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 황제의 회귀 (3)
회귀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루페르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수진들의 수업을 정리하고 진도를 따라가느라 혼신의 힘을 부었다.
사실 루페르트는 공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룸어에서 ‘가다’라는 뜻의 동사 변형은 모두 몇 개입니까?”
에르바하 교수가 열정적인 어조로 물었다.
“다섯 개, 아니 여섯 개입니다.”
“이 구문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것은 청유입니까? 명령입니까?”
“명령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가 알려 드린 각 용법을 이용한 문장을 스스로 생각하고 작성해 다음 방문에 제출해 주십시오. 참고로 문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에르바하의 수업은 마치 질척한 개펄 위를 전력으로 달리는 느낌이었다.
한 번 수업을 듣고 나면 진이 빠졌고, 혹독한 과제는 다른 수업에마저 차질을 줄 지경이었다.
그런데 최근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고민거리가 생겼다.
‘제대로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아무리 공부를 거듭해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시험에선 실수 연발이다.
열심히 하는 건 맞지만 실력이 오르는 것 같지가 않다.
공부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으레 직면하는, 답보(踏步)라는 최악의 적이 그에게 도래한 것이다.
공부에 뜻을 둔 사람 중 다수가 공부의 힘듦보다 진전이 없을 때 포기의 유혹을 느낀다.
의외의 지점에서 복병을 만난 루페르트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유를 찾게 되었다.
‘휴식이 필요해. 머리를 식힐 휴식이.’
루페르트는 저택 뒤 푸른 잔디가 깔린 고분처럼 생긴 동산으로 올라갔다.
첫 외유였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가 바깥으로 나가자 하녀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릴 정도다.
동산 위에는 수많은 풀을 뉘게 하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보는 눈도 없겠다, 모처럼 그 동산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위버하임 장원의 풍경을 한눈에 응시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왜 전생에선 알지 못했을까.
시원스레 뻗은 아름다운 장원의 풍경을 신선한 바람을 맞아가며 감상하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플루트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플루트는 축구와 더불어 오랜 취미이자 몇 안 되는 위안거리 중 하나다.
아쉬운 김에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풀을 꺾어 풀피리 형태로 만들어 한 번 불어 보았다.
바람 샌 웃긴 소리가 났다.
요령이 없다는 게 이런 작은 일에서도 드러났다.
한 번 익힌 건 대체로 잘해 냈지만, 해 보지 못한 일은 아주 젬병이였다.
루페르트는 풀밭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눈에 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다.
“아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10분을 잤을 뿐이다.
오후에 있을 가정 교사 방문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루페르트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소라고둥이었다.
늘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이 자신의 가슴팍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이건?’
회귀를 한 이후에 처음 보는 풍경.
다음 순간 벌떡 일어선 소라고둥에게서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정말로 둔감한 사람이네요. 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점잖고 기품도 깃들어 있지만 젊은 음색.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루페르트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설 수 없었다. 가슴팍 위에 오뚝 선 소라고둥이 천만 근처럼 무거웠기 때문이다.
소라고둥에게서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처음으로 단둘이 되었네요. 저는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랍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리프니에……?”
“어머, 벌써 저를 잊으신 건가요?”
소라고둥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반응이 왜 그렇죠? 당신에게 기적을 베푼 아름다운 여신을 만날 땐 좀 더 경건하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 그건!”
놀라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과거로 데려다준 이와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흐음……. 신비로움이 부족한가. 그럼 이건 어떤가요?”
소라고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표시됐다.
[ 흐음……. 신비로움이 부족한가. 그럼 이건 어떤가요? ]
틀림없다. 죽기 직전에 봤던 빛나는 문자다.
“아니, 충분히 신비롭습니다. 여신이여.”
“리프니에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쪽이 이 끔찍한 세상에선 적합한 호칭이니.”
리프니에는 조소를 섞어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이 끝난 직후 풀밭엔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페르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고 리프니에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먼저 정적을 깬 건 리프니에였다.
“그나저나 당신도 참 피곤한 환경에서 살고 있네요.”
“제가요?”
루페르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곧 납득이 갔다. 이미 충분히 피곤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루에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사이 정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학업에 열중하는 삶을 사니 말이다.
“뭐, 조금 힘들긴 하죠. 하지만 제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힘듦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에 소라고둥은 퉁명스레 말했다.
“저기,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그 말은 빛나는 문자로 다시 한번 루페르트 앞에 표시됐다.
[ 저기,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리프니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 감시당하는 거 몰라요?”
“감시요? 제가?”
리프니에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이 저택은 감옥이에요.”
“감옥이라고요?”
과거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장원을 푸른 지붕의 감옥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이 저택이 진짜 감옥이라니.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 일부가 당신을 주야로 지켜보는 데다가 당신의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고 있어요. 심지어 당신의 침대에도 도청을 위한 관이 설치되어 있답니다.”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묘하게 사람들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상하다고는 의식했지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 못 믿겠으면 야밤에 침대 모서리에 있는 황동 장식을 향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보세요. 아마도 깜짝 놀랄 반응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굳었던 그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신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프니에에게 물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당연하고말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좀 더 당신 앞에 빠르게 말을 걸었겠죠. 당신이 할 일이 태산인데 말이죠.”
그러고는 소라고둥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동안 대단히 불만이 쌓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저택 쪽에서 당신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무리가 있네요. 빨리 간단히 용건만을 말하고 끝내도록 할게요.”
리프니에는 서둘러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첫 번째 ]
[ 지금 이 암울한 시대에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모시는 신도는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녀를 위한 신전 또한 한 채도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사도인 당신이 이런 신성 모독을 그냥 지켜보면 아니 되겠지요? ]
- 가련한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신전을 지어라.
“으음.”
첫 번째 퀘스트.
예상한 것과는 조금 내용이 다르다.
그는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의 과제 같은 걸 연상했었다. 드래곤이나 괴수의 처치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리프니에가 퉁명스런 어조로 불쑥 물었다.
루페르트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든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소라고둥 안에서 정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이야 어쨌든 리프니에의 첫 번째 퀘스트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겨우 신전을 짓는 것쯤이야.
그는 저택으로 돌아가 즉각 신전을 짓는 작업에 착수했다.
필요한 것은 건축 자재와 인부.
루페르트에겐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는 연간 60,000탈러의 수입을 올리는 위버하임 장원의 주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는 작은 사당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에 만들려 하십니까?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면 제가 지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저택에서 오십 보 거리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루페르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일주일 정도의 날림 공사가 이어진 후 저택 뒤편에 리프니에의 신전이 완성됐다.
조촐하고 투박한 작은 신전.
서슬 퍼런 이단 심문관의 시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전 바깥엔 어떤 표식도 새기지 않았다.
아무튼 새롭게 완성된 신전 안에 들어서자 한마디 말도 없던 소라고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흐음. 이런 움막 같은 걸 저를 위한 신전이랍시고 만든 건가요?”
리프니에는 한 평밖에 안 되고 장식물도 촛대 하나밖에 없는 작은 신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아무튼, 엉망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퀘스트 달성에 따른 답례를 드리도록 할게요.”
소라고둥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화려한 색채로 치장된 만화경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만화경 같지만 루페르트는 예사롭지 않은 힘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경을 집어 드는 순간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통찰의 만화경 ]
- 아무도 없을 때 거울 앞에서 그것을 사용해 자신을 바라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