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10. 얼음 속에 숨겨진 것 (1)
총독의 태도는 완강했고 총독에 대한 주민의 지지 또한 굳건했다.
아서 픽튼이 명하자 주민들은 누추한 집으로 돌아갔고, 그것으로 제국과 리히트 보덴 사이의 연결도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예상 밖의 사태에 루페르트 일행은 선박에 돌아가 머리를 맞대야 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는 제거돼야 합니다.”
“그가 반역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죽여 버립시다.”
중론은 아서 픽튼의 제거를 요구했다.
온화한 의견도 아서 픽튼을 체포하고 제국에 압송, 제국 법원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론에 있어서는 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의견이다.
‘확실히 아서 픽튼 하나를 없애는 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주민들이 아서 픽튼을 따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도 제국인이며 외부에 대한 동경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충성심이든, 아서 픽튼에 대한 공포건 총독 하나가 사라지면 주민들은 순한 양처럼 루페르트 일행에 복종할 것이다.
“검이 필요하다면.”
여간해선 입을 열지 않는 베르크 란이 어둠 속에서 눈을 번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입을 열자, 그와 그의 손녀를 제외한 모두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섬뜩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볼 것도 없다.
베르크 란이 나선다면 아서 픽튼은 쉽게 죽을 것이고 주민들은 다시 제국에 복종할 것이다.
선장을 위시한 간부진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한 구도에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
그러나 루페르트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확실히 저 사내 하나를 죽인다면 식민지는 확보할 수 있겠지. 스크라엘링과의 싸움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야. 그러나.’
눈에 밟히는 게 있다.
어둡고 춥고 습한 눈구덩이 안.
루페르트는 저 베르크 란의 뒤에 서 있는 소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시체를 헤집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해 주던 한 사내의 거룩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기억한다.
아서 픽튼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제국 총독이라는 걸 증명하는 신물을 몸에 품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행동은 어쩌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늙어 가는 거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나의 세상을 지키다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이겨 내지 못하고 죽임당했다.’
그 삶의 형태는 회귀 전 루페르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루페르트는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처형 혹은 압송을 원하는 눈동자들이 그를 향한다.
루페르트는 그 무수한 눈동자 중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흐릿한 안개를 두른 듯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베르크 란의 뒤에서 그의 손녀 또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모두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쳐 간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소녀의 눈동자엔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빙상 위에 뭔가 있다! 뭔가 보인다!”
마스트 위에서 해상 및 지상을 감시하던 견시원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으로 빙원 저편을 주시했다.
익숙한 마물들이 보인다.
루페르트의 미간이 깊은 주름이 팼다.
‘역시 현재 시점에도 스크라엘링은 활동 중인 모양이군. 아직 정착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 이르지 않았지만, 얼마 남지 않았겠지.’
정착지에서도 이를 알아차린 눈치다.
무너진 종탑에서 쇠바가지를 긁는 듯한 탁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눈 덮인 폐허에서 정착민들이 잡다한 무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들의 무기는 조잡하고 행색은 걸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습은 그들이 이런 상황에 익숙하고 오랫동안 훈련되어 왔음을 말해 줬다.
“꽤 익숙한 것 같군요. 이 사람들.”
한스 징펠만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허나 스크라엘링은 결코 만만치 않은 적수인데.”
베르크 란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 있었다.
쇠못을 박은 클럽, 낡은 검, 반 토막이 난 창.
화기는커녕 쇠붙이부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빙상에서 철을 캐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철이라는 건 나무처럼 소모되는 법이니.
부족한 불은 짐승의 지방으로 대체한다고 하지만 철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대황후는 철괴를 가득 실을 걸 주문한 것이다.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는 못 버티겠군.”
그의 손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조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공포감과 불만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런 곳까지 왔는데 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마물만 한가득이라니.”
“빨리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저 인간들 자기 입으로 제국인도 아니라면서?”
웅성임 속에서 루페르트가 선장에게 명했다.
“보트를 준비해 주시오. 다시 한번 총독을 만나 보겠습니다.”
의아한 눈빛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꽂힌다.
흐릿하지만 명백한 불평도 귀에 들려온다.
슈미트 헬젠이 선원들의 입장을 대변해 직접 루페르트 앞에 나섰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얼굴엔 일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고 뒤이어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의 뒤를 지키듯이 섰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 호위로는 당신 손녀 정도면 충분할 거 같군요.”
손녀라는 말을 듣자,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미묘한 일렁임이 떠올랐다.
“당신은 한스 징펠만 엽사와 더불어 이 배 쪽을 예의 주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베르크 란이 손녀에게 손짓했다.
루페르트가 떠나가려는 그를 향해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손녀, 이름이 뭐죠?”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에 루페르트는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시선을 돌리진 않았다.
짧고 강렬한 시선의 부딪힘이 있고 난 뒤,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를로네.”
“마리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루페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베르크 란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 후 선장에게 다가갔다.
한편 그의 손녀는 명백한 불쾌감을 담아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살이 에는 듯한 싸늘함.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피한 후, 선원 몇 명과 함께 보트 위에 올라탔다.
다시 뭍에 오르자 무기를 든 정착민들의 시선이 루페르트에게 꽂힌다.
적대적이라기보다는 갈등하는 눈초리.
루페르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서 픽튼의 명에 절대복종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원의 동아줄인 루페르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라면 모를까 명백한 위기가 드리워진 지금이라면 해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정착민들을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총독님을 뵙고 싶습니다.”
총독과의 재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아서 픽튼 자신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이니.
