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4화 (4/225)

4화 2. 통찰의 만화경 (1)

이른 새벽.

침대에서 자던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곁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금박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물건을 눈에 담았다.

통찰의 만화경.

여신 리프니에로부터 받은 아티팩트다.

손에 넣은 시점은 어제지만 저택 전체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좀처럼 쓸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장 안전한 시간이리라.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침대 상부의 화려한 황동으로 만든 장식물을 보았다.

리프니에의 말에 따르면 이 황동 장식은 관의 형태로 아래층에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고 갑자기 침대맡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으라차!”

아래쪽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희미하게 우당탕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였군.’

딱히 화가 나는 건 아니다.

황궁에서 받던 견제와 감시에 비하면 오히려 귀여운 수준이다.

루페르트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화경을 낚아채듯 손아귀에 쥔 후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실내는 어슴푸레한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창가로부터 비치는 새벽의 미명이 실내의 사물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통찰의 만화경의 접안부에 눈을 갖다 대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만화경 특유의 다채로운 색채로 이루어진 풍경만 어른거릴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천변만화의 색채 너머 떠오른 자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만화경의 중심에 그의 얼굴만이 둥그러니 떠올랐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나 정도면 잘생긴 얼굴이지.’

아주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정도는 살 수 있는 얼굴이다.

실제로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 그가 듣던 몇 안 되는 칭찬 중 하나는 인상이 참 좋다는 것이었다.

인상만 좋아서 문제지.

“……음?”

갑자기 손안에 들린 만화경이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스펀지에 끼얹은 물처럼 그의 손바닥 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루페르트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당신은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을 흡수했습니다.

- 지금부터 당신은 ‘통찰’의 권능을 지니게 됩니다.

- ‘통찰’의 권능은 마법처럼 강하게 연상하는 것으로 기동이 됩니다.

- 그럼 직접 한번 시도해 보세요.

루페르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강한 연상.

곧 기별이 왔다.

[ 통찰의 권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강하게 긍정했다.

[ 통찰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자신의 왼쪽 눈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자와 마법진, 그리고 음울한 짙은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당황하는 그의 눈앞에 일목요연한 표가 나타났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18세(누적 32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2. 일반 평가

무력: D-

마법: F

군략: F

경영: F

지식: E+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5. 영혼 동맹

- 없음

6. 총평

- 벌레

“벌레……?!”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이야기는 신전 안에서. ]

소라고둥의 메시지다.

* * *

힘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정원사 막스가 정원 가위를 들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저택의 모든 이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정원사의 작은 행동 하나조차 신경이 쓰인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소라고둥이 입을 열었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목소리다.

“이 신전은 저의 영역으로 선포된 성역, 평범한 인간의 이목 따윈 가볍게 속일 수 있답니다.”

한 평 남짓한 비좁은 신전이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루페르트는 정원사 막스 쪽을 응시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정원 가위로 가지를 쳐 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여기선 자유롭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죠.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거울 하나를 구해 오세요. 그래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루페르트는 즉시 밖으로 나가 거울 하나를 구해 신전 안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루페르트가 통찰의 권능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전에 봤던 자신의 능력치가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직관적인 처참한 능력치.

리프니에의 기품 어린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통찰의 만화경은 당신의 대략적인 능력을 수치화하여 보여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답니다. 뭐, 보다시피 당신의 능력치는 형편없지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이게 현실인데.”

“…….”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당신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요. 조금씩 개선해서 나가는 거죠. 아 여담으로 통찰의 권능을 남들 앞에서 사용하는 건 자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루페르트는 통찰의 권능을 쓸 때 자신의 동공 위에 떠오르던 기이한 형상들을 연상하며 말했다.

‘함부로 썼다간 이단 재판에 회부되기 딱 좋겠어.’

하루가 멀다고 광장에서 사람들을 불태우던 이단 심문관들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몸서리를 쳤다.

“일단 소라고둥을 제단 위에 올려 주세요.”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목에서 소라고둥을 끌러 헌화 몇 송이가 올려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제단 위에 놓인 소라고둥은 스스로 몸을 일으켜 직립했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꺼림칙한 시선을 느꼈다.

“당신은 이곳에 도착한 이래 룸어라는 고대의 언어를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더군요. 제가 옳게 봤나요?”

소라고둥 안에서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룸어. 물론 중요하죠. 제가 이해한 바로 권력층의 언어이니.”

“정확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룸어도 좋지만 다른데 힘써야 할 거 같아요.”

직립한 소라고둥이 미약한 움직임을 보였다.

“곧 당신에게 내릴 퀘스트가 있거든요.”

“어떤 퀘스트입니까?”

“사냥이에요.”

“사냥?”

“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사냥이죠.”

