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35화 (435/450)
  • 87화. 지옥 (1)

    “아군이 대패했다고?”

    사천의 평원에서 펼쳐진 정마대전.

    보급을 책임지느라 후방에 머물렀던 당천경은 비보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모인 당문의 중진들도 경악하는 가운데 소식을 가져온 무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맹주님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패했다고 합니다. 또 시뻘건 파도가 일어나서 아군을 휩쓸었다고....”

    그 역시 보고를 올리고도 긴가민가하는 눈초리였다.

    당천경이 다시 물었다.

    “너희가 발견한 사람이 정말 아미파의 소창후인가? 다른 사람을 보고 헷갈린 건 아니냐?”

    “예, 확실합니다. 일전에 본문을 찾아왔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횡설수설하는데, 도통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전장에서 여기까진 어떻게 도망쳤지?”

    어지간한 왕국의 영토에 필적하는 사천땅이었다.

    대전이 같은 사천땅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당가타까지 오려면 며칠은 걸릴 터.

    “그게... 온통 깜깜한 동굴 같은 곳을 지나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가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놈, 어물쩍 대답하지 마라!”

    당천경이 탁자를 쾅 내려치면서 으르렁거리자 화들짝 놀란 무사가 급히 대답했다.

    “처, 천마가 도와줬다고 합니다!”

    “천마?”

    당천경만 놀란 게 아니었다. 중진들도 뜨악한 얼굴로 탄식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무사가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소창후는 전장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천마를 자처한 자 역시 홀연히 사라졌고요. 다만 그자가 떠나기 전에 살아남으면 천산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천산, 천산이라....”

    당천경이 턱을 매만지며 뇌까릴 때, 당우경이 감격하며 말했다.

    “조카 사위가 도와주려나 봅니다.”

    “누가 조카 사위라는 거냐?”

    “형님!”

    답답해하는 당우경을 무시한 당천경이 중진들을 쭉 둘러봤다.

    “소창후의 말대로라면 적들이 당가타에 쳐들어올 걸세.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문주님!”

    “적들이 얼마나 쳐들어와도 막겠습니다. 당가타를 요새 삼아 농성한다면...!”

    “우린 하루도 못 버틸 거다.”

    당천경의 말에 질식할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팔대교왕 하나쯤은 능히 쓰러트릴 수 있다. 둘이라면 고전해도 막을 순 있겠지. 하나 그 이상이 몰려온다면, 아니 혈마나 호교사천 중 한 명만 와도 우리 힘으로는 못 막는다.”

    문주로서 이런 말을 하자니 자괴감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은 강대했고, 당문은 한없이 무력했으니까.

    “활명원주.”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침묵에 빠진 아우를 부른다.

    “여인들과 아이들을 피신시켜라.”

    “형님, 어찌 그런 말씀을...!”

    “말 아직 안 끝났다. 활명원의 환자들도 같이 피신시키도록. 본문의 사정으로 그들이 다쳐선 아니 될 것이야. 그들을 살리는 게 네 일이다.”

    활명원에 신세를 지는 자들은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는 무림맹원들.

    가문의 미래인 아이들과 그들을 피신시키라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여기서 죽으실 생각입니까?”

    “무릇 일가의 수장이 피난을 갈 수는 없는 법. 가문을 끝까지 수호하는 것이 문주의 의무다.”

    “하면 저도 남겠습니다. 저도 가문의 일원입니다!”

    “멍청한 놈! 네가 아니면 누가 본문의 후사를 잇겠느냐? 본문의 동량이 될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며 훗날을 기약하는 게 네 역할이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당천경이 노기를 드러내며 윽박지르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당우경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제 모든 걸 물려받은 아이가 있습니다.”

    “너?”

    “형님이 부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정아는, 형님의 딸은 이미 가문의 비전을 물려받았습니다.”

    “내겐 딸자식이 없다.”

    “형님!”

    “듣기 싫다. 설령 네 말이 맞다고 한들 아이들과 환자들을 내팽개치겠다는 말이냐?”

    “그들을 천산으로 보내십시오. 천마... 형님의 사위라면 분명히 받아줄 겁니다.”

