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혈세 (6)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느지막한 오후.
강엽은 스승인 송계학과 만나서 다과를 즐겼다.
무림맹을 탈출한 이후, 백담서원이 해코지를 당할 것을 우려해서 송계학과 송하영을 피신시킨 바.
이후 일월신교를 장악한 이후 두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한갓진 곳에 있는 안가를 제공했다.
“지내는 건 어떠십니까? 불편한 건 없으시고요?”
“불편할 게 무에 있겠느냐. 높으신 분을 제자로 둔 덕에 너무 편해서 탈인 것을.”
“스승님껜 늘 죄송할 뿐입니다.”
강엽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두 사람이었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아니 그 이상의 편의를 제공하긴 했지만 만리타향에서 사는 게 쉬울 리 만무.
얼굴에 드리운 수심만으로도 스승의 고심이 느껴진다.
송계학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오히려 네게 고마워해야지.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조손이 어찌 됐을지....”
갑작스레 천하를 덮친 재앙으로 인해 이제 안전한 곳은 없었다.
만약 강엽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어찌 살았을까.
“다만 영아는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지인들의 소식이 끊겼으니 그럴 만하지만...”
“음.”
이건 강엽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지인들까지 데려온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그보다 이 땅도 환난을 겪는다고 들었느니라.”
“아랫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지요. 쉽지 않긴 한데 그래도 차근차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세상으로 나가는 게냐?”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선언. 송계학 역시 제자가 어떤 포부를 품었는지 알고 있었다.
강엽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넌 군림에 욕심이 없을 줄 알았건만.”
“전 지금도 만족합니다. 다만 혈교와 전쟁을 하면 저희도 피를 흘릴 테니 보상을 챙겨야지요.”
혈교에게서 천하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강엽은 강호 무림 전체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정파가 망한다고 보는 게로구나.”
“....”
강엽이 침묵하자 송계학은 탄식했다.
혈교가 승리한다면 어마어마한 피가 흐를 테니, 중원 진출이 늦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터.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다. 뒤가 없으니 신중히 결정해야겠지. 하나 움직일 땐 망설이지 말거라. 손자도 풍림화산의 이치를 말하지 않았느냐.”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
신교의 무인들을 이끌고 중원에 진출한다면 최대한 빨리 결착을 지어야 하리라.
그렇게 송계학이 돌아간 뒤, 강엽은 유유자적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이면 한창 싸우고 있으려나.”
하후진을 비롯한 칠성좌를 파견한 게 며칠 전의 일.
곤륜파를 무너뜨린 마수들의 진군 속도를 감안하면 이미 오로목제에 닿았을지도 몰랐다.
서로 다른 수십 종의 마수가 죽이 맞아서 무리를 이룰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일련의 움직임에서 인위적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
“안 가봐도 되겠어?”
문득 어깨에 닿는 섬섬옥수.
시선을 들어올리자 백서희가 흐릿하게 웃으면서 강엽의 머리를 살짝 껴안았다.
크게 부푼 배에 머리를 기댄 강엽은 아이의 태동을 느끼면서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 정도는 칠성좌끼리 해결할 수 있거든. 그보다 이렇게 움직여도 돼?”
“흐음, 괜찮아. 적당한 운동은 도움이 되는걸. 근데 오로목제는 어떻게 된 거야?”
“혈교의 수작질이지. 한창 무림맹과 싸울 때 우리가 움직인다면 후방이 위험해지니까.”
혈마가 일으킨 재앙은 천산을 침범하지 못하지만, 그 바깥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요마의 경우는 중원보다도 많이 출몰했다.
“어떤 의미에선 우리에게도 잘 된 일이야.”
“어째서?”
“강적을 상대하면서 손발을 맞춰볼 수 있으니까. 신교가 진정으로 하나로 뭉치려면 공공의 적을 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강엽이 교주위에 오르고 반년이 지난 지금도 일행과 기존의 세력은 완전히 융화되진 못했다.
유가의 씨족을 비롯한 기존의 권력자들에겐 강엽 일행이 굴러들어온 돌처럼 느껴졌을 터.
“물론 공공의 적이 나타난다고 바로 갈등이 봉합되진 않겠지. 섞이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그래도 수뇌부끼리 통하는 게 있으면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지지 않겠는가.