리프니에의 말이 끝나자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메헨부르그의 야수 ]

그 문자를 본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라고?’

전생의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다.

뒤이어 떠오른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기억을 보충했다.

[ 메헨부르그의 야수, 혹은 괴물이라고 불린 존재는 제국력 981년에서 982년 사이, 테타우 남쪽 메헨부르그 영지 일대에서 출현한 악명 높은 야수입니다. ]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명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메헨부르그 일대를 돌며 수십 명의 여성과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다.

황실에서 고용한 사냥꾼이 사살하기 전까지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제도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험한 일 하기 싫어하는 위버하임 장원의 하녀들도 공포에 질려 몸소 못과 망치를 들고 저택 창문에 판자를 덧대는 작업에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메헨부르그의 야수에 대해 왜 리프니에가 관심을 두는 것일까.

[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제국 수렵대의 안투안 쿠르스트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메헨부르그의 야수라 주장하는 커다란 늑대를 증거물로 제출한 이후 메헨부르그의 야수의 활동은 종언을 고했습니다. ]

“……하지만 저는 여기에 대해 약간의 의문을 지니고 있어요.”

문자가 사라지는 시점과 맞물려 리프니에가 입을 열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거든요.”

“안투안 쿠르스트가 사냥한 야수가 진짜가 아니라고 믿고 계시는 겁니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석 달 후, 그전까지 당신의 무력 평가를 C 이상으로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요.”

“무력을 중점적으로 키우라는 말씀이군요.”

“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아주 위험한 임무가 될 것 같으니까요. 어쩌면 당신은 제국을 구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어요. 운이 나쁘면 산 채로 괴물에게 먹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

“아무튼, 자세한 내용은 추후 알려 드리도록 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통찰의 만화경의 사용법을 알려 드리겠어요. 일단 당신의 능력치를 띄우고 지식 평가 항목을 봐 주세요.”

루페르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지식: E+

바람직하지 못한 능력치.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식 평가 항목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세요.”

루페르트는 손가락을 들어 지식 항목을 눌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앞을 덮은 문자열이 스러지면서 새로운 항목이 표시된 것이다.

룸어: 23

논리학: 12

윤리학: 12

역사학: 11

수학: 0

물리학: 0

< 루페르트 가우저: 지식에 대한 보고 >

세부적인 항목이다.

“각 항목의 평가는 이렇게 평가 항목을 열면 세부 평가를 볼 수 있어요. 보다시피 처참한 능력치가 보이죠?”

“으음. 네. 그런데 이 점수들은 뭘 기준으로 산정한 건가요?”

“각 영역에서 마스터라고 불리는 달인의 기준을 백 점 만점으로 잡았어요. 백 점에 가까울수록 마스터에 가깝고 멀수록 초심자에 가깝다는 이야기에요. 물론, 당신의 능력이 마스터를 웃돌 정도에 이르면 백 점을 넘길 수도 있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세부 항목을 골고루 잘해야 평가가 올라가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어느 한 항목에 통달하기만 해도 평가는 올라간답니다. 정확한 기준은 제 마음대로지만 아무튼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겠죠?”

리프니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니에의 말은 물처럼 이어졌다.

“처음 당신이 이 저택에 왔을 때 당신의 룸어 수치가 얼만지 아시나요?”

“글쎄요. 10점 정도?”

어림짐작으로 말해 봤다.

그러나 리프니에는 자비심이 없다.

“아니요. 5점이었어요.”

“5점요……?”

루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 한 자리도 안 되는 처참한 능력치였죠. 다시 말해 당신은 두 달 동안 18이라는 수치를 올린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답답함이 한 번에 해소되는 걸 느꼈다.

‘그래, 실력이 안 느는 게 아니었어! 여신님의 눈으로 볼 땐 착실하게 실력이 늘고 있었던 거야!’

리프니에가 자신에게 통찰의 만화경을 준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프니에는 계속해서 말했다.

“보다시피 대단히 빠른 성취지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논리학과 윤리학, 역사학의 점수도 룸어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자신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좋은 동기 부여 효과를 주죠. 수시로 통찰의 망원경으로 당신의 능력치 변화를 예의 주시하세요. 물론, 지금 가장 중시해야 할 게 뭔지 알고 계시죠?”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에게 원하는 것은 무력, 다시 말해 전투 능력의 집중적 향상이다.

루페르트도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리프니에의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의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일과에 검술 수련과 체력 단련을 추가했을 뿐이다.

두 배의 노력, 두 배의 수고로움.

머리가 터져 버릴 정도의 공부와 뼈와 힘줄이 끊어질 정도의 운동.

루페르트의 몸에 걸리는 부하는 더욱 커졌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 없다.

제국의 미래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