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7.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4)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무시에서 관심, 관심에서 경청으로.
하지만 그 흐름은 한 사내의 부드러운 음성에 의해 가로막혔다.
“선제후끼리 다툰다는 발상은 대단히 흥미롭군. 하지만 그 발상은 술집에서 탁상공론이나 펼치는 얼치기 대학생들도 할 수 있는 발상이야.”
은발의 골트문트였다.
몇몇 선제후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절반 정도의 주목을 받은 상태에서 골트문트가 루페르트를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의 근거는 턱없이 빈약하거든. 선제후들이 다툼을 벌이는 근거가 기껏해야 이익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렵한 걸음걸이로 반대편으로 걸어가 선제후 앞에 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루페르트의 뒤를 오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인간이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은 수긍하고 있지만, 우리 제국의 제후들은 일반 백성과는 다른 수준의 도덕성과 의무감을 강요받고 있네. 하물며 제후 중 최상위급에 위치한 선제후랴! 말할 것도 없지.”
그는 주변을 재기 넘치는 눈으로 한차례 돌아봤다.
“또 자네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는데 제국에 괜히 일곱 선제후가 있는 게 아니야. 일곱 선제후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균형을 맞추게 되어 있지.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이익을 추구해 다른 선제후를 해하려 들면 그는 다른 여섯 선제후의 협공을 받고 선제후직은 물론 봉토마저도 잃게 될 것이야.”
레벤호스트가 군인 쪽에 치우친 인물이라면 골트문트는 철저한 문관형의 인물이다. 그런 골트문트의 질서 정연한 논리를 들으면서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상대방의 말의 정합성 여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깔린 의도였다.
‘이자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
전생에서 골트문트는 그의 편을 들어주던 유일한 선제후였고 장인이기도 했다.
전생과 현생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긴 하지만 과거에 지녔던 감정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울피아나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편이었던 사내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동료 선제후들의 면전에서 루페르트를 찍어 누르려 하고 있다.
그 결과, 루페르트 쪽으로 흐르던 우호적인 기류가 급격히 사라져 갔다.
모처럼 루페르트에게 관심을 보이던 노르드마르크 변경백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대로 반박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킨다면 루페르트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골트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치기 대학생이 주점에서 으레 떠들어 대는 탁상공론으로 격하되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것을 말해야 하나?’
레벤호스트와의 대담에서 루페르트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레벤호스트가 깊게 파고들어 가지 않은 것도 있지만, 미래에 일어날 내전의 진정한 원인을 말하는 것은 루페르트 본인으로서도 부담될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순간 루페르트는 자신의 목에 건 소라고둥의 무게를 느꼈다. 그 순간 혼란스러웠던 생각은 사라지고 명료한 결론만이 남았다.
‘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잘못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의 흔들리던 눈빛에 중심이 잡혔다.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루페르트 가우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얀란트의 크로지우스.”
한 사내의 이름이 울려 퍼졌을 때, 루페르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모인 이 공간의 시간이 멈춰 버리는 것을.
“……?!”
“음.”
선제후는 물론 그 이외의 참석자들 시선마저 루페르트를 향했다. 모든 이의 시선을 한눈에 받은 채 루페르트는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자가 남긴 불화의 씨앗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겠지요.”
루페르트의 말이 끝난 직후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루페르트의 말은 정론이기에.
얀란트의 크로지우스.
파멸의 예언자라 불리던 정체불명의 사내는 루페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제국을 반으로 가른 적이 있다.
“신은 황제의 발밑에 엎드려 있으며 제국 교단은 가장 거대한 이단의 자궁이다.”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신앙을 지배한다.
그 지배의 도구는 제국 교단.
각 지역에 모세혈관처럼 뿌리내린 교단 소속 교회와 예배당을 통해 황제는 자신의 직할지는 물론이고 선제후나 다른 군주의 영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로지우스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평민보다는 간섭받기 싫어하는 군주의 호응을 샀다.
신앙의 자치를 골자로 하는 신교가 제창됐고 그 창시자인 크로지우스는 황제보다도 더 많이 언급되는 인물로 격상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호라 교단의 대적이라 불리며 군주들의 강력한 비호를 받던 얀란트의 크로지우스는 아래의 섬뜩한 예언을 남겼다.
“제국을 세운 여덟 제국 성인이 이제 타락한 제국을 징벌하러 돌아올 것이다. 전쟁과 역병, 기근과 불화를 가지고.”
그 멸망의 예언은 제국을 극도의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도처에서 세상의 끝이 찾아온다는 경구가 울려 퍼지고 신벌자가 된 여덟 제국 성인을 그린 불경한 성화가 곳곳에 소리 없이 내걸렸으며, 자해로 피를 뒤집어쓴 종말의 사도들이 백주에 거리를 행진했다.
그 혼란의 시기 제위에 오른 것이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다.
크로지우스는 화형대 위에서 불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신교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구교와 신교의 대립을 철권 통치로 무마시킨 후 종교 갈등은 봉합된 것으로 보였으나 그 상처는 철혈대제가 죽고 그의 대리인인 아카이아 대주교가 사망한 이래 다시 터진다.
루페르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선제후들을 둘러보았다.
레벤호스트, 막스 게오르크, 게오르크 아르님은 신교의 깃발 아래 선다.
이에 맞서 구교의 깃발 아래 서는 건 골트문트와 아카이아 대주교의 후임, 그리고 루페르트 가우저다.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경우, 모호한 중립을 지켰지만 대체로 그는 신교 쪽에 선 것으로 간주됐다.
“그 이름을 말해서 안 된다는 걸 그대는 모르는가?”