    딸의 존재를 부정한 당천경조차 그 말엔 멈칫했다.

    당금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일월신교가 있는 천산부터 떠올릴 터.

    당우경이 절절히 호소했다.

    “형님도 괴로우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형님이 그 아이를 부정해도 이젠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무림맹이 패망했으니 이 땅의 정기는 사라지고 사마외도가 판치는 마도천하가 도래하리라.

    가문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당묘정의 존재를 부정하고 호적에서 팠지만, 가장 고통스러워한 게 당천경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잘게 경련하는 당천경의 눈매를 본 당우경이 무어라 말하려는 그때.

    “...이미 늦은 것 같구나.”

    “어찌 이런?”

    무언가 감지한 듯 장탄식을 토하는 두 사람.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중진들을 향해 당천경이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적들이 쳐들어왔다. 무사들을 집결...!”

    댕댕댕댕댕댕댕-!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경종음.

    그제서야 당문의 중진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급한 안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됩니다. 당가타까지 한달음에 오다니!”

    “...일전에 강엽, 그 녀석이 말한 적 있었지. 입도공월은 본디 모산혈조의 술법이었다고.”

    “예? 그럼?”

    “소창후가 발견된 게 어젯밤이었지. 정신을 차린 게 한 시진 전이고. 혈교가 입도공월을 갖고 있다면 하루 만에 뚝딱 오는 건 일도 아닐 게다.”

    “으음!”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문을 떠나라. 지금은 너밖에 그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느니라.”

    “어디로 떠납니까?”

    “...천산.”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당천경이 이마를 쓸어올렸다.

    “비겁하지만 인정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겠구나. 부디 강엽 그 친구가 자비를 베풀어주길....”

    * * *

    “참 공략하기 어렵게 생겼군. 마치 산 하나를 깎아서 요새로 쓰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새끼야.”

    당가타를 목전에 둔 두 흑립 남녀.

    가죽 갑옷을 입은 중년인이 침중하게 중얼거리는데, 늘씬한 교구를 지닌 여인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는 당문의 무사를 허공섭물로 띄운 여인이 그의 목에 송곳니를 박았다.

    “끄아아악!”

    쭈와아아아압!

    순식간에 목내이가 된 무사를 멀리 내던진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후훗, 젊어서 그런지 맛이 좋은걸. 몸에 활기가 돌아. 이게 다 주인님께서 내려주신 은총 덕분이지.”

    “흡혈귀가 된 것 말이군.”

    “그분의 은총이 없었다면 말단 교성이었던 우리가 교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어? 물론 윗대가리들이 뒈져서 자리가 비긴 했지만.”

    “다 좋은 건 아니지 않나.”

    혈마가 자신의 피를 따라주면서 자질이 있던 몇몇 마인들이 흡혈귀로 재탄생한 것이다.

    다만 모두가 흡혈귀가 된 건 아니었다. 흡혈귀가 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자들도 제법 있었던 것.

    심지어 그렇게 흡혈귀가 된 자들도,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강해졌을지언정 약점이 생기고 말았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교도들을 힐끔 곁눈질한 중년인이 당문 무사의 피를 빨면서 첨언했다.

    “낮에는 한없이 약해진다. 불타는 고통에 휩싸이다가 끝내는 끔찍하게 죽어버린단 말이야.”

    “하, 걱정도 많네. 피를 빨면 괜찮잖아?”

    “아무 피나 빤다고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고수의 피를 빨아야 간신히 버티는 거잖나. 심지어 무공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지.”

    “상관없어. 눈앞에 있는 건 팔대세가야. 저놈들 피를 죄다 먹어치우면 한동안은 괜찮겠지.”

    쿠와아아아아앙!

    수백의 마인들이 당가타를 공격하면서 굉음이 울리고 매캐한 독연이 피어올랐다.

    “아쉽군. 목옥을 지었다면 화공을 퍼부었을 것을. 대부분이 석옥이라서 화공이 여의치 않아.”

    게다가 당가타 전체가 타강을 끼고 지어진 만큼 전반적으로 습한 기운이 강했다.

    맹화유를 끼얹고 불화살을 퍼부어도 당가타 전체를 불사르는 것은 어렵겠지.

