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8. 세계의 끝 (1)
축제의 끝엔 건조한 일상이 기다린다.
위버하임 장원으로 돌아온 루페르트는 저택에 칩거하며 평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붉은 명찰을 단 사내와 금발의 소년이 저택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전처럼 당당하게 서서 한 끼 식사를 청했다.
세바스티안을 비롯한 저택의 고용인들은 그들을 꺼렸지만, 루페르트만큼은 그 이방인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식사가 끝난 후 루페르트는 그들을 응접실에 초대했다. 베르크 란과 그의 손자는 천과 쿠션을 덧댄 푹신한 의자에 앉아 향긋한 차와 달콤한 과자를 대접받았다. 베르크 란은 찻잔에만 손을 댔지만, 그의 손자는 달콤한 과자에 환장했다.
“이거 다 먹어도 돼?”
“……하나만 남겨 둬라. 위에 딸기를 얹은 녀석만.”
“그거 내가 먹으려고 점찍은 건데!”
루페르트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초로의 사내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고 찻잔을 음미했고 소년은 정신없이 과자를 먹어 치웠다.
루페르트와 함께 들어온 하녀가 껄끄러운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며 루페르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자를 좀 더 가지고 올까요?”
“한창때니 많이 먹어 두는 게 좋겠지.”
“한창때는 아닌 거 같은데요.”
로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 아이. 여자아이 같단 말이죠.”
“그래?”
“저희 하녀 다수의 생각이랍니다. 뭐, 벗겨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지만 말이죠.”
‘누가 저 괴물을 벗길 수 있을까.’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소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확실히 곳곳에서 여성적인 흔적이 보인다.
앳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그저 톤이 높은 것 같고 울대가 툭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니.
‘뭐,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 중요한 건 저 도펠죌트너가 찾아온 목적이겠지.’
새로운 과자가 준비된 후, 루페르트는 하인들을 물렸다.
응접실엔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 일행만이 남았다.
베르크 란은 말없이 대뜸 루페르트에게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서찰의 겉봉엔 어떤 알아볼 수 있는 문양도 인장도 없었지만 루페르트는 그것이 누가 보낸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서찰을 개봉해 내용을 살폈다.
급하게 갈겨 썼지만,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글씨가 종이 위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 빙해 서쪽, 잿더미 섬 너머 리히트 보덴이라는 이름의 잊힌 개척지가 있다. 동봉한 자금으로 선단을 꾸려 그곳으로 향하라. 그리고 선제의 이름으로 그곳을 수복하라. ]
편지의 말미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 다만, 개척지가 멸망, 더 이상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경우엔 그냥 돌아와도 무방하다. ]
루페르트는 편지 안에 동봉된 고액의 어음을 발견했다.
루페르트는 어음에 찍힌 금액의 단위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100만 탈러라고?’
위버하임 장원의 1년 수입은 6만 탈러.
메헨부르그의 야수에 걸린 현상금도 10만 탈러를 넘지 않았다.
100만 탈러라는 돈은 대영주라고 칭할만한 부유한 영주의 1년 수입에 준할 정도의 금액이다.
그런 거금을 안젤리나 대황후는 선뜻 루페르트에게 제공한 것이다. 물론 슈발츠마인 영지 전체 세입을 놓고 보면 100만 탈러라는 금액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루페르트는 현재 자신과 대황후 사이에 놓인 힘의 격차를 어음에 기재된 0의 숫자만으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대황후의 선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분께서 당신을 리히트 보덴까지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젤리나는 루페르트에게 막강한 도펠죌트너들을 수행원으로 제공했다.
황궁의 정원에서 루페르트는 이미 그들의 힘을 보았다. 게다가 루페르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대황후는 서신의 끝머리에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을 반드시 동행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그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수행원임과 동시에 감시자도 겸한다는 건가.’
아무래도 좋다.
적어도 적은 아니니까.
게다가 목적지는 인간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무시무시한 땅이다.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에게 다음 목표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리히트 보덴?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빙해에 접한 제국의 최북단 영지, 노르드마르크 사람인 그는 아주 어릴 때 간간이 언급되던 잊힌 땅의 먼지 덮인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직 대제라는 위명을 얻기 전, 클라우데 2세는 많은 모험가와 항해자들을 고용해 알려지지 않는 빙해 너머의 세계 탐험을 주문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섬이 발견됐고, 클라우데 2세는 제국의 이름으로 그 섬들을 식민화했다. 리히트 보덴이라 불리는 거대한 섬도 그중 하나다.
