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지옥 (2)
하얀 비단장삼을 나부끼는 냉막한 인상의 남자.
마신의 손바닥 위에서 전장을 굽어본 강엽은 부친을 애타게 부르는 당묘정을 잠시 돌아보았다.
부친을 설득하기 위해 딸을 데리고 나섰는데, 하필이면 이쪽에 이미 혈교가 와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수뇌부들과 싸운 놈들이군. 팔대교왕이 두 명이나 왔다면 암만 당문이라도 버겁겠지.’
하물며 흡혈귀의 재생력까지 지녔다면 당문이 어떤 대책을 세웠어도 소용없지 않았을까.
강엽은 당묘정의 어깨를 감쌌다.
“아직 늦지 않았소.”
“엽랑....”
“싸움도 끝나지 않았고.”
그 말에 무심코 옆을 돌아본 당묘정은 강엽의 뒤를 치는 인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시커먼 흑의를 휘날리는 창백한 인상의 여인이 강엽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던 것.
섬뜩하리만치 길쭉한 손톱이, 강엽은 물론 당묘정과 포대기에 감싼 아기까지 베기 위해 휘둘러진다.
괜히 상대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숨소리조차 완전히 죽인 절호의 기습.
그러나 그 기습은 닿지 않았다.
“뭐, 야...!”
“무례한 여자군.”
마치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잡혀 허우적거리는 흑포 여인.
악을 쓰며 손톱을 뻗어도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할 뿐.
결코 닿지 않는다면 결국 무한히 떨어진 것이나 진배없다.
“우애애애애앵!”
“쯧.”
엄마 품에 안긴 딸이 우는 소리에 마뜩찮은 낯빛으로 여인을 노려보는 강엽이었다.
손가락을 휘젓자 여인이 눈을 홉떴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
마치 달리는 마차에 치인 것처럼 마신의 손바닥 위에서 튕겨나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여인.
직후 허공에 몸을 띄운 강엽이 천천히 하강하는 모습을 모두가 홀린 듯이 바라봤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만약을 대비해서 마신을 항시 유지하는 데다 당묘정의 주변엔 수십 겹이나 되는 술법을 둘러뒀다.
행여나 령아가 실수로 정안을 연다고 해도 능히 버텨낼 만큼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가운데 착지한 강엽은 일진광풍을 일으킨 참마도를 힐끗 보았다.
앞서 흑포 여인이 그랬듯 왜곡된 공간에 막혀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
운 좋게 마신의 일권을 스친 중년인이 피를 흘리며 쌍심지를 켰다.
“젠장, 천마...!”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군?”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흡혈귀의 피에 담긴 본능이, 강엽이 누군지 알려주며 굴복할 것을 종용했을 테니.
흡혈귀의 정점에 군림하는 진조를 영접한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린다.
그러나 중년인은 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이마의 상처를 더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허세를 떨었다.
“퉤! 염병할....”
하필이면 심상절예인 마신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에 스친 상처조차 회복되지 않고, 간헐적으로 피가 흘러나온다.
강엽이 그 몰골을 보고 비죽 웃었다.
“이제 막 심극에 오른 것 같은데.”
“닥쳐... 커억!”
쿠웅!
강엽이 발을 구르자 기혈이 터진 것처럼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는 중년인.
당문을 멸문 직전까지 몰고 간 교왕들이 간단히 제압되는 모습에 당문의 혈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큭! 비랑을 놔줘, 이 괴물!”
별안간 배후를 덮친 흑포 여인이 다시 한번 강기가 어린 손톱을 휘둘렀고,
강엽과 몇 합 나눠보지도 못하고 손톱이 잘려나간 채 목을 붙잡혔다.
“비랑이라... 연인 사이였나?”
“끄, 으으윽!”
우드득!
호신강기와 함께 목을 부러뜨리자 여인이 혀를 빼물고 축 늘어졌다.
흡혈귀의 재생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심상의 기운을 담아, 확실하게 황천길 너머로 보내버린 것.
동시에 뒤에서 피투성이가 된 중년인이 악다구니를 토해내며 참마도를 내질렀다.
심상의 파동이 터져나오면서 만천화우를 무너뜨린 심극이 터져나왔다.
거대한 핏빛의 사자가 질주하는 심상의 풍경.
