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지옥 (3)
-까악... 까악...!
시뻘건 석양녘을 배회하는 검은 날개들.
냄새를 맡고 날아온 까마귀들은 시신들의 살점을 쪼아먹으며 포식을 즐겼다.
그렇게 정신없이 배를 채우다, 별안간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친 피풍의와 죽립으로 외양을 가린 무리가 우뚝 멈춰선 채 심유한 눈길로 마을을 살피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했는지 손은 피풍의 사이로 삐죽 드러난 칼자루에 올라간 상태.
한동안 마을을 둘러보고 나서야 주민들이 모두 죽었음을 깨달은 무리는 깊이 탄식했다.
“이렇게 심한 짓을...!”
“땅바닥에 말의 발자국들이 찍혀 있습니다. 도적 떼가 쳐들어온 것 같습니다.”
약탈이 일상이 된 시대였다.
혈우가 땅을 더럽히고, 농작물들이 독성을 띠면서 이제 사람들은 쌀알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다.
한 줌의 쌀알을 얻기 위해 사람을 해하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온 산천초목을 헤집고 다녔던 것.
전례 없는 대재앙은 흑도와 정마의 구분마저 무의미하게 했다.
무림인들은 강도로 돌변했고, 상인들은 강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강도들을 고용하는 악순환.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이 마을의 사람들처럼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양민들이었다.
“이 근처는 대삼문의 영역 아닌가요? 자기 앞마당에 도적이 지나가는데도 놔둔다고요?”
“대삼문은 멸문했다.”
“예?”
“일전에 피난길에 오른 상인들이 말하는 걸 얼핏 들었다. 혈교에게 충성하지 않는 문파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고. 대삼문도 그중 하나다.”
“그런....”
뜻밖의 소식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는데, 세찬 바람이 스쳐지나가며 한 사람의 죽립이 뒤로 넘어갔다.
턱끈 덕분에 날아가진 않았지만, 한순간에 얼굴이 드러난 소녀는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조심해야지.”
“네, 사, 사부님!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대답한 소녀가 턱끈을 조이면서 죽립을 푹 눌러쓰자 사부라는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천하에 우리가 발 붙일 곳은 없단다. 이름과 사문을 철저히 숨겨야 살 수 있어.”
무덤덤한 어조에 여인과 동행하는 이들이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여러 문파의 제자들끼리 모여 무공을 겨루고 술잔을 나누던 낭만은 옛말이 돼버렸다.
이젠 정든 사문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냥 두고 가긴 그렇구나. 묻어주고 가자.”
“예, 사부님.”
바람결에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화산의 장문인, 옥청선자 연선하는 제자들과 함께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서쪽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대재앙을 비껴나간 신강의 천산을 향해.
그리고 며칠 뒤, 일대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도적 무리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 * *
-살아남으면 천산으로 와라.
스스로 천마를 자처한 사내가 남긴 말.
그들이 아는 모습하곤 딴판이었지만, 그 오연한 눈빛과 분위기는 똑닮았기에 의심할 수 없었다.
‘건물에 집착할 때가 아니야.’
조사들에게 죄스러웠지만 산문에 남았다간 적들에게 사냥당하거나 굶어서 고사당했을 터.
곳간의 미곡을 화산파로 피난온 양민들에게 고루 나눠준 뒤, 옥청선자는 조사들의 위패와 중요한 비급만 챙기고 도관을 불태웠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화산을 떠났다.
중간에 습격을 받기도 했고, 굶주림과 역병을 이기지 못해서 제자들을 잃기도 했다.
죽기 직전 화산에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하는 제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며 얼마나 울었던가.
제자들 몰래 베갯머리를 적시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빌었나.
그럼에도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젠 네가 화산의 장문인이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너라면 잘 해낼 게다.
매화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꽃을 피우는 법.
작년에 타계한 검성의 유언을 금과옥조 삼아 번민과 맞서싸우며 제자들을 이끌고 왔다.
그나마 도중에 만난 협력자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제자들을 잃었을지 모르는 일.
섬서 끝자락, 난주고원의 아래에 있는 안정현(安定縣)에 온 옥청선자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홍가 가려가 삼가 화산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오랜만일세, 소문주.”
옥청선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꼴이 말이 아니군?”
화사한 궁장으로 꽃단장을 하던 절세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랑자처럼 꾀죄죄한 행색.
본래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옥청선자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 세상에서 눈에 띄는 꼴을 할 순 없으니까요.”
“동감일세. 곳곳에서 혈교와 그들의 사주를 받은 마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지 않나.”
