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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27화 (27/225)

27화 7.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5)

금발의 소년은 양 떼 속에 들어간 늑대처럼 사내들을 도륙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명이 죽어 나뒹굴었다.

붉은 명찰을 단 초로의 사내는 널브러진 시체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도리안 비하스 쪽이었다.

“어이! 지금 뭐 하는……!”

도리안 비하스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초로의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스틱을 그대로 그의 쩍 벌린 입 안에 꽂아 넣었다.

푹.

스틱은 도리안 비하스의 입천장을 뚫고 들어가 그대로 그의 뇌에 박혔다. 비대한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더니 동공에 초점을 잃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꺄아아아악!”

빌헬미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내뺐다.

루페르트가 쫓으려 하자 붉은 명찰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하스에 입 안에 박힌 스틱을 빼내어 그대로 빌헬미나를 향해 집어 던졌다.

부친의 피와 뇌수가 묻은 스틱은 이번에는 그녀의 후두부를 뚫고 들어갔다. 빌헬미나는 돌팔매를 맞은 개구리처럼 경련하더니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눈 깜짝할 시간에 암살자들이 전멸했다.

금수처럼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눈을 지닌 소년은 아직 숨이 붙은 사내를 향해 검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처형을 끝낸 그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명랑한 곡조의 휘파람을 불며 뒤돌아섰다.

한편 초로의 사내는 넓은 보폭을 지닌 걸음으로 빌헬미나의 시체로 다가가 그녀의 뒤통수를 군홧발로 짓밟으며 힘을 가해 스틱을 빼냈다. 스틱엔 두 사람분의 피와 뇌수가 묻어 있었다.

“…….”

초로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빌헬미나의 옷에 스틱에 묻은 이물질을 문질러 닦고는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지요.”

많은 의문점이 있다.

그것도 하나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의혹들이 말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지금은 그 의문을 덮어 뒀다.

그는 말없이 붉은 명찰을 단 사내의 뒤를 따라나섰다.

정적에 싸인 숲속을 걸어가며 루페르트는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 사내의 이름이 뭐였더라. 베르크 란이라고 했던가?’

루페르트는 곁눈질로 붉은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그가 생각한 게 맞다.

루페르트는 다음으로 사내 옆에 터벅터벅 걷는 소년을 눈에 담았다.

결코 평범한 꼬마는 아니다.

그 움직임, 속도, 힘은 기록상에 전해 내려오는 도펠죌트너의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잔혹성과 살인에 대한 무감각은 저 초로의 사내에게 물려받은 것이겠지만.

‘대체 이자들의 정체는 뭐지?’

베르크 란과 그의 손자는 루페르트를 황궁 정원의 끝자락으로 데리고 갔다.

어둠에 싸인 들판 위에 불이 켜진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었고, 그 옆에 여덟 마리의 말이 쌍별로 묶인 검은색의 마차가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황궁에서 10년을 보냈건만 기억에 없는 장소다.

다만 여기가 방대한 황실 정원의 끝자락 어딘가라는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

“오두막 안에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이시죠?”

“당신이 알고 있는 분입니다.”

베르크 란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쳐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건 했으니까 이제 할아버지도 장군으로 돌아가겠지?”

“권력자의 약속만큼 덧없는 것도 없지.”

“알면서 왜 그러는데?”

“조용히 해라. 마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기척이 사라졌다.

“…….”

홀로 남은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둠 속에 홀연히 빛을 흩뿌리는 오두막을 눈에 담았다.

누가 저 안에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자는 적어도 당장 루페르트를 죽이려 들진 않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검은 천에 싸인 소라고둥을 손에 쥔 채 오두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낡은 문이 비명과 같은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유등에서 나오는 진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발밑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의 끝엔 그림자의 색과 분간이 가지 않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은……?!’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오두막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대황후 안젤리나였다.

명실상부한 제국의 가장 큰 어른이 뜻밖의 장소에서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대황후가 어찌하여 이런 곳에……?’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루페르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여실히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가면 안에 담긴 검은 눈동자가 루페르트를 안에 담았다. 이윽고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디찬 음성이 오두막 안을 가볍게 떨쳐 올렸다.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대황후에게 예를 표시했다.

“말씀하십시오. 대황후시여.”

대황후는 고개를 숙인 루페르트를 뚫어지게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선제후들 앞에서 제법 재롱을 떤 모양이구나.”

그제야 루페르트는 대황후 옆에 정갈한 하녀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중년 여인은 허리를 숙여 대황후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대황후의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클라인하르트 앞에서 크로지우스 이름을 꺼내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

“클라인하르트, 아니 아카이아 대주교가 젊은 시절에 어떤 짓을 한 줄 알고 있느냐?”

“잘 알지 못합니다.”

“내 부군이 피와 강철이라는 이명을 지녔다면, 그 늙은이는 불과 수레바퀴라는 이명을 지니고 있었지.”

