔다.

“배로 피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오늘 밤, 놈들이 공격을 시작할 것 같으니까요.”

아서 픽튼이 대피를 권고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결심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함께하겠습니다.”

“……남작님.”

이쪽도 생각은 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그것이 루페르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보험으로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두 도펠죌트너를 모두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전투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둘이 시간을 끌어 주는 이상 회귀를 할 찬스는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설령 여기서 패하더라도 놈들의 약점을 알아가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같은 사건의 반복뿐이다. 책갈피로 회귀의 수고로움을 덜었다고 하나, 같은 사건을 경험하는 건 지루한 일이니까.’

때까치호의 증원은 없었다.

루페르트와 도펠 죌트너가 전부다.

자원했던 두 명의 견시원도 나이 지긋한 선원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배로 돌아갔다.

루페르트는 그것까진 말리지 않았다.

허나 명백히 전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전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보트 한 척이 때까치호에서 어두운 부둣가로 힘차게 노를 저어 왔다.

한 무리의 선원이 배에 탑승하고 있었다.

한 사내가 선원들을 이끌고 왔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자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은?’

“남작님에게 인사드립니다.”

고급 선원은 회귀 전과 같은 사람으로 채워 넣었지만, 선원까지 동일하게 채워 넣는 건 불가능했다.

일부는 다른 배를 타고 있고 일부는 다른 지역에 있었으니.

절반 정도는 같은 인원으로 구성했지만, 나머지는 새로 구해야 했다.

문제는 시간.

루페르트는 전처럼 일일이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하는 대신 전과가 없고 의심 가는 경력이 없는 선에서 빠르게 인원을 선발했다.

이 강한 동부 억양을 지닌 사내는 그 새로운 선원 중 한 명이다.

루페르트는 이 낯선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매부리코에 주걱턱, 구부정한 허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지만,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짙은 갈색 눈동자엔 묘한 매력이 있다.

“다들 전투를 꺼리는 눈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노르드마르크 뱃놈 특유의 동료 의식에 묶여 전투를 원하면서도 몸을 사리던 친구들이 있었죠.”

동부 억양이 강하게 배어든 목소리는 탁하고 흐릿했지만, 눈동자처럼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대의 이름은?”

루페르트가 물었고 선원이 대답했다.

“만슈타인입니다.”

‘만슈타인.’

얼굴은 모르지만,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그럴 만한 포인트가 있다.

‘이 친구였나. 대학을 다녔다는 친구가.’

중퇴생이라고 들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를 해 배를 탈 정도면 제대로 된 인생은 살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대학생처럼 공부는커녕 술만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나 저 무지렁이 선원 집단 가운데서는 능히 엘리트로 자부할 수 있는 학식 정도는 갖추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 얼음 굴에 급료나 벌자고 온 건 아닙니다. 더 큰 기회를 찾기 위해 온 거죠. 해서 남작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이 사내.’

보통내기가 아니다.

만슈타인에겐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오로지 자신을 무한히 신뢰하는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그러한 광휘가 말이다.

황제 시절 그러한 인간들을 본 적이 있었다.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도 늘 무대의 구석에 있던 그와 달리, 광휘를 두른 사람은 역사의 무대 중심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검을 휘둘렀으며 화려하게 퇴장했다.

그 만슈타인에게 특별함을 느낀 건 루페르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어머. ]

리프니에가 탄성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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