혈교가 무림맹과 싸우느라 바쁜 이때야말로 내부를 정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만약 이번 싸움이 전화위복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그런데... 음?”
“완 노사님께서 오셨네.”
다른 칠성좌들과 달리 완안극은 강엽의 호위 겸 신교의 대총관으로 교내에 남았다.
그런 그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다는 건 급하게 보고할 거리가 생겼다는 의미.
완안극이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월성좌 완안극, 삼가 지존과 대부인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지?”
“중원에 나간 세작들이 보고를 올렸습니다. 무림맹과 혈교가 정면으로 붙었다고 합니다.”
“......!”
두 사람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자 완안극이 품에서 주섬주섬 반지를 꺼냈다.
예전에 강엽이 북해까지 갔을 때 지인들과 연통하기 위해 썼던 법구.
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세작들에게 법구를 나눠주고, 완안극에게 관리를 맡겼다.
반지를 받은 강엽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한판 붙는단 말이지....”
여태까지 사천 전역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붙었다면, 지금부턴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백서희가 긴장한 낯빛으로 물었다.
“어쩔 거야?”
만약 강엽이 마음만 먹는다면 입도공월의 술로 전장까지 한달음에 갈 수 있을 터.
한동안 손가락으로 탁자만 두드린 강엽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지. 느낌이 안 좋아.”
강엽에게도 나름의 입장이 있는 만큼 당장 개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점창과 당문이 위기에 처한다면 퇴로 정도는 열어줄 생각이었다.
손 안에서 반지를 굴린 강엽이 의념을 집중했다.
[엇, 워, 월성좌님?]
“교주다.”
[허억! 월영(月影) 삼백팔호가 사, 삼가 교주님을...!]
“됐고, 바쁘니 허례허식은 생략하지. 싸움이 시작됐다고 들었다. 전황을 살필 테니 마음을 비우도록.”
[예... 그, 근데 마음을 비우란 말씀이 잘...?]
“이건 직접 겪는 게 빠르겠군.”
눈을 반개한 채 반지와 연결된 의념의 기를 거슬러 올라간 강엽은 당혹감에 사로잡힌 세작을 감지했다.
천산에서 사천까지는 무려 수천 리의 간극이 있었지만, 지금의 강엽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
‘광명마교주가 하던 짓이 이것과 비슷하겠지.’
사도의 몸에 원영신으로 강림했던 광명마교주.
세작의 그릇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원영신을 담을 순 없었지만, 의식을 투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그렇게 세작의 몸을 잠시 빌린 강엽은 혼란스러운 전장을 눈에 담았다.
* * *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과 악다구니.
세작의 몸에서 눈을 뜬 강엽은 별안간 뒤에서 달려오는 기척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눈이 시뻘게진 혈교의 무인이 칼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한 줄기 빛살이 번쩍였다.
몸이 쩍 갈라지며 쓰러진 적을 일별한 강엽은 유엽도에 묻은 피를 탁 털어냈다.
기감은 쪼그라들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 게 마치 포차 다 떼고 장기를 두는 기분.
‘무위는 대충 일류를 턱걸이로 넘은 수준. 적당히 남들에게 업신여겨지지 않을 정도인가.’
허리춤에 동천패가 걸린 것을 보면 신분을 숨기고 낭인전에 잠입한 듯했다.
거기까지 파악한 강엽은 관절을 뚜둑 꺾으며 완만한 구릉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수의 몸을 빌렸음에도 앞길을 막은 적들 누구도 일초를 감당하지 못하고 널브러진다.
강엽의 경험과 식견 덕분에 원래 무위를 초월하여 절정의 문턱까지 간 것.
“제법이구나! 하지만 여기까지... 컥!”
“조무래기랑 놀 시간 없다.”
자신 있게 막아선 혈령교위도 가차없이 베어버리면서 전장을 누빈 끝에 구릉에 올라섰다.
양측의 무인들이 흘린 피로 초목이 붉게 물든 가운데 무림맹과 혈교의 전력이 어지럽게 뒤얽힌 양상.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혈교의 병력이 무림맹의 병력을 크게 웃돌고 있었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 전장을 찬찬히 훑어본 강엽이 별안간 이채를 발했다.
머리에 백건을 두른 검수들이 척초를 찌르면서 혈교의 무인들을 벌집으로 만드는 광경.