수레바퀴라는 말을 들은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레바퀴? 설마……?’

그의 추측은 뒤이은 대황후의 말에 간단하게 부정됐다.

“그는 날마다 배교자를 불태우고 팔다리를 꺾어 바퀴 위에 올려놓았지. 선제후의 탄원을 무시하고 크로지우스를 불태워 죽인 것도 클라인하르트. 그 늙은이였다.”

“……그렇습니까?”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지켜본 아카이아 대주교는 무기력하고 느리며, 겁많은 늙은이였다. 특히 그가 제창한 속죄주의라는 사상은 제국을 좀 먹는 역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너는 오늘 선제후들에게 네 이름을 똑똑히 알린 것 같구나. 그렇기에 그 녀석이 손을 쓴 것이겠지.”

‘그 녀석이라니.’

누군지 알 것 같다.

하늘 아래 가장 삼엄하다는 황궁의 안뜰 안에 허가받지 않은 암살자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자.

다른 선제후이리라.

루페르트가 결코 황제가 되질 원치 않는.

섬뜩한 상상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루페르트 가우저.”

대황후가 웃음을 거두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삭막함이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대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황제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루페르트는 단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나는 보다 쉽고 용이하며 큰 노고도 필요하지 않지만, 그 끝은 결코 좋지 못할 것이다.”

대황후가 낡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힘이 들어간 음성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괴롭고 혹독하며 그리고 위험한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은 전자보다 황제가 될 확률이 현저히 낮을 것이다.”

“…….”

“하지만, 그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제위에 오를 수 있다면 너는 네 가슴 속에 품은 야망 혹은 대의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말한 대황후는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폐까지 울리는 듯한 마르고 격렬한 기침이었다.

“쿨럭!”

급기야 대황후는 몸을 휘청이며 피를 토해 냈다.

중년의 여인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은 듯 침착하게 대황후를 옆에서 보필했다.

기침이 어느 정도 가신 후, 대황후는 핏기가 빠진 창백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조금 전까지 죽을 정도로 기침을 해 놓고 작은 흐트러짐 하나 없는 음성이었다.

루페르트는 대황후의 인내심에 경탄하며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방법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황후는 즉답했다.

“술, 계집질, 도박, 뭐든 좋다. 무위도식 그 자체가 미덕이 될 수 있겠지. 네가 작은 공적을 세웠고, 오늘 선제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줬다고 하나 앞으로 남은 시간은 많다. 오히려 그동안 탕아의 자질을 보인다면 탕아에 더해 위선자라는 오명을 함께 얻을 수 있겠지.”

“오명이 황제를 만드는 겁니까?”

루페르트의 목소리엔 약간의 반감이 서려 있었다. 원인은 안에서 솟구치는 알 수 없는 반발감이다.

대황후는 그런 루페르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냉랭히 말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꼭두각시다.”

꼭두각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의 눈동자엔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안광이 자리 잡았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야망도 없는 무능한 자가 그들의 원하는 표상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그 잘난 자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황제가 보장했지만, 철혈대제의 치세에선 결코 누리지 못했던 잊힌 권리를 말이다.”

“…….”

“그런 의미에서 너는 저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황제다. 아무 연고도 힘도 권력도 우호적인 동맹도 없으니까.”

“그,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반발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아차렸다.

사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단지 무능하고 무지했기에 황제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었다.

그랬었기에 혹사에 가까운 수행에 매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때다.

루페르트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가 물었다.

“현재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자리는 공석이다.”

대황후는 즉답했다.

루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가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너는 꼭두각시에서 몸에 그려진 줄무늬만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한 마리 범으로 거듭날 것이다.”

실로 그러하다.

제도 테타우를 아우르는 제국의 중심, 슈발츠마인 지방의 힘을 등에 업을 수 있다면 루페르트는 무명의 꼭두각시에서 일약 막강한 선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로 성장할 것이다.

“한 마리의 범…….”

루페르트의 눈이 번득였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짠 계획과 목표는 추상적인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유능한 인재를 얻고 그들의 힘을 빌려 제국을 바로 잡는다.

말은 쉽다. 그러나 구체적인 그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루페르트에게 대황후는 실체가 있는 목표와 가능성을 제시했다.

대황후는 소리 높여 말한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이 늙은이의 변덕과도 싸워야겠지.”

순간 대황후의 입가에 씁쓸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보상은 실로 다대하고 고생한 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대황후 안젤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쥐고 있던 지팡이의 끝으로 강하게 지면을 내려치며, 대황후는 포효하듯 물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나의 시험에 들겠느냐? 아니면 편히 앉아 제관을 쓴 꼭두각시로 남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평범한 야인으로 역사에 이름 한 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겠느냐?”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의 시험에 들겠나이다.”

미래의 황제의 두 눈에 은은하지만 확고한 빛이 서렸다.

‘나 또한 제국을 움직이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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