레벤호스트가 싸늘한 목소리로 루페르트를 꾸짖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이고 즉각 사과했다.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건너편에 앉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크흐흐!”
병색이 완연한 그 사내가 닫았던 입을 벌리는 순간 루페르트는 진한 머스크 향수 냄새에 섞인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선창에서 바닷물이 썩는 냄새를 연상케 했다.
“그쯤 해 두시오.”
혼란으로 치닫던 분위기를 다잡은 건 아카이아 대주교의 늙고 맥빠진 목소리였다.
“10년도 전에 죽은 망령이 뭐라고 호들갑이신가? 고어문트 궁중백도 그쯤하고 돌아오시오. 오래된 속담에 젊은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소? 이 청년에 대한 질답은 여기서 마무리 지읍시다.”
행색도 음성도 볼품없지만, 제국의 이인자이자 어른인 아카이아 대주교가 가지는 힘은 막강하다.
그의 말에 자리에 일어서서 루페르트를 꾸짖던 레벤호스트는 자리에 앉았고 골트문트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아카이아 대주교가 루페르트에게 물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제국에 위기가 닥친다고 가정했을 때, 그대는 황제로서 그 위기를 어떤 식으로 타파하겠는가?”
주름에 파묻힌 노안이 루페르트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그 노회한 눈을 담담하게 직시했다.
“선제의 방식만이 제국이 처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선제의 방식. 피와 강철의 길을 말하는 건가?”
대주교의 말에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교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재 제국이 누리고 있는 영화는 원래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피와 눈물, 시체를 양분으로 삼아 피어오른 꽃과 같지. 그것이 철혈의 꽃이다.”
“…….”
전생에서 아카이아 대주교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철혈의 꽃은 피지 못한다. 철혈의 꽃은 또 다른 양분을 요구하지.”
아카이아 대주교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선제후를 돌아봤다.
루페르트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주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아카이아 대주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선제후들의 희생을.”
그제야 루페르트는 느낄 수 있었다.
선제후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음을.
무시, 흥미, 놀라움에 이어 경계의 빛이 선제후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네가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피와 강철의 길을 쉽게 걷지 못할 것이다.”
대주교는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낯선 언어로 말했다.
고대의 언어 룸어다.
과거의 루페르트라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대담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여.
나는 드넓은 고원에 힘차게 올라.
모든 이가 허우적대면서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리라.
옛 시인이 노래한 구절.
이에 루페르트는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풍랑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빙해의 끝을 향해 노 저어 나가리라.
제국 성인의 별을 오른쪽에 두고.
완벽한 룸어로 맞받아쳤다.
“…….”
주름에 파묻혀 있던 대주교의 노안이 슬며시 떠졌다.
다른 선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시골 촌구석에서 양치기와 어울리며 공놀이나 하던 소년이 지금 제국을 움직이는 존재를 대등하게 상대하고 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옆에 앉은 골트문트를 힐끗 쳐다보며 불쾌한 기침 소리를 내고는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대의 의견은 잘 들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군. 이만 물러가라.”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별실을 나섰다. 등 뒤 너머로 갖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로이겐 뇌르겐틀링의 차례인가?”
“베른하르트도 안심하지 못하겠군.”
문이 닫힌 후 루페르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제야 루페르트는 느낄 수 있었다.
두 다리가 걷기 위태로울 정도로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치고 있다는 것을.
일생일대의 피로(披露)다.
전생에서는 결코 보여 주지 못했던 모습을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보여 줬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루페르트가 처음 저 문을 통과할 때 그는 보잘것없는 시골 청년이었지만, 저 문을 나설 때 그는 선제후들이 주목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무게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황궁을 나섰다.
그런데 루페르트가 별실에서 저지른 행위의 결과는 퍽이나 빨리 찾아왔다.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대로와 황궁 사이의 오솔길에서 루페르트는 섬뜩한 살기를 감지했다.
영혼 동맹의 부수 효과 위기 감지의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빛이 나타났다.
“남작 대우.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위버하임 아랫마을의 촌장 도리안 비하스다.
그의 뒤에 검을 쥔 수많은 사내와 비열하게 웃고 있는 빌헬미나의 얼굴이 보였다.
‘이럴 수가.’
상정하지 못한 일이다.
제아무리 대담한 이라고 해도 누가 감히 성스러운 황궁 안에서 검을 빼 들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아니 그전에 무기를 든 자가 황궁에 있는 것 자체가 의문이다. 한스 징펠만만 해도 황궁 밖에 있지 않은가?
아무튼 루페르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을 하느냐?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에 도리안 비하스는 이죽거리며 답했다.
“괜찮아. 손가락 하나하나를 모두 잘라 내고, 살가죽을 모두 벗겨 내면 부모가 와도 못 알아볼 테니까. 남작 대우.”
도리안이 손짓했다.
“쳐라.”
루페르트의 손이 소라고둥을 움켜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회귀를 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일생일대의 업적을 달성한 순간,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그런데 이번 생에서 루페르트의 운은 아직 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페르트는 검을 든 사내 뒤에서 야수의 눈과 같은 섬뜩한 빛이 번득이는 걸 보았다.
다음 순간, 무언가 번쩍였다.
스걱-.
둔탁한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루페르트를 향해 다가오던 사내들의 목이다.
“뭐, 뭐냐?”
도리안 비하스가 뒤돌아보는 순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빨간 명찰을 단 초로의 사내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지닌 소년.
일전에 저택 앞을 찾아온 도펠죌트너 일행이다.
빨간 명찰을 단 사내가 말했다.
“한 끼 식사의 은혜를 갚으러 왔소.”
이미 피로 흥건한 검을 쥔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도리안 비하스를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