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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29화 (29/225)

29화 9. 세계의 끝 (2)

“이 능력은 대체 무엇입니까?”

루페르트의 손안에 오동나무로 만든 것 같은 기이한 책갈피가 나타났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눈으로 보이고 촉감도 느껴지지만, 영혼 동맹의 카드처럼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신적인 물건이리라.

“시간을 거스른다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사건이겠지만, 인간이란 건 의외로 빠르게 질리는 동물이랍니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두 번째 회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없나요?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며 같은 일을 진행할 때 말이죠. 가령 예를 든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룸어 공부?”

“아, 그건.”

회귀 이후 에르바하 교수와의 첫 만남은 퍽이나 자극적인 사건이었다.

다시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건강을 잃을 정도로 공부를 했고 결국 그들의 인정을 받아 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자부할 만한 사건이었다.

허나 두 번째 회귀에서 에르바하 교수와 나머지 가정교사들은 깊은 감명을 주진 못했다.

그저 지나가는, 해야만 하는 의례라고 할까.

이미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배울 만큼 배웠고, 충분히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노래를 두 번 듣는 것도 은근한 짜증이 느껴지는데 같은 수업을 두 번 받는 건 어떠하겠는가.

확실히 전에 없던 권태감을 느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경험한 모든 것의 반복은 처음 경험했을 때보다 모든 면에서 열화된 상태였다.

“무뎌진다는 건 아주 위험한 징조지요. 같은 사건의 반복은 당신을 비단 무뎌지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시간의 권태감이라는 좋지 않은 선물을 준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첫 회귀만 해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상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몸으로 겪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달은 경험은 루페르트에게 엄혹한 현실을 속삭였다.

거듭되는 회귀라는 것은 자신에게도 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갈피는…….”

“어렴풋이 짐작했겠지만, 회귀 지점을 특정 시간대에 묶을 수 있는 아티팩트랍니다.”

“특정 시간대에 말입니까?”

“운명을 가를 사건, 혹은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 지어지는 결전을 앞두고 회귀 지점을 정해 두는 것이지요. 그 책갈피는 당신이라는 이름의 운명의 책에 이정표를 새길 거예요. 당신이 무의미한 사건을 반복하지 않아도 중요한 일을 반복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것이 시간의 책갈피……!!”

확실히 매력적인 아티팩트다.

통찰의 만화경처럼 특정 상황을 변화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지만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한스 징펠만을 구하기 위해 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이번 아티팩트의 가치는 자명하다.

‘확실히 도움이 되는 아티팩트다.’

“이 책갈피는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나요?”

“음. 여러 번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책갈피는 하나랍니다.”

“그 말씀은?”

“네, 당신은 당신이라는 운명 속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간대만을 저장할 수 있답니다. 어느 때가 중요한 고비인지는 당신이 정해야 할 문제겠지요.”

“그렇군요…….”

조금은 아쉽다.

솔직히 책갈피의 가장 큰 장점은 귀찮고 번거로운 사건들을 지나쳐서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편리함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어느 때가 중요한 순간인지 자신이 판단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의 책갈피가 더 있었으면 하는데.’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가만히 루페르트를 내려다보더니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이미 완결된 과거 속에서 더 이상 개선할 사안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시작 지점을 바꿔 버리는 방법도 있답니다.”

“네?!”

“지루한 룸어 수업이니, 가정교사니, 하녀와의 알력이니 그런 귀찮은 사건이 해결된 시점을 원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네. 하지만 그 경우, 당신은 지워진 원점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 다시 말해 새로운 원점 이전으로는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원점을 다시 설정하는 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군요.”

“정하는 건 당신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수레바퀴 위에 올라선 건 제가 아니라 황제인 당신이니까요.”

루페르트는 새로운 아티팩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로운 회귀 원점.

그리고 간이 원점의 지정.

두 개의 시간 축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

이 중 새로운 회귀 원점은 리프니에에게 말했다시피 신중하게 정해야 할 것이다.

잘 살펴보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고, 더 이상 개선할 게 없는 상황이 확인된 이후에 정해도 늦지 않다.

보다 자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건 책갈피의 원래 기능인 시간대의 저장 기능이리라.

‘황제가 된 이후,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곧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한 지는 황제인 루페르트조차 알 수 없었다.

전쟁 당사자인 선제후들의 정치 공작은 뭐가 진실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정보만을 안겨다 줬으니.

일각엔 레벤호스트가 먼저 군대를 일으켜 침공했다는 설이 있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골트문트가 레벤호스트의 영지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설도 있었으니.

