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34화 (434/450)

86화. 혈마 (3)

인과를 뒤집는 심상절예라.

혈마에게 목이 잡힌 채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염왕은 그 말을 곱씹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고로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

그러나 혈마의 심상절예는 인과를 뒤집어 염왕의 인지와 상관없이 심맥을 베고 지나갔다.

심상지경에 오른 고수는 천지와 소통하며 자연의 섭리에 자신의 법을 끼워넣는 존재.

그러나 혈마는 그조차 뛰어넘어, 섭리 바깥에서 자신의 법칙을 전가의 보도마냥 휘둘렀다.

일단 벤다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원인을 나중에 끼어넣어 승패를 간단히 뒤집은 것.

그러나 혈마는 염왕의 목숨을 취하는 대신, 그와 시선을 맞대면서 질문을 던졌다.

“심상지경이 뭐라고 생각하나?”

“...쿨럭, 뭐?”

“아니, 질문이 좀 잘못됐는가. 이렇게 물으마. 심상절예가 무공이라고 생각하느냐?”

“....”

“넌 무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무도의 틀 안에서 심상절예를 규명한 건가.”

“아니...라는 건가?”

“아니다.”

딱 잘라 단언한 혈마가 큭큭 웃었다.

붉은 입술 끄트머리가 작게 올라가면서 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심상절예는 섭리를 조각하는 권능이다.”

“....”

염왕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내려다본 혈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긴 심상절예를 여기까지 발전시켰다면 알고 있었겠지. 심상절예에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지....”

본래라면 불가능한, 상리를 초월한 절기.

단지 적을 죽이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혈마는 말하고 있었다.

“생각해봐라. 자신의 무공관을 근원 삼아 현실에 소망을 투영하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그렇기에 심상절예는 그 자체로 정마나 흑백의 논리와 상관없는 역천의 수법이다.

시전자의 힘이 한없이 광대하고 무변하다면 하늘이 정한 섭리를 뒤집을 수도 있을 터.

당연하지 않은 게 당연하게 되고, 상식이라 믿었던 관념이 하루 아침에 비상식이 되리라.

“궁금하지 않나? 인과를 바꾸는 심상절예가 천하를 휩쓸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영원히 살며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혈마는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을, 그의 눈에 어린 불타는 지옥을 보며 염왕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지 않았나. 천리에 도전하겠다고. 저 빌어먹을 하늘이 정한 법칙을 내 힘으로 뒤집을 거다.”

“그러니까, 무엇을 위해서...!”

“이유는 없다. 난 그냥 천하가 불타는 걸 보고 싶을 뿐이거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질서와 상식을 무너뜨리고 끝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옛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쌓아올린 도덕과 관념이 사라지고, 만인이 영원히 투쟁하는 강자존.

“겨우 그딴....”

“하하, 무림이야말로 강자존의 세상이 아닌가? 난 그 개념을 더 넓힐 뿐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세상은 얼마나 크고 아름답겠나?”

“흥, 아름답긴 개뿔.”

“아, 그래. 강자들이 늘어나면 먹잇감도 늘어나겠군. 영원한 삶이 지루할 틈은 없겠구나.”

염왕을 들어올린 혈마가 찢어질 듯 웃으며 그 목에 송곳니를 들이대는 바로 그 순간.

불현듯 이를 들이대다 말고 고개를 들어올린 혈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입도공월?”

“봉인술식을 전개하겠습니다.”

검마가 흑검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천하팔존 둘을 비롯한 구파와 팔가의 수장들을 상대하는 바람에 피로에 찌든 기색이었지만, 보검처럼 날이 선 눈빛은 형형하기만 하다.

“천마가 난입하는 순간에 봉인술식을 전개한다면, 놈을 공간의 틈새에 붙잡을 수....”

“아니.”

혈마의 눈매가 역팔자로 휘었다.

“이건 좀 다르구나. 저쪽에서 연 게 아니야. 이쪽에서 입도공월의 문을 열었다.”

“그럼 천마가 이미 이쪽에...!”

모산혈조와 혈옥귀군이 사망한 지금, 세상에서 입도공월을 다룰 수 있는 자는 두 사람뿐.

한데 전장이 있는 곳에서 입도공월을 열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굳이 술사들을 따로 빼두면서 봉인술식을 준비한 것은 천마를 입도공월의 틈에 가두기 위한 것.

