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30화 (430/450)
  • 85화. 혈세 (5)

    “화성좌님.”

    하후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교의 휘하 타격대 중 하나인 익염대(益炎隊)의 대주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성좌라....’

    아직은 낯설게 들렸다.

    염왕도문의 전인인 그가 일월신교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칠성좌의 자리를 꿰찰 줄이야.

    전임 화성좌인 동방하연이 물러나는 바람에 누군가는 그 자리에 올라야 했지만, 마땅한 적임자가 없는 탓에 하후진이 물망에 올랐다.

    ‘일사도는 일성좌가 되고, 완 할배는 월성좌가 됐으니... 뭐, 나쁘지만은 않은데.’

    호위장으로 강엽을 따라다녔지만, 하후진도 자신이 그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타고난 성품도 자유롭거니와, 염왕도문의 무공은 타인을 지키는 것보단 적을 격멸하는 것에 특화됐으니까.

    “역시 난 바깥에서 싸워야 체질에 맞아.”

    “예?”

    “아니, 혼잣말이다. 그보다 목표는?”

    “이쪽으로 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천산 바깥 신강의 황야로 나왔다.

    중원에 비해선 척박한 편이라고 해도 이 땅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전답과 임야는 있었다.

    “여긴 내 고향과 비슷하구먼.”

    “고향이요?”

    “하서주랑. 난 그쪽 태생이거든.”

    “아하... 하긴 그쪽 풍경이 비슷하긴 하군요. 속하도 하서주랑에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호오, 그럼 낭인전 시절에 만났을 수도 있겠는걸. 자고로 내가 낭인으로 활동할 적에... 헙.”

    낭인 시절에 조우한 신교의 무인들은 죄다 적이었다. 어쩌면 하후진이 죽인 자들 중에 익염대주의 지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후진이 그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자 익염대주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괘념치 마십시오. 신강 바깥으로 나간 자들은 강성파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저와 제 지인들은 그쪽 파벌은 아니었습니다.”

    신교가 어지러웠던 시절 무인들은 성군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훈에 혈안이 됐다.

    신강은 신교의 앞마당이었기에 경계를 넘어 섬서로 들어왔던 것.

    그 과정에서 사특한 무공을 익힌 마인들은 인신공양을 하거나 혈겁을 일으키기도 했다.

    “신교의 무인이라고 모두 인성이 망가지는 마공을 익힌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은 소수지요.”

    상승의 무공과 안정적인 환경이 있는데 굳이 마공을 익힐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신교의 무공은 패도를 지향하는 만큼 살기가 넘치긴 하지만, 익힌다고 무조건 인간성을 잃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신교의 일각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전 교주님의 조치가 반가웠습니다.”

    교주위에 오르자마자 강엽은 내부 단속이라는 미명하에 강성한 사마외도를 싹 걸러냈다.

    죄질이 나쁜 자들은 본보기를 위해 처형했으며, 그들이 익힌 마공 비급은 구덩이에 파묻고 불태웠다.

    -앞으로 인신공양을 하는 걸 금하며, 본 교주의 허락 없이 외부로 나가서 싸우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

    신교 역시 혈교의 인신공양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기에 반대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설상가상 사특한 마공을 익힌 자들 대부분이 이성군의 휘하에 들어갔기에 변명하기도 뭐한 상황.

    다만 강엽이 무턱대고 채찍만 휘두른 건 아니었다.

    -우린 형제들의 핏값을 받아낼 것이다. 조만간 때가 무르익으면 천하로 나가겠다.

    혈교에게 진 원한을 갚고,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는 오만한 선언.

    그러나 강엽의 말이 끝나는 순간, 광장에 모인 교도들은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질렀다.

    “앞으로 신교는 달라지겠지요.”

    “그렇게 될 거야, 강... 아니, 교주님이 계시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멀리 향한 하후진은 저편에서 몰려오는 흙먼지를 발견하고 이채를 띠었다.

    절세고수의 초월적인 안법이 흙먼지 앞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흑포 무인들을 포착한다.

    “미끼를 물었군. 애들 뒤로 물려.”

    “존명.”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예를 갖춘 익염대주를 뒤로하고 곧바로 몸을 날린 하후진.

    비조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본 익염대의 무인들이 반색했다.

    “화성좌님께서 오셨다!”

    “본때를 보여주십쇼!”

    환호하는 무인들의 머리 위를 단숨에 지나친 하후진은 가볍게 착지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좌우로 폭이 넓은 협곡을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거대한 멧돼지의 형상.

    피처럼 시뻘겋게 작열하는 눈동자와 마주친 하후진은 다리를 넓게 벌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흠... 봉희(封豨)라고 했었나?”

    은나라 요 임금의 시절 전설적인 궁수인 예에게 격살당했다고 알려진 산해경의 마수.