누가 내전을 시작했건 간에 그 내전을 종식해야 하는 건 황제 루페르트다.

무력이든, 중재든, 아니면 정치 공작이든 어느 쪽이건 좋다.

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루페르트는 운명을 건 선택을 해야 한다.

시간의 책갈피는 루페르트가 감당할 노고를 크게 덜어 줄 것이다.

‘여신님.’

루페르트는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분한 눈동자 안엔 여신에 대한 무한한 감사함과 경배가 깃들어 있었다.

‘당신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황제 시절 아무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지 않았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제국의 주신 호라에게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조롱과 파멸뿐이었다.

리프니에는 다르다.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실체적인 힘과 권능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그녀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루페르트는 영원히 그녀의 신도로 남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도와준 신을 어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신님.”

루페르트의 감사에 소라고둥은 우쭐거리는 것처럼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시간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소모되는 것. 그 중심에 선 당신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 거스름을 단축하는 건 당신에게나 저에게나 커다란 도움이 되겠지요?”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리프니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루페르트를 향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앞으로도 착실하게 저의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당신이 달성하는 퀘스트가 많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이상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요.”

* * *

모든 준비가 끝난 후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장원을 떠났다. 도리안 비하스와 빌헬미나가 사라졌기에 위버하임 장원을 위협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는 배웅 나온 하인들의 손짓을 받으며 위버하임 장원을 떠났다. 가장 멀리까지 나온 것은 피리스였다.

“무사히,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눈물까지 보이는 피리스를 향해 루페르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것은 피리스에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에게 말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대황후의 시험을 통과하겠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할 생각도 없다.

빙해 너머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루페르트는 이번 시험에 사활을 걸고 이겨 낼 것이다.

루페르트 일행을 실은 마차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신록이 피어나는 대지를 지나 루페르트는 제국 서북쪽에 자리 잡은 노르드마르크로 안전하게 나아갔다.

동행한 도펠죌트너들과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은 여행 내내 루페르트의 앞과 뒤에서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경계했다.

마침내 도착한 노르드마르크 지방은 여전히 겨울과 봄의 경계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추운 지방답게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그늘을 따라 쌓여 있었고, 개울가엔 얼음과 물이 반쯤 섞여 흐르고 있었다. 잿빛에 가까운 벌판 너머엔 해무에 가려진 검푸른 바다가 멀리서 보였다.

“앗, 바다다.”

뒤에 앉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빙해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황제 시절 노르드마르크를 들리긴 했지만, 내륙에 위치한 영지 수도가 전부였고 바다가 보이는 지점까지 가 본 적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 냄새가 섞여들 무렵, 루페르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뒤셀하펜.

룸 제국 시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항구 도시로 노르드마르크 최대의 항구이자, 빙해 상을 오가는 교역의 중심지다.

루페르트는 바위와 벽돌로 만든 항구에 크기는 물론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오밀조밀하게 정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빙해 최대의 항구 도시라 할 만하군.’

불행하게도 이 도시는 루페르트의 치세 중 북부인들에게 습격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과거에 보지 못했던 유서 깊은 항구 도시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찾은 곳은 하스 상회였다.

지배인은 이미 루페르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친절하게 그를 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전이 준비되는 동안, 하스 상회의 지배인은 루페르트에게 소개할 인물이 있다며 루페르트는 잠시 응접실에 대기하게 했다.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대황후의 안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인은 곧 높은 우관을 쓰고 치렁치렁한 로브를 걸친 젊은 성직자를 데리고 왔다.

그는 다소 여성스럽지만, 고집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 기회에 리히트 보덴 지방의 주교로 승진된 클로버스라고 합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가량. 나이에 비해 대단히 빠른 승진이지만, 서임지가 리히트 보덴인 걸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승진이다.

‘주교라.’

그건 그렇다 쳐도 의외의 인물군이다.

루페르트는 대황후가 준비한 인물이 필경 노련한 항해자나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는 대황후의 안배를 이해하고 내심 속으로 경탄했다.

‘리히트 보덴까지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전제하에 이 사람만큼 유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일수록 종교가 갖는 힘은 커진다.

리히트 보덴은 10년간 연락이 끊긴 지역.

과거에 파견된 주교는 나이가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노환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새로운 주교를 보낸다는 것은 장기간 방치됐던 오지의 주민들에게 제국이 아직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표이자, 주교를 통한 지역 장악에도 유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기꺼이 클로버스를 환영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난 후 클로버스는 주위를 살피며 루페르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황후께서 남기신 전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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