* * *
총독과의 두 번째 만남은 그의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관저라기보다는 눈에 파묻힌 폐허에 가까웠지만, 군데군데 사치스러움이 퇴적물처럼 남은 복도의 세련된 흔적이나 낡은 집기들은 한때 이곳이 부유함으로 이름을 떨친 리히트 보덴의 총독 관저라는 걸 흐릿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몇 없는 총독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은 바깥보다 더 춥고 으스스했지만 아서 픽튼은 외투를 벗은 채 제국의 불청객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오?”
아서 픽튼이 말했다.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단호함은 희미해진 상태였다.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만, 그조차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크라엘링.”
마물의 이름이 나오자 아서 픽튼이 고개를 돌려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냐는 놀라움이 주름진 눈동자 안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빙해의 마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무리를 이루어 인간을 공격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의 곤란을 기회로 삼으려는 거요?”
아서 픽튼은 여전히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다.
부쩍 높아진 언성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루페르트는 그런 총독을 가만히 노려볼 뿐이다.
“묻겠습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총독으로서 당신은 이 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작고 희미하지만 단호한 꾸짖음이 차가운 실내를 흔들었다.
아서 픽튼의 눈동자 또한 가볍게 흔들렸다.
‘이 사람.’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표현해야 할 나이인데 이 정도 기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궁색함을 느끼며 아서 픽튼은 오랫동안 마주치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 버렸다.
“당연히.”
“당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진지하게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가 재차 물었다.
첫 물음에 꾸짖음에 가까웠다면 두 번째 물음엔 이해할 수 없는 절박함이 간절하게 느껴진 것이다.
‘뭐지?’
아서 픽튼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자기 백성도 아닌데,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총독의 감정과 관계없이 루페르트의 물음은 계속됐다.
“당신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당연하오.”
시선을 돌린 채 아서 픽튼이 인상을 쓰며 답했다.
“무엇으로?”
“무슨 뜻이오?”
아서 픽튼의 눈썹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무기도 사람도 병사도 부족한데. 당신이 모두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스크라엘링의 공격을 잘 버텨 왔소.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건 오만입니다.”
아서 픽튼이 다시 고개를 돌려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오만이라니.”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
“당신이 위기를 느끼지 않았다면 나를 다시 만났겠습니까?”
“…….”
잠깐 노기를 드러내던 아서 픽튼은 고개를 숙였다.
진한 한숨이 거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왔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인정한 것이다.
지금 상황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라는걸.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인정해서는 안 된다.
외부인은, 특히 제국인은 이 땅에 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총독은 보았다.
“전부 다 죽은 뒤에 후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진심을 담은 한 사내의 눈동자를.
‘이 사람.’
아서 픽튼이 느낀 건 진한 슬픔과 후회다.
그 나이대 젊은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러한 회한.
‘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부탁입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쪽을 돕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서 픽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깥에서 웅성임이 들려온다.
잠시 의식하지 못했던 발작적인 종소리 또한 다시금 의식을 파고든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총독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이제 총독의 눈동자 안에서 적대감과 의심은 찾아볼 수 없다.
빈자리를 채운 건 두려움이다.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소이까?”
“죄라니요?”
“약속할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아서 픽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십시오.”
그가 루페르트를 데리고 간 곳은 루페르트가 잘 아는 장소다.
시체구덩이다.
회귀 전처럼 시체의 수는 많지 않지만, 꽤 많은 시체들이 얼어붙은 상태로 어둡고 눈으로 뒤덮인 구덩이 안에 방치되어 있다.
루페르트의 옆을 지키던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곧 선명한 경멸이 그녀의 눈동자 위에 떠올랐다.
아서 픽튼이 고개를 숙였다.
“도펠죌트너는 역시 알아보는군. 죽음의 냄새를 맡는 자들이니.”
“…….”
아서 픽튼이 마리를 어려워하는 걸 알자 루페르트는 그녀에게 잠시 바깥에 나가 있을 걸 명했다.
그녀가 구덩이를 떠나자 아서 픽튼이 시체 한 구를 가리켰다.
“이걸 보시오.”
루페르트는 시체를 보았다.
“이건.”
시체의 몸에 상처가 나 있다.
평범한 상처가 아니다.
엉덩이와 넓적다리 쪽에 인위적인 상처가 나 있다.
마치 고기를 먹기 위해 잘라 낸 것 같은.
“가장 어려울 때 우리는 죽은 가족들을 먹었소. 아버지가 아이를, 아이가 어머니를, 형제가 형제를.”
아서 픽튼이 등을 보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나, 호라 교단이 안다면 우리는 모두 화형대 위에 오르겠지. 식인은 중죄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깨달았다.
왜 총독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움을 거절했는지.
‘이것 때문에 우리를 배척한 것인가.’
헛웃음이 나온다.
식인이 중죄인 건 맞다.
호라신이 금지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이들이 감당해야 했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그는 호라의 신도가 아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리프니에의 사도다.
거구를 축 늘어뜨린 총독을 향해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아서 픽튼이 돌아서며 루페르트를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당신들이 식인이라는 죄악을 저지를 정도로 방치한 신의 잘못이지요.”
“!!”
이 얼마나 이단적인 발언인가.
이쪽이 계율을 어겼다면 저쪽은 드러내 놓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중죄인지는 명실상부하다.
계율의 위반보다 신성 모독은 언제나 더 큰 죄악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모독을 저지르고도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을 뿐이다.
“이 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까.”
“다, 당신은 대체?!”
“물론 당신들의 비밀 또한 지켜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이름을 걸고.”
거구의 총독은 주저하다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합쳐서 손가락이 10개가 되지 않는 손이 서로 굳게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