    갑자기 나타난 녀석은 신강 일대의 여러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하필이면 놈이 민가를 덮치는 바람에 전장을 바꿔야 했고, 익염대의 무인들이 미끼가 되어 하후진이 있는 협곡으로 놈을 끌고 왔다.

    ‘좌우의 폭이 좁으니 놈이 날뛸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겠지. 여기서 놈을 잡는다.’

    화아아아아아악!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광염(光炎)이 하후진의 전신을 덮는다.

    그제서야 멧돼지 마수도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는지 길쭉한 동공을 좁히며 하후진을 노려봤다.

    “새끼야, 노려보면 뭐할 건데? 네가 숯불구이 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뀌이이이이이익!

    웬만한 전각보다 훨씬 커다란 멧돼지가 달려드는 광경은 오싹하기 그지없었지만 하후진은 태연했다.

    자세를 넓게 벌리면서 어깨 위에 올려둔 대도를 몸쪽으로 끌어당기는 기수식을 취할 따름.

    하후진이 히죽 웃으면서 소리쳤다.

    “들어와라, 돼지 새끼야-!”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교의 무사님들!”

    여기저기 다치고 깨지면서 남루해진 촌장은 연신 허리를 숙이면서 사의를 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거대한 멧돼지의 머리를 가져온 하후진을 경외 어린 눈으로 봤다.

    다친 마을 사람들을 둘러본 하후진이 슬쩍 눈길을 던지자 익염대의 무인들이 금창약을 내주었다.

    “주민들에게 나눠주시오. 신교의 의원들이 만든 상등품이니 금방 나을 것이외다.”

    “어이쿠,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우린 넉넉하니 개의치 마시오. 그보다 마을은 무사하오?”

    “휴우, 말도 마십시오. 그 멧돼지놈이 엉망으로 부순 탓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한숨을 쉰 촌장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역력한 눈초리였지만, 차마 하진 못했다.

    하후진을 대신해서 익염대주가 말했다.

    “혈우 때문에 농사도 제대로 못 짓지 않았소?”

    “그야... 한해 농사를 망쳤지요. 기껏 심은 종자들이 완전히 못 쓰게 됐습니다.”

    그나마 천산의 농토는 괜찮았지만, 그 바깥의 땅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혈우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 마을 역시 혈우로 인해 기껏 키운 농작물에 독성이 깃들어 모두 폐기했던 것이다.

    “받으시오.”

    “이게 무엇입니까?”

    익염대주가 준 것은 향로였다.

    “신교의 교주님께서 내주신 보물이오. 이 향로에 향을 피우고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드리시오. 하면 땅의 기운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오. 혈우도 더는 이 땅을 침범치 못할 테고.”

    “그, 그게 참말입니까!?”

    상상을 초월한 말에 촌장은 노안을 휘둥그레 떴고, 마을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익염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교주님께 감읍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월성신께 제사를 드리시오. 하면 땅과 물이 정화될 것이니,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오.”

    “하, 하지만 씨를 뿌릴 계절이 지나서....”

    “여름에 파종하는 작물도 있지 않소? 씨가 없다면 신교로 사람을 보내시오. 그 정도는 줄 것이오.”

    “아아,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같은 교리를 믿는 형제들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법. 교주님께선 이 땅의 형제들을 모두 보살필 거라 천명하셨소이다.”

    “교주님의 은총이 하해와 같습니다!”

    물론 신강의 사람들이 모두 신교를 따르는 건 아니지만, 이 마을이 있는 곳은 엄연히 신교의 세력권.

    신교의 타격대가 일대를 순찰하며 마적들로부터 지켜주는 만큼 주민들은 신교에 공납을 바친다.

    필시 촌장이 안절부절못했던 것도 공납으로 바칠 작물이 다 죽어버렸기 때문일 터.

    “앞으로 신교의 무사들이 더 자주 순찰을 올 것이오. 문제가 생기거나 수상한 자들을 발견한다면 즉시 그들에게 말해주시오.”

    “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수로 인해 적잖은 주민들이 죽은 만큼 마을은 슬픔에 잠겼지만, 희망이 생겼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낯빛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일찍 마을을 떠난 하후진과 익염대는 얼마 뒤 일단의 무리를 마주쳤다.

    익염대주가 그들을 알아보고 기광을 발했다.

    “신임 목성좌와 은성각(殷盛閣)입니다.”

    “은성각이라... 오각 중 하나인가?”

    “그렇습니다. 각주인 헌원도는 헌원세가의 인물이지요. 헌원세가 역시 신교의 명문가 중 하나입니다.”

    전 화성좌인 동방하연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신교를 떠받든 유서깊은 가문.

    각주인 비성괴마(飛晟拐魔) 헌원도는 과거 일성군을 지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신임 목성좌라... 어떤 사람이지?”