하지만 이미 전장에 있다면 봉인술식을 전개해봤자 당초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다.

잠시 턱을 긁적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혈마가 불현듯 기광을 빛내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 답지 않게 깜찍한 짓을 벌였군.”

“주인이시여?”

“술사들에게 전해라. 봉인술식을 펼치라고. 천마를 그 안에 가두지 못해도 상관없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온갖 제약을 건너뛰고 본질을 짚는 혈마의 직관이라면 작금에 일어난 사태의 진실도 깨달았을 터.

검마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얌전히 눈을 감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짧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럴 순 없지.”

여태 혈마의 손에 잡혀있던 염왕이 살벌한 안광을 토해내며 목을 잡은 손을 풀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창백했던 안색에 혈색이 돌아오면서 압도적인 기파를 뿜어낸다.

“진원을...!”

“목숨을 헌납하는 것보단 낫겠지.”

쿠구구구구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목을 붙잡은 혈마의 손을 조금씩 밀어낸다.

심상지경의 고수가 원기를 땔감 삼아 자아내는 거력.

유성처럼 덧없고 짧지만, 빛나는 순간에는 한없이 눈부시게 타오르는 진원지기.

미간을 좁힌 혈마를 한순간이나마 뒤로 밀쳐낸 염왕이 씩 웃으며 심상절예를 펼쳤다.

검마가 비명처럼 외치면서 흑검을 출수했지만 염왕의 움직임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자기 자신을 자양분 삼아 펼치는 심상절예가, 두 사람을 건너뛰고 멀리 있는 곳을 친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혼백을 통째로 쥐어짜내는 듯한 끔찍한 비명.

직후에 흑검이 염왕의 육신을 베었지만, 이미 염왕의 육신은 수증기처럼 기화(氣化)된 지 오래였다.

육신의 손괴를 개의치 않고 진원을 바친 심상절예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술사들을 집어삼킨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술사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면서 혈교가 준비한 술책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 무림맹의 인사들을 감싸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염왕...!”

-장담하지. 너희가 천하를 쥐는 일 따위는 없을 거다.

바람결에 섞인 목소리가 가락처럼 귓가를 파고든다.

검마가 뿌득 이를 가는 반면, 혈마는 팔짱을 끼며 웃어넘겼다.

“인정하마. 방심해서 한 방 먹었어. 하지만 어차피 무림은 멸망한다. 그들을 살린다고 뭔가 변할 것 같나?”

-심상절예 수라군생.

검지와 중지를 맞닥뜨려 딱 소리를 내자 핏물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갖가지 요마들을 토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장에서 죽은 무인들까지 적아를 막론하고 핏빛의 강시로 부활했다.

-구워어어어어어!

검은자위 없이 안구 전체가 붉어지고 전신에 핏줄이 불거진 흉물스러운 몰골로 괴성을 지르는 역천의 군세.

혈마의 종이 된 그들이 전장에 남은 무림맹의 무인들을 휩쓸면서 역병처럼 세를 불려갔다.

“끄아아아아악!”

“이, 이러지 마시오! 안 돼...!”

애원하고 발악해봐도 혈마가 불러낸 군세 앞에선 하잘 것 없는 미물이 될 뿐.

결연하게 맞섰던 자들조차 이내 핏빛의 파도에 뒤덮인 채 군세의 일부로 전락했다.

-.......

“착각하지 마라, 염왕.”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해에 말문이 막힌 염왕의 의념을 향해 혈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진심이 됐을 때부터 이딴 전쟁은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그나마 너는 좀 괜찮은 상대였다만, 그래도 필부의 한계를 벗진 못했군.”

무림의 명운이 걸린 정마대전을 한낱 유흥으로 치부하는 폭거에 염왕은 침묵을 견지했다.

눈앞의 마인은,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으로밖에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광인이었다.

대의도, 신념도 없이 그저 세상을 불태우고 지옥을 만들고 싶어 환장한 악종(惡種).

-심상세계에서 천 년을 수련했다더니 미쳐버렸군. 아니, 처음부터 미쳐 있었나?

“그럴지도 모르지.”

혈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마도천하는 마도가 군림하는 게 아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과 악만 남은 세상이 마도천하지. 난 불구대천의 절대악으로서 천하를 무너뜨릴 거다.”