구파와 팔가도 안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지경에 처했기에 산문을 버리고 하오문에 신세를 지지 않았던가.
다행히 일월신교의 지원을 받으면서 하오문의 비선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작동됐다.
“한데 제자들은...?”
몰려서 다니면 의심의 시선을 받기에 하오문의 조언에 따라 삼삼오오 찢어지지 않았던가.
옥청선자가 인솔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은 사문의 원로들과 일대제자들을 따라 다른 길로 간 바.
“이걸 봐주세요.”
이백여 명의 화산파 제자들을 각각 다른 길과 시간별로 옮기다 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찬찬히 종이를 살핀 옥청선자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입도공월? 이건 천마의 술법 아닌가?”
“예, 본문이 신교와 손을 잡으면서 교주님의 권능을 빌렸습니다.”
“그 말은?”
“광명마교가 석탑을 짓고 사도들을 옮겼듯이, 중원에서 천산으로 가는 길 곳곳에 지점을 만들었습니다.”
광명마교의 석탑처럼 대단한 공능을 자랑하진 못하지만, 짧은 거리를 이동하기엔 충분했다.
만의 하나 혈교의 추격대에게 덜미가 잡혀도 그들을 따돌리고 목적지까지 탈출할 수 있도록.
“다만 그조차 만능은 아니어서... 도중에 잡혀서 죽거나 소식이 끊긴 사람들이 있어요. 죄송합니다.”
머리를 감싼 헝겊뭉치를 벗고 허리를 숙이는 홍가려의 사과에 옥청선자는 무거운 탄식을 쏟아냈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 중엔 그녀와 가깝게 지냈던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게, 소문주. 어찌 하오문의 탓이라고 하는가? 떠나간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산문을 내려왔을 때부터 각오한 일일세. 만약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이런 결정을 내린 나 자신을 탓해야겠지.”
“남은 사람들은 안전하게 데려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다만 궁금한 게 있네만. 하오문에 도움을 청한 게 본산뿐인가? 아니면 다른 문파들도 있는가?”
“다른 문파들도 있습니다.”
“하면 우리가 가는 길에 암어를 남겨놔서 이 산중의 폐사찰로 불러온 건...?”
“그건....”
홍가려가 말하려 할 때 옥청선자의 시선이 입구로 움직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그녀들처럼 죽립을 쓴 중년의 나그네가 들어왔다.
“송문고검을 청려장에 숨기셨군요, 진인.”
“이런, 소개도 안 했는데 바로 알아보시는 거요?”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운 전우를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진인께서도 하오문의 초청을 받고 오셨다는 건....”
“아마 선자와 같을 것이오.”
무당파의 장문인, 현운 진인이 죽립을 벗고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빈도 역시 제자들을 데리고 천산에 의탁하러 가는 길이니까. 전장에서 죽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어떻게든 제자들을 건사해야 했소.”
도관을 자신의 손으로 불태우고 떠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
그럼에도 현운 진인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사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치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제자들을 데리고 산문을 나설 때 혈오익군(血烏翼君)이라는 팔대교왕이 쳐들어왔소.”
“부채를 다루는 노인 말인가요?”
옥청선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일전의 정마대전에서 혈교의 고수들과 겨뤄본 만큼 팔대교왕에 대해서도 대강은 알고 있는 바.
“그렇소. 까다로운 자였지. 이번엔 제대로 겨뤘는데 심극을 쓰더구려. 초전에 죽을 뻔했소.”
“진인께서 여기에 오셨다는 건 혈오익군이란 자를 격살했다는 뜻이겠지요.”
“운이 좋았소이다.”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현운 진인의 팔뚝엔 지네가 지나가는 듯한 징그러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목 위에도 희미하게나마 흉터가 남은 게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듯했다.
“한 치만 깊었다면 저승에 계신 스승님을 뵈었을 것이오. 혈오익군이란 노괴는 전대 팔대교왕들과 비견할 만한 실력자였소.”
무당파의 파문제자로서 혈교에 가담한 혈음마군과 생사결을 치러봤기에 할 수 있는 말.
현운 진인이 가까스로 승기를 쥐었다고 자평할 만큼 팔대교왕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홍가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흠,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팔대교왕 두 명이 당문에 쳐들어갔다 격살됐습니다.”
“뭣...!?”
“그게 정말인가?”
“예, 혈걸용군(血傑勇君)과 혈암소군(血暗素君)이란 자였지요. 당문도 큰 피해를 봤지만....”
“역시 당문이야! 독진의 성능은 확실하군!”