물끄러미 바라본 강엽이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검결지에서 뻗어나간 하얀 뇌력이 중년인의 몸을 무자비하게 감전시킨다.
“...끄그극!?”
한차례 간질을 일으킨 중년인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칠공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심상절예 천뢰무한을 극한으로 압축시킨 뇌기를 맞고 온몸의 신경이 불타버렸으니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렇게 두 교왕을 해치운 강엽은 전장에 고루 퍼진 혈교도들을 심즉살의 수법으로 해치우고 나서야 당천경을 향해 나아갔다.
강엽이 싸우는 사이 당천경을 지켰던 당문의 혈족들도 감히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만 꼴깍 삼켰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여, 여긴...!”
“...됐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당문의 혈족들이 흠칫하는 가운데 당천경이 쇠를 긁듯 힘겨워하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리로, 오라... 하거라....”
“...문주님.”
당문의 혈족들이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물러나고, 강엽은 마신의 손에서 내린 당묘정과 함께 그들 사이를 통과했다.
당묘정은 차마 달려가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는데, 품에 안긴 령아가 조막만한 손을 뻗었다.
“마마!”
“허허....”
손녀의 목소리를 들은 당천경 또한 피 흘리는 중에도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얼마 전에... 태어났구나.”
“...령아라고 지었어요. 세령.”
눈이 부울 만큼 눈시울을 붉힌 당묘정의 말에 당천경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천산 어귀에서 헤어지기 전에 지어준 이름. 딸이면 세령이라 지으라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 것이리라.
감정이 복받쳤는지 기어코 당천경의 눈가를 따라 투명한 이슬이 흘러내렸다.
“미안, 하다. 네게도... 그 아이,에게도... 몹쓸 짓을....”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아버지 딸이고, 령아도 아버지 손녀니까 제발...!”
“허허... 안아봐도, 되겠느냐?”
당묘정이 포대기에 감싸인 아이를 내밀자 주름진 손이 해맑게 웃는 손녀에게 향한다.
행여 손에 묻은 피가 손녀를 더럽힐까 봐 멈칫 굳어졌지만, 뜻밖에도 어린 손녀는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쿨럭, 흐...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아기가 부모를 바라보고, 엄마가 작게 속삭이는 말을 따라했다.
“할...부이?”
“허허허.”
발음은 부정확했으나 이제 막 유치가 나오는 나이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숨을 죽인 채 주변에 모여들었던 당문의 혈족들도 돌도 안 된 아기가 생전 처음 보는 조부를 알아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손녀... 신동...이구나, 으허허....”
기뻐서 웃는데도 입술 사이론 피가 나온다.
그때 강엽이 당천경의 어깨를 잡고 활명술의 선천지기를 불어넣자 환한 기운이 떠올랐다.
마음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기운.
찢긴 경맥과 진탕된 장기, 파열된 근육 등이 아물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아갔다.
“아아....”
“기적이다. 기적이야!”
당천경의 육신을 치료한 백광이 당가타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적들의 칼날에 베였던 육신이 수복되고, 중상을 입어 황천길 문턱에 올랐던 자들도 다시 돌아온다.
기적 같은 광경에 당문의 혈족들이 경외심 어린 시선을 보낼 때, 당천경도 피딱지가 얹은 손을 만지며 신기해했다.
“...자네가 이런 수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 겪고 보니 명불허전이군. 가히 의술을 초월한 수준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만능은 아니지만, 강엽은 괜한 겸양을 보이는 대신 설핏 미소 짓기만 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염왕을 잃었을 때처럼 후회했으리라.
자칫 당묘정이 부친의 죽음을 목도했을 거라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해진다.
“활명원주님께서 제때 알려주신 덕에 다행히 늦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천경을 설득하기 위해 당묘정과 함께 오던 중에 당우경의 연통을 받았던 것이다.
법구를 통해 당문이 처한 상황을 대략적으로 듣고, 서두른 덕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저간의 사정을 깨달은 당천경이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강엽과 당묘정을 번갈아 돌아봤다.
“허, 나는 가문을 핑계로 두 사람을 내쳤건만... 나보다 우경, 그 녀석이 더 올바른 판단을 내렸구나.”