    해서 하는 수 없이 정공법을 취했는데, 당문도 결연히 맞섰기 때문에 피해가 염왕채마냥 줄줄 늘어났다.

    깍지를 낀 손을 위로 뻗으며 기지개를 켠 여인이 입술을 틀어올렸다.

    “오라버니, 슬슬 우리도 나서는 게 어떨까? 땅거미가 지고 있잖아?”

    석양이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면서, 불타는 것처럼 시뻘갰던 하늘 역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완연한 밤이 되면서 흡혈귀의 흉성에 눈을 뜬 두 교왕이 혈안을 빛내면서 송곳니를 드러냈다.

    박쥐처럼 밤하늘을 건너뛰는 경공으로 순식간에 적진에 파고든 그들이 몸을 일으킨 순간.

    “어엇!”

    그들을 발견한 당문의 무인들이 휘둥그레진 눈빛을 하다 이내 진상을 깨닫고 암기를 던졌다.

    표창과 수리검, 우모침 등 수십 종의 암기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두 교왕이 팔을 휘저었다.

    흡자결의 묘리로 암기들을 빨아들인 두 교왕이 히죽 웃으면서 암기를 탁탁 털어낸다.

    “누가 당문 아니랄까 봐 암기도 다양하게 쓰네.”

    콰직!

    채찍처럼 휘어진 여인의 팔이 한 무사의 목울대를 뜯어내고, 거대한 참마도가 또 다른 무사를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도양단한다.

    “이... 혈교의 사악한 종자들이!”

    혈족의 죽음에 분노한 무사들이 나서자 여인의 손에서 쏘아진 붉은 섬광이 그들의 미간을 뚫었다.

    피가 묻은 손을 쪽쪽 핥은 여인이 고혹적으로 웃으며 당문의 무사들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무사들이 바르르 떨 때, 중년인은 참마도를 짊어진 채 석옥 위로 올랐다.

    “난 다른 쪽을 공략하겠다.”

    “어머, 따로 행동하게?”

    “그편이 효율적이니까. 우리가 같이 다니는 것보단 따로 움직여야 더 빨리 공략할 수 있다.”

    “동의. 그럼 난 이 아가들하고 놀아볼까?”

    여인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으아아아아악!

    사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전황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수백의 적들이 화살을 쏟아붓고 악다구니로 오를 때도 능히 버텼던 방어선이 눈녹듯 무너졌다.

    그리고 일 각이 채 되기도 전에 비보가 전해졌다.

    “급보! 이선이 무너졌습니다!”

    “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상경 어르신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말을 전하는 전령도 억장이 무너진 표정으로 절망할 만큼 전장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당문주의 육촌이자 같은 항렬인 당상경마저 죽었다는 소식에 중진들의 낯빛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교왕인가.”

    “문주, 상경 조카까지 죽었다면 아랫것들로는 무리일세. 여기 있는 모두가 합공해야 하네.”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원의 고수들까지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나온 상황.

    잇따른 비보에 눈을 질끈 감았던 당천경이 굳건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공수했다.

    “숙부님들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 소질이 불민한 탓에 가문을 위기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게. 이게 어찌 문주의 탓이겠나. 이건...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재해일세.”

    청려장을 짚은 노인들이 노구를 일으키며 당천경을 다독이고,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결기를 드러냈다.

    “이 늙은이들도 가문과 운명을 함께할 걸세. 그래도 늘그막에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구먼.”

    “허허, 누가 아니라오. 언제나 엄격하고 근엄한 척했던 조카 녀석이 쩔쩔매는 것도 볼 만하구려.”

    굳이 일일이 의사를 나누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지 안다는 듯 방위를 점했다.

    독과 암기, 각종 기문병기로 무장한 원로들과 중진들이 천고의 절진을 그리면서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너희들의 희생은 잊지 않으마.’

    진법을 준비하는 동안 가문의 무사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적들의 발목을 잡고 있을 터.

    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적들을 여기서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적들이 들어왔다.

    두 명의 남녀를 필두로 한 핏빛의 무복을 걸친 혈교도들의 등장에 당문의 중진들은 무겁게 침음했다.