    하후진은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신임 목성좌가 임명됐을 땐 바깥에서 싸우고 있었고, 신교로 돌아갔을 땐 목성좌가 임무를 나갔기 때문.

    “한 세대 전만 해도 교주위를 두고 경쟁했던 분이었습니다. 유가 출신이었지요.”

    다만 젊은 시절엔 무공의 성취가 늦었기에 그는 일찌감치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 자신도 낙담할지언정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정적들의 숙청을 피했다고.

    “그분이 삼화취정을 이루신 건 예순이 넘은 이후였습니다. 딱히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중단전을 개방하고도 정기신 합일을 이루지 못해 평생 그 자리에 머무르는 무인들이 부지기수였다.

    백도 무림의 기둥인 구파와 팔가에도 삼화취정의 고수들은 손에 꼽힐 만큼 드무니, 예순이 넘어 대공을 이루었다고 해서 재능이 부족하다고 할 순 없으리라.

    단지 그의 주변에 재능이 출중한 이들이 넘쳐났을 뿐.

    “뭐, 대충 알겠구먼. 교주위를 두고 경쟁한다면 더 일찍 이뤘어야 했다는 말이지?”

    “요점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젊은 시절의 정적들은 암살당하거나 모함당해서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자로 낙인찍힌 그가 가문의 원로가 되고 칠성좌의 자리까지 오르면서 출세한 셈.

    이쪽을 발견한 은성각의 무인들이 준마에 탄 건장한 노인을 호종하며 접근했다.

    “자네가 신임 화성좌인가?”

    “하후진입니다. 노선배께선 목성좌라고요?”

    “클클, 노선배라....”

    수염을 쓰다듬은 목성좌가 쓴웃음을 짓는 동안 하후진은 은성각주의 반응을 살폈다.

    ‘딱 봐도 날 반기는 모양새는 아니구만?’

    적대감까진 아니지만 꺼림칙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이쪽에 먼저 접근한 것도 목성좌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 아닐까.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이 늙은이는 목성좌가 되고, 염왕도문의 후계자는 화성좌가 되다니.”

    “뭐, 인생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노선배께선 어떤 임무를 맡으신 겁니까?”

    “오로목제(烏魯木齊) 부근에 망자들이 대량으로 창궐했다지 뭔가. 현지 세력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어서 이 늙은이가 은성각을 이끌고 가는 길일세.”

    천산산맥 끝자락의 오로목제는 신도 다음으로 큰 도시.

    신교의 분타를 비롯해서 충성을 맹세한 문파들이 있었기에 위기를 좌시할 순 없었다.

    “자네는 마수 토벌을 맡았다고 들었네만.”

    “죽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저기 대가리 보이시죠?”

    “...크군.”

    강대한 마수의 시체는 놔두기만 해도 주변에 온갖 요마들이 꼬이기에 회수해야 했다.

    워낙 컸기 때문에 여러 부위로 해체해서 말에 연결해서 끌고 다녔는데, 목성좌는 각 부분만 보고도 마수의 덩치를 가늠한 눈치였다.

    “그럼 이 후배는 가보겠습니다. 노선배께서도 무탈히 돌아오십쇼.”

    “고맙네. 나중에 술 한잔 하지.”

    “예, 그럼... 응?”

    문득 하늘에 뭔가가 어른거린다.

    말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올리는데, 목성좌도 뭔가를 발견한 듯 눈가를 좁혔다.

    “설응(雪鷹)이군. 저 녀석이 왜?”

    신교가 기르는 상서로운 영물. 전서구보다 몇 배는 빠른 설응은 고위층에게 연통할 때 쓰는 수단이었다.

    익염대에 속한 술사와 감응한 설응이 가죽 토시를 잡고 전통이 매인 발을 내밀었다.

    육포를 주면서 전통을 뺀 술사가 익염대주에게 서찰을 전달했고....

    “천급의 전통! 교주님의 교지(敎旨)입니다!”

    “...!”

    하후진과 목성좌, 두 칠성좌가 놀란 표정으로 익염대주를 바라보았다.

    급히 말에서 내린 목성좌가 부복하며 공수하고, 하후진도 얼떨떨하게 목성좌를 따라했다.

    “화성좌 하후진은 즉시 목성좌 유장천을 따라 오로목제로 향하라. 마수의 시체는 익염대주가 대신 신교로 가져올 것.”

    “...그게 전부야?”

    “아, 뒷내용이 있군요. 곤륜파가....”

    “엥? 곤륜?”

    하후진뿐만 아니라 목성좌도 의아해하는데, 익염대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수들에게 함락당했다고 합니다.”

    “...!”

    “현재 마수들이 곤륜산맥을 넘어 오로목제로 향하고 있으니 대비하라는 교주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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