글쎄, 과연 당우경의 판단력이 더 좋아서였을까.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걸 떠올렸다고 해도... 문주의 신분으로 차마 먼저 하자고 할 순 없었겠지.’
단순히 당천경 자신의 자존심뿐 아니라 당문의 위신까지 걸린 일이었으니 섣불리 판단할 순 없었을 터.
물론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달리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당천경의 입장에선 외통수에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끝까지 외인으로 대한다면 강엽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고, 가문의 일원으로 대한다면 무림맹을 저버리고 신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어느 쪽도 쉬이 선택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늪에서 당천경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가문의 일원들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문주님!”
당문의 혈족들도 대경했지만, 당천경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염치 없다는 걸 아네. 난 가문을 살린다는 구실로 자네와 딸아이를 외면했지. 심지어 딸아이의 혼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런 말씀 마세요. 숙부님께서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말씀해주신 걸요.”
당천경은 작고한 부인을 기리는 사당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문의 혈족들 모두 당천경이 딸을 그리워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당우경이 몰래 천산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도 추궁하지 않은 바.
그렇게 아우를 통해 딸의 안위를 확인하며 안도한 당천경이었다.
“활명원주님께서도 돌아오실 겁니다. 그동안 문주님, 아니 장인어른께선 가산을 정리해주십시오.”
시간은 걸리겠지만 입도공월을 통한다면 당가타의 재물 전체를 천산으로 옮길 수 있다.
천산은 넓으니 굳이 신교로 들어오지 않아도 당문의 사람들끼리 터전을 꾸릴 수 있겠지.
“문제가 있네. 활명원엔 환자들도 있네. 무림맹에 속하거나 그들과 함께 싸웠던 협사들이지.”
그들도 신교에 의탁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의사에 달린 일이었으니까.
“개개인의 의사를 물어봐야겠지만, 그들이 오겠다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게 참말인가?”
“그게 다 나중에 빚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교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공표한다면, 그들이 신교를 마교로 매도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훗날 신교에 대한 평판으로 백도 정파의 여론이 두 쪽으로 나뉜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제가 직접 만나볼 테니 거동할 수 있는 자들을 모아주십시오.”
“으음, 알겠네.”
당천경도 강엽의 의도가 마냥 순수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강엽이 내민 손을 잡았을 때부터 당문은 신교의 세력에 편입된 거나 마찬가지.
신교의 그늘에 숨어 태풍을 피하는 것만이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소창후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겠습니다.”
강엽도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흔쾌히 수락한 그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 당문에 발견될 때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것.
“어차피 저는 돌아갈 곳도 없어요. 장문인과 혜정 사자, 수많은 자매들이 불토로 떠났습니다.”
아미파가 멸문지화를 겪은 후 그녀는 무림맹의 군영에 투신해서 혈교와 맞서 싸웠다.
무림맹까지 패망한 이후엔 홀로 강호를 거닐며 혈교와 싸울 생각이라고 했다.
“받아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조건이 있소. 본교를 두고 사마외도 운운하지 말 것. 또한 천산에 있는 동안엔 본교의 무인들과 충돌하지 마시오.”
“염려 마세요. 당문 사람들과 함께 지낼 생각이니까. 대신 저도 한 가지만 약조해주셨으면 해요.”
“말해보시오.”
“혈교를 칠 때 저도 가겠어요.”
낯빛은 얼음장처럼 냉막하나, 눈동자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로 활활 타오른다.
이만하면 강엽이 허락하지 않아도 알아서 뒤꽁무니를 쫓아오겠지.
“뜻대로 하시오. 무림맹의 생존자들에 대해선 나도 나름대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그리고....”
답지 않게 쭈뼛댄 소창후가 강엽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본산의 생존자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저만 살아남은 게 아니라면....”
“신도의 하오문 분타에 물어보시오.”
홍가려가 하오문의 사절로서 신교와 동맹을 맺은 이후 강엽은 신도에 분타를 내는 걸 허용했다.
“하오문이 본교의 비선이 되어 천하를 두루 살피고 있으니 시운이 따른다면 아미파의 생존자를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겠소.”
“...그렇군요. 일월마, 아니 신교는....”
혈교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무림맹의 생존자들을 적극 포섭한다.
그제서야 강엽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깨달은 소창후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