그 개척지는 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국령이었다. 일주일에 달하는 시간 동안 거친 풍랑이 불어닥치고 배를 산산조각 내는 유빙이 떠다니는 빙해를 꼬박 항해해야 이를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다.
클라우데 2세는 많은 돈과 자원을 들여 리히트 보덴에 교회와 농장을 건설했고, 결국 그곳을 제국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10년 전, 당시 얼음의 섬이라 불렸던 빙해 최대 개척지가 어마어마한 화산 폭발로 말미암아 깡그리 사라진 이래 리히트 보덴 개척지와 제국의 연결은 끊어졌고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다.
그것이 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국령의 알려진 최후다.
‘더 이상 인간의 흔적이 없을 경우 빈손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내용은 이를 감안한 내용이었군.’
항해와 탐험에 있어 문외한에 가까운 루페르트의 눈에도 쉽지 않은 임무다.
대황후는 공언한 것처럼 쉽지 않은 시련을 내려 줬다.
한스 징펠만도 임무의 위험성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빙해는 극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북부인, 심해의 괴수 같은 위험천만한 것들이 우글거리는 건 물론이고 바다 그 자체가 인간의 접근을 반기지 않죠. 저 같은 생사를 도외시한 사람에겐 적합한 임무지만, 남작님에게 어울리는 임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루페르트도 임무의 위험성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황후가 그에게 내린 시험이다.
이보다 더한 것도 각오하고 있었던 루페르트에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 대황후는 100만 탈러라는 거액과 강력한 수행원까지 딸려 보내지 않았던가?
싫다 좋다를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루페르트는 즉시 빙해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한스 징펠만이 리히트 보덴으로 향할 선박편을 알아보기 위해 노르드마르크로 떠났다.
루페르트는 그동안 신변 정리에 나섰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가정교사들에게 장기간의 부재를 알렸고, 재산 목록과 필요한 행정 사항을 준비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궁내부로 가서 여행 계획을 보고하는 것이다.
루페르트가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올랐을 때 그의 의무 중 하나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행위, 대표적으로 전쟁의 참가나 알려지지 않은 땅에 여행 혹은 원정에 갈 때 이를 궁내부에 관할 부서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보고 절차는 상상외로 간단했다.
간단한 통지만으로 완료된 것이다.
황궁을 나서는 길에서 루페르트는 이제는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고어문트 궁중백, 선제후 골트문트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음에도 수려함을 잃지 않은 이 미남자는 웃음기 띤 얼굴로 먼저 루페르트에게 말을 건넸다.
“빙해엔 뭘 찾으러 가는 건가?”
호의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루페르트는 이 사내가 자신의 적이라는 걸 마음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증거는 없지만, 황궁 안에서 빌헬미나 패거리가 그를 습격한 것도 어쩌면 이 사내가 사주한 일인지도 모른다. 궁내부를 손에 틀어쥔 그는 황궁 안에 작은 장난을 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의 적수가 아니다.
루페르트는 그 모든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황제 시절 습득한 감정의 가면을 쓰고 골트문트를 상대했다.
“저는 다른 후보처럼 물려받을 재산도 뒤에서 지지해 줄 만한 배경도 없습니다. 없다면 스스로 찾아 나서야죠.”
이에 골트문트는 씨익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 위에서 행운을 찾기를.”
이것으로 대강 위버하임에서 할 일은 끝이 났다.
그다음 할 일은 두 명의 도펠죌트너와 함께 노르드마르크 최대의 항구 뒤셀하펜으로 향하는 것이다.
통상 상회에서 발행한 어음은 그 상회가 지닌 모든 점포에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지만, 대황후가 제공한 100만 탈러짜리 어음은 특이하게도 하스 상회의 뒤셀하펜 지점이라는 특별한 지급인을 지정하고 있었다.
즉, 루페르트가 어음을 온전한 가치를 지닌 통화로 환전하기 위해서는 뒤셀하펜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차피 뒤셀하펜은 어음과 관계없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었다. 노르드마르크의 최대 항구인 그곳에는 많은 뱃사람과 선박이 상주하고 있기에 리히트 보덴으로 향할 배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들러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위버하임 장원으로 돌아온 루페르트는 막바지 준비를 했다. 필요한 짐과 옷가지를 챙기고 노르드마르크로 향할 마차를 준비했다.