-.......

“천마에게 전하도록.”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일으킨 핏빛의 해일을 고요한 눈으로 지켜보는 혈마였다.

염왕이 마음을 죽여놨던 마수의 거체 역시 핏빛 해일에 덮이고, 그 자리에 피로 물든 새로운 마수가 나타나서 무림맹의 무인들을 덮친다.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조용히 하늘로 떠오른 혈마가 선언했다.

“놈의 도전을 즐겁게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 * *

-애송이.

귓가를 간질거리는 목소리.

억지로 입도공월을 연 후유증으로 탈력감에 시달렸던 강엽의 눈이 커졌다.

“선배님?”

-용케 문을 열었구나.

“...여기엔 원래 입도공월과 연결된 문이 있었습니다. 문을 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죠.”

만약 문이 없는 곳에서 억지로 입도공월을 썼다면 적잖은 공력을 소모해야 했을 터.

원래의 몸이라면 모를까, 타인의 몸을 빌린 지금으로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너무 작지 않나? 이래서야 열 명도 통과하지 못하겠군.

“그건....”

애초에 입도공월이 여럿이 쓸 수 없는 술법임을 감안하면 염왕의 지적은 타당하지 않았다.

당연히 강엽도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군. 무작위로 들여보낼 생각이었나. 하긴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까진 무리였겠지.

“...바로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강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약 본신으로 왔다면 염왕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들었지만 염왕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애송이, 넌 신이 아니다. 꽤 강하기는 해도 전지전능하진 않지. 그때는 그 판단이 맞았어.

만약 강엽이 입도공월을 열고 본신으로 왔다면 뭘 해보기도 전에 함정에 걸렸겠지.

염왕도 목숨을 버리고 나서야 혈마와 검마를 넘어 혈교의 계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네가 본신으로 왔더라도 결과는 변치 않았을 거다. 혈마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지금 상태에선 필승을 장담하지 못해.

염왕이 신교를 떠나기 전, 두 사람은 혈마의 무공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혈마가 심상세계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이 어떤 수에 당했는지 전한 염왕은 강엽을 토닥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 말했지?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때부터 난 혈마와 싸울 생각이었다.

“하후진, 그 녀석이 슬퍼할 겁니다.”

-...그렇겠지. 바보 제자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여한은 없다. 강자와 붙어봤으니까.

혈마의 인성이 말종이라 해도 그의 무공이 천리를 농락할 만큼 고강한 것은 불변의 사실.

-점창의 장문인을 포함한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옮겨놨다. 참 희한하게도...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으로 무애(無碍)의 경지에 닿았군. 혈마 그놈이 말한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강엽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비록 육신을 잃고 의념만 남았지만, 지금의 염왕은 현실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쿡쿡 웃으면서 염왕이 말했다.

-아마 이게 옛 선맥의 수련자들이 일컬었던 우화등선이겠지. 난 죽는 게 아니라 법칙을 뛰어넘은 거다. 그러니까 그런 나라 잃은 표정 따위는 집어치워라.

“...이제 어쩌실 겁니까?”

-마지막으로 제자 얼굴만 보고 가련다.

“오로목제에 있을 겁니다.”

-안다. 녀석의 존재가 느껴져.

그 순간 강엽은 염왕이 시선을 멀리 향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의념의 눈으로 전장 전역을 굽어보고 있었다.

전장에서 도망친 생존자들, 그중엔 척마대의 지인들과 무림맹의 수뇌부들도 있었다.

청수를 비롯한 각파의 후기지수들이 정신을 잃은 어른들을 업은 채 달려오고 있었던 것.

-저들에게 남은 미래는 가혹하겠지. 저들을 구해달라고 하진 않겠다. 네가 그럴 필요까진 없으니까.

정파 무림이 신교의 그늘에 들어온다면 몰라도, 강엽이 그들을 끝까지 도와줄 의리는 없다.

퇴로를 열어준 것만 해도 과분한 배려라는 것을 염왕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독보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를 바란다.

“그럴 겁니다.”

강엽의 대답에 염왕은 호탕하게 웃는 소리를 내며 그의 등짝을 툭 치며 멀어졌다.

-그동안 함께 싸워서 즐거웠다, 강엽.

바람처럼 사라진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강엽은 그가 듣는다고 생각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도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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