“하하, 아무렴! 내 다른 것은 못 믿어도 당문주님의 능력만큼은 믿고 있었소!”
“신교의 교주님이 와서 두 교왕을 쓰러트리셨다고....”
“...크흠.”
홍가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참 헛다리를 짚은 게 민망했는지 고개를 슬쩍 돌리는 두 장문인.
그때 밖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총군사!”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의현.
행상으로 위장한 그가 청건을 벗으면서 세 사람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무사한 모습을 뵈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지난 패배로 여러분을 잃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지요.”
“설마 총군사께서도 오실 줄이야. 하면 제갈세가의 식솔들까지 다 데려오신 거요?”
“아닙니다. 숨겨진 은신처가 있어서 소가주를 비롯한 식솔들은 그쪽에 보냈습니다. 여기엔 저를 비롯한 세가의 술사들만 좀 왔지요.”
“혹시 맹주님의 소식은 아십니까?”
입도공월을 통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운 좋게 사문 근처로 간 사람들은 바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송구합니다. 저도 두 분 맹주님의 소식은....”
제갈의현의 얼굴에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자 자연히 세 사람의 안색도 무거워졌다.
“전대 맹주님과 현 맹주님, 모두 소식이 끊겼습니다. 팽가와 청성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못했지요.”
“두 분은 본문도 찾지 못했습니다.”
하오문 역시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도 두 맹주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최악의 경우엔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정주는 이미....’
입도공월을 통해 퇴각했다고 해도 혈교의 마수를 완전히 떨쳐낸 건 아닐 테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혈마가 두 맹주를 잡았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나 홍가려는 구태여 그 가능성을 입에 담는 대신 애써 희망적인 얘기를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교의 교주님께선 당시 입도공월이 불안정한 탓에 먼 곳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중원 밖으로 가셨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혈교를 제외하면 누가 있어 천하팔존과 구파의 장문인을 해하겠나.
“무당, 화산, 제갈. 뿐만 아니라 다른 문파들도 이 난주고원을 향해 오고 있어요. 우린 여기서 천산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일부러 모으는 이유가 있는가?”
물론 난주고원쯤 되면 혈교도 무작정 추적하진 못할 테니 정체를 감출 필요도 없으리라.
답은 제갈의현의 입에서 나왔다.
“혈교가 천라지망을 쳤군. 맞소?”
“음...!”
두 장문인이 침음하고, 홍가려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군사님의 말씀이 맞아요.”
“하긴. 혈교도 바보가 아닌데 당연히 백도 정파의 생존자들이 천산으로 간다는 걸 알았을 테지. 일월마교... 아니, 일월신교의 힘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를 막으려고 하겠군.”
“입도공월로 가는 건?”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입도공월을 쓴다면 굳이 부딪치지 않고도 천산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입도공월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 적들이 포진한 곳입니다.”
“이미 천라지망을 구축하고 먹잇감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말이구려.”
현운 진인이 까칠까칠한 턱수염을 쓸며 하는 말에 제갈의현과 옥청선자가 쓰게 웃었다.
“교주님께선 움직이지 못하세요. 혈마를 상대하기 위해 수련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천평야에서 벌어진 정마대전의 결과는 강엽에게도 경각심을 안겨주었다.
해서 당문의 터전을 천산으로 옮기자마자 외부와의 연통을 끊다시피하며 수련에 몰두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적들은 신교의 고수들이 바로 오기 힘든 곳에 있는 만큼 우리 힘으로 뚫고 가야 합니다. 쉽진 않을 거예요. 적들의 숫자는 오천을 넘었습니다.”
“.......”
설사 내공을 익히지 않은 병사라고 해도 오천이 모인다면 어지간한 대문파는 으깨버릴 수 있다.
한데 내공을 익힌 마교도 오천이 모이면 그 힘은 가히 파천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적들은 두 명의 교왕이 이끌고 있고, 다수의 마수가 포진했어요.”
“우리는 소수정예로 맞서야겠구려.”
하지만 무당과 화산, 제갈세가의 힘을 합쳐도 오천의 병력을 깨부수는 건 역부족이었다.
“아뇨. 우리도 병력이 있어요.”
“음? 어디서... 아, 낭인전이 있었군.”
만약 낭왕이 부상을 털고 일어나서 낭인전의 전력을 하나로 모았다면 병력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지.
홍가려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들 말고 다른 우군도 있습니다. 그들의 힘까지 빌린다면 해볼 만할 거예요. 다만 손을 맞춰본 경험이 없으니 지휘는 총군사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바라던 바요. 한데 다른 우군이 어떤 자들이오?”
홍가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북해빙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