    혈교의 선두에서 요사한 기운을 흩뿌리는 두 남녀로 인해 기혈이 울렁거렸기 때문.

    “어라, 당문엔 삼화취정의 고수가 두 명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헛소문이었던 것 같네. 세 명이나 있잖아?”

    당천경을 제외하고도 원로들 중에 삼화취정을 이룬 고수들이 두 명이나 있었던 것.

    그때 중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명인 것 같은데?”

    “응? 세 명이 아니라?”

    “알려진 자들은 당문주와 그 동생밖에 없다. 중늙은이들 말고 한 명이 더 있어야 했어.”

    “아... 그러니까 둘 중 하나가 튀었다는 뜻? 당문주가 튀진 않았을 테니 동생이 튀었겠네.”

    “가문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으니 훗날을 대비했겠지. 지금쯤 가문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르겠어.”

    “이 작자들 다 죽이고 잡아오면 돼.”

    여인이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내딛는 순간, 육방에서 암기가 떨어졌다.

    하늘과 땅,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수백 종의 암기들이 쏟아지고 수십 종의 독기가 엉킨다.

    순식간에 독에 침범당한 혈교도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고, 암기를 맞고 쓰러진다.

    “쳇, 귀찮은 짓을...!”

    여인과 중년인이 혀를 차면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본 당천경이 외쳤다.

    “남구(南九)! 화리목(火離目)!”

    오행과 팔괘의 이치에 따라 돌아가는 절진.

    당천경 역시 공력을 있는 대로 쥐어짜면서 당문 최후의 비기인 만천화우를 펼쳤다.

    독이 불과 만나면서 수증기를 피어올리고, 하늘에선 암기 세례가 빗발치는 독암의 지옥.

    그러나 맥없이 쓰러지는 혈교도들과 달리 두 남녀는 피해를 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암기를 맞고 독에 중독된 상태에서도 악다구니를 쓰며 당문의 중진들을 격살했다.

    “끄어억!”

    “늙은이는 취향이 아니지만!”

    주름지고 푸석한 피부에 송곳니를 박고, 피를 빨아들이면서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상대가 재생의 공능을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당천경이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인이 중진들을 사냥하는 동안 독연을 빠져나온 중년인이 참마도를 휘둘렀던 것이다.

    단숨에 잘려나간 호신강기 속에서 혈화가 피어난다.

    “큭...!”

    가까스로 전권을 빠져나온 당천경이 다시 한번 만천화우를 전개했지만,

    -심극 혈사자진압세(血獅子鎭壓勢).

    독연을 맞고 반쯤 녹아버린 몰골로 중년인이 펼친 비장의 절초가 만천화우를 갈가리 찢었다.

    그것도 모자라 중년인의 족격을 정통으로 맞고 전각에 처박히기까지.

    “문주님!”

    “이보게, 조카!”

    아직 살아있는 중진들이 목놓아 부르짖는 가운데 당천경을 날려버린 중년인이 어깨를 주물렀다.

    “제법이었다, 당문주. 우리에게 재생력이 없었다면 아까 허망하게 뒈졌겠군.”

    “쿨럭, 이 괴물들이....”

    벽면을 허물고 그 안에 처박힌 당천경이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피 섞인 기침을 뱉었다.

    안색이 하얗게 뜨고 눈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게 영락없이 명줄이 경각에 달린 모습.

    “위대하신 주인님, 혈신의 은총이지. 우린 선택받은 귀족으로 천하를 지배할 거다.”

    어깨 관절을 뚜둑 움직인 중년인이 참마도의 칼날을 당천경의 심장에 겨누었다.

    하지만 막상 찌르지는 못했다.

    쿠와아아아아앙!

    갑자기 하늘을 찢고 나온 거대한 일권.

    검붉은 마신의 등장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을 때, 하늘에서 울먹임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너?”

    포대기로 감싼 딸아이를 안고 있는 당묘정이 처참한 부친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힐 때.

    금실이 수놓인 하얀 장삼을 펄럭인 청년이,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눈으로 전장을 굽어보았다.

    “이번엔 늦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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