세바스티안이 시중을 들 하인을 알아보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루페르트는 거절했다. 괜히 고용한 하인이 골트문트의 첩자일 수도 있고, 루페르트 본인이 누군가의 시중을 받기보다 혼자 직접 하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다.
노르드마르크로 출발하기 전,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남작님. 사당이 드디어 완공됐어요!”
임시 사당지기를 맡은 피리스가 밝은 표정으로 희소식을 전했다.
누구보다 기뻐한 건 루페르트가 아니라 그가 목에 걸고 있던 여신님이었다.
[ 어머! ]
한동안 긴 침묵에 들어갔던 리프니에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루페르트가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완공된 신전으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제를 위한 사당이라 쓰고 리프니아 여신을 위한 신전이라 읽는 새로운 건조물의 첫인상은 정교하게 세공된 작은 장신구를 연상케 했다.
크기와 규모는 도시의 건물 위에 우뚝 서서 아래를 굽어보는 예배당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지만 완벽한 대칭성과 구조, 사이사이 오밀조밀하게 꽉 찬 과하지 않을 정도의 장식물은 새로운 건조물에 아름다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 흐음. 여전히 조촐하긴 하지만 뭐, 당신 능력이 아직 이 정도밖에 안 되니까! ]
리프니에의 점수는 대략 백 점 만점에 80점 정도로 추정된다.
[ 지금부터 이곳을 새로운 저의 영역으로 선포하겠어요. 기존의 허름한 토굴을 밀어 버려도 좋아요. ]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신전에서 물리게 했다.
홀로 남은 신전 안에서 루페르트는 새로운 제단 위에 소라고둥을 올려놓았다.
“으음. 스테인드글라스는 내 취향이 아닌데요? 저 같은 고대의 존재에겐 빛과 그림자라는 태고의 장식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즉각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신님이여.”
“급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순간 끈적한 무언가가 발밑에서 기어오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이것은……?!’
한스 징펠만의 영혼 동맹 효과인 위기 감지다.
다음 순간, 위기의 원인이 밝혀졌다.
“전에 꽤 큰돈을 손에 넣은 거 같던데. 일, 십, 백, 천, 만……. 백만이었나?”
그녀는 대황후가 루페르트에게 제공한 어음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 정도면 여기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 수도 있겠네요.”
“……?!”
루페르트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제가 싫어하는 싸구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진짜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창을 만들 수도 있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눈앞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여신님이여. 여신님은 빛과 그림자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가끔은 멋도 내야죠.”
“하오나 그……. 그 돈은…….”
그 돈은 대황후의 시험을 해결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돈이다.
리프니에 입장에서야 그 돈으로 신전을 짓고 다시 회귀를 하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당사자인 루페르트에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횡령한 돈으로 만든 신전이 완공되기도 전에 빨간 명찰을 단 조손에게 죽임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속이 좁은 여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한 번 삐치면 최소 몇 개월은 간다.
루페르트의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안절부절못하는 왕년의 황제이자 황제 후보를 보며 소라고둥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불만인가요?”
“그, 그게 조금…….”
“흐-음.”
소라고둥은 뭔가 불만에 찬 기운을 내뱉으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루페르트에겐 그야말로 고통의 시간.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리프니에가 다시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죠. 저는 자비로운 여신이니까 이번만큼은 당신의 사정을 들어주도록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신님이시여.”
“그 대신, 다음에 큰돈을 손에 넣으면 제 동상을 만들어 주세요.”
“동상 말입니까?”
“황금 혹은 그보다 귀한 금속으로 만들면 좋겠네요! 뭐, 여의치 않으면 대리석이라도. 하지만 눈처럼 무늬가 없는 대리석만 허락할 예정이랍니다.”
“사…… 사정이 허락하면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허름하나마 저에게 새로운 신전을 바친 그대를 위해 작은 선물을 내리도록 하겠어요.”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루페르트 앞에 환한 빛이 번졌고, 빛이 사라지자 그 앞에 손바닥보다 작은 모래시계가 나타났다.
루페르트가 그 모래시계를 손에 올린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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