선두에선 마찬가지로 백건을 두른 노인이 하얀 옷소매를 펄럭이며 적들을 격살하고 있다.
점창파의 위치를 파악한 강엽은 전장을 빙 둘러가서 혈교의 뒤를 쳤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기겁하는 적들의 목을 베며 길을 열어젖힌 끝에 노년의 검객과 맞닿았다.
“오랜만입니다, 장문인.”
“응? 자넨 누군가?”
“서희가 장문인을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네?”
지금은 정파에서도 배신자 취급을 받으면서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금기시되는 검후.
백서희를 친근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천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자네 정말...?”
“사정이 있어서 수하의 몸을 빌렸습니다.”
“...구릉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봤지. 기파에 걸맞지 않게 무공이 출중해서 눈여겨보고 있었네.”
“위에서 보니 무림맹이 불리하더군요.”
“후우, 그래... 그 빌어먹을 혈우 때문이지. 혈교의 종자들은 강해졌는데 무림맹은 식량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서 무인들이 배를 주린 채 싸우고 있다네.”
도사답지 않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종현 진인은 그 와중에도 적들을 쓰러트리면서 강엽에게 다가왔다.
“그 아이는 잘 있나? 설마 여기 온 건 아니겠지?”
“서희는 천산에 있습니다.”
“그래, 그런가....”
“구구절절 말씀드리기엔 상황이 좋지 않군요. 여차하면 서쪽의 숲으로 피하십시오.”
“거기에 뭐가 있나?”
“입도공월을 열겠습니다.”
“...결국 참전하진 않는군.”
실망했다기보다는 낙담한 기색이었다. 만약 강엽이 도우러 온다면 천군만마와 같지 않겠는가.
종현 진인의 입매를 타고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무림맹이 무슨 염치로 도와달라고 하겠는가. 자네를 버린 것이 무림맹인데....”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본교의 전력이 다른 데 묶여 있어서 지금은 신강을 못 벗어날 뿐이지요. 하지만 지금 보니 억지로 왔다면 자충수가 됐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게 무슨 소린가?”
“혈교가 대비를 해둔 것 같습니다.”
지금 몸으로는 정안을 쓰지 못하기에 전체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대기의 주력이 심상치 않았다.
혈교, 아니 혈마는 무림맹과 싸우는 중에도 혹시나 강엽이 난입할 가능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마수들을 떼거지로 보내서 신교의 발을 묶어두었다지만 만의 하나도 있었으니까.
‘이 녀석의 몸으로 오길 잘했군. 만약 내 몸으로 왔다면... 최악의 경우엔 낭패를 봤을지도 모르겠어.’
술법의 종류는 몰라도 천라지망처럼 수백 명의 주력을 집약한 악의가 느껴진다.
만약 무턱대고 왔다면 강엽의 존재를 알아채고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말하자 종현 진인의 노안에 어린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까... 혈교가 자네가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무림맹과 싸우는 이 전장에 함정을 팠다는 건가?”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자네 자의식이 좀 지나치게 비대한 것 아닌가?”
“.......”
“농담일세, 농담.”
“이런 때에 농담이 나오십니까?”
차갑게 식은 강엽의 눈빛에 종현 진인은 뻘쭘해졌는지 헛기침을 크흠 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적들을 착실히 베긴 했지만.
“사실 제갈 총군사도 혈교의 술사들이 뭔가 꾸미고 있다고 말했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봉인술과 비슷하다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는 그때였다.
-우오오오오오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득한 존재감이 전장을 질식시킬 것처럼 내려앉았다.
종현 진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건...!”
콰아아아아아앙!
말을 끝내기도 전에 거대한 인영이 포물선을 그리며 무림맹의 진영 한가운데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한 갑주로 무장한 거인.
말없이 전장을 둘러본 그가 기광을 발하자 마치 수십 개의 벽력탄을 터뜨린 것처럼 지면이 뒤집혔다.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가운데 무림맹의 무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휩쓸렸다.
“마수....”
강엽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는 그때.
공기 중의 수분이 말라가는 느낌과 함께 거대한 존재감이 뭇 사람들의 기감을 비집고 들어왔다.
창염을 휘두르는 염왕이, 마수와 충돌하면서 거인의 동체를 뒤로 날려버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무림맹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염왕이 어깨를 회전시키면서 대적을 노려봤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벙어리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