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32화 (432/450)
  • 86화. 혈마 (1)

    “주인이시여.”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검마.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커다란 나무 욕탕에 잠수하다시피 들어간 혈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은 핏물이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비릿한 피비린내를 풍겼지만, 시비들과 호위들은 황홀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마수가 염왕이 교전하기 시작....”

    “안다.”

    하수들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쩌렁쩌렁 부딪치는 기파를 혈마가 못 느꼈을 리 만무.

    그럼에도 별다른 감흥 없이 나른하기만 했다.

    “이 시대의 무인도 나쁘지 않군.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천하제일인이라 불렸겠지.”

    “그렇습니다. 한때는 가루라의 화신과 더불어 천하제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천마만은 못하구나.”

    “그건....”

    “천마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변수를 대비해서 함정을 팠을 텐데?”

    “소, 송구합니다.”

    물론 천마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검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약을 대비했지만, 혈마의 말마따나 천마는 이 전장에 무관심한 듯했다.

    “그래도 봉인술식은 무림맹에게도 쓸 수 있습니다. 천마에게 집중하는 것보단 효과가 떨어지겠지만....”

    “뜻한 대로 하도록.”

    전략은 맡기겠다는 말에 읍하며 물러나는 검마.

    하지만 군막을 벗어나기도 전에 무언가를 느낀 듯 걸음을 딱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나른하게 잠겨있던 혈마도 입꼬리를 올리면서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수가 밀리고 있는가?”

    “...주인님.”

    “그냥 두거라. 마수가 아직 패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만의 하나 마수가 패하더라도....”

    쭈아아아아아악!

    욕탕에 있는 대량의 핏물이 혈마의 모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탄탄한 육신이 드러난다.

    혈마가 몸을 일으키자 시비들이 수건으로 몸을 닦고, 그의 몸에 핏빛의 용포를 입혀주었다.

    “내가 친히 나설 것인즉.”

    “주인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만약 염왕이 마수를 꺾더라도 혈마가 친정을 온 이상 승패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리라.

    혈마가 현신하면 누가 천하의 주인인지 모두가 깨달을 터.

    그때를 상상한 검마가 입매를 씰룩거릴 때, 혈마는 천장에 걸린 시체들을 곁눈질했다.

    푸줏간 고기처럼 갈고리에 꾀인 채 그가 목욕할 피를 쏟아냈던 가엾은 희생양들.

    모용세가의 가주와 태상 가주, 그리고 소가주의 시신까지 삼대가 꿰뚫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눈알이 파이고 혓바닥이 잘린 채 온몸의 피를 빼앗긴 몰골.

    시비들과 호위들이 뼛가죽만 남은 시신을 처리하는 동안 혈마는 뒷짐을 진 채 군막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시산혈해의 아수라장.

    그에겐 만찬장이나 다름없는 잔혹한 전장에서, 혈마는 곧 있을 포식을 기대하며 미소 지었다.

    * * *

    쿠구구구구구궁...!

    전장 전역을 꽉 채우는 듯한 존재감.

    두 절대고수가 격돌한 찰나, 원형의 충격파가 발생하며 방원 이십여 장의 흙바닥이 주저앉았다.

    허공에 불꽃이 튀고 땅바닥에 실금이 이지러지는 광경에 무림맹주 이송 진인은 혀를 찼다.

    “호교사천이라고 했소?”

    “예, 맹주님.”

    총군사 제갈의현의 대답에 이송 진인은 잇새 사이로 쓰디쓴 헛웃음만 흘렸다.

    “저런 자들이 더 있단 말이지....”

    팔대교왕만 해도 만만치 않건만, 그보다 강한 자들이 몇 명이나 더 있었다니.

    게다가 무위를 가늠할 수 없는 혈마까지.

    그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이 위태위태한 전선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겠지.

    그때 거구의 인영이 나섰다.

    “적들도 만전은 아니오, 맹주. 염왕 선배의 말씀대로라면 검마와 괴악은 상처가 깊다고 하지 않았소. 괴악은 아예 오지도 못했고 말이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샌 지금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강건한 근육질의 노년 도객.

    맹주위에서 물러날 때보다 조금 더 늙은 멸도 팽무강이 이송 진인을 위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차하면 이 늙은이와 낭왕, 그리고 구파와 팔가의 수장들이 합공을 펼칠 것이외다.”

    “허허, 태상 가주님께는 송구할 뿐입니다.”

    맹주위에서 물러나면서 더는 맹주가 아니게 된 팽무강이었지만, 정마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아들인 팽가주와 함께 합류했다.

    자고로 전임자가 돌아오면 현재 그 자리를 지키는 자는 큰 부담을 느끼기 마련.

    그러나 한 사람의 고수조차 아쉬운 이송 진인으로서는 팽무강의 합류를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합공의 치를 무릅쓰는 것 말이오? 상대가 혈마라면 무림 동도들도 이해해줄 거요. 애초에 광명마교주와 싸울 때도 합공하지 않았소이까?”

    그렇다 해도 천하팔존과 대문파의 존장들이 합공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지난날 광명마교주와 천마, 두 대적에게 연이어 당한 경험이 수치심을 잠재운 것.

    그들이 정파 최후의 보루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앙!

    사위를 삼키는 굉음에 현 맹주와 전 맹주의 대화가 끊기고, 중인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전신에 푸른 불꽃을 휘감은 염왕이 갑주의 거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양새.

    초월적인 안법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빛살이 갑주를 박살냈다.

    심도를 내칠 때마다 굉음이 일고,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면서 창백한 피부가 드러난다.

    연쇄적인 격공이 염왕의 진로를 방해했지만, 빛살로 화한 염왕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투아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충격과 함께 쭉 밀려나는 신형.

    참혹하게 부서진 흉갑이 떨어지는 가운데 마수가 소리 없는 포효를 질렀다.

    [......!]

    무지막지한 충격이 대기를 강타하면서 전방 수십 장의 지면이 부채꼴의 형상으로 뜯겨나간다.

    그러나 염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상공을 넘나들며 직접적인 타격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심상절예 일도무겁살.

    지금까지 아껴둔 심상절예가 마수를 치기 위해 구현되는 그 순간.

    마수의 몸에서 일어난 섬광이 부분만 남은 갑옷을 완전히 밀어내며 사위를 하얗게 불태웠다.

    화아아아아아악!

    마치 빛이 실체를 갖고 사방을 밀어내는 듯한 광경.

    본능적으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만큼 눈부신 섬광 뒤엔 어마어마한 충격까지 뒤따랐다.

    “컥! 수, 숨이...!”

    “아악!”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자들조차 심령이 부서지는 고통에 몸부림을 친다.

    강엽도 의지와 상관없이 살갗이 경련하는 걸 느끼며 지그시 눈살을 찌푸렸다.

    ‘더 가까이 갔다면 심맥이 끊겼겠어.’

    아무래도 타인의 몸을 빌렸다 보니 심상절예의 파동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수가 봉인을 푼 지금이라면 지금까지하곤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충격이 터질 터.

    다만 가장 가까이에서 빛을 맞은 염왕은 아무렇지 않게 충격을 흘려버렸다.

    [조심하십시오. 저놈은 봉인을 푼 뒤부터가 진짜 골칫거리입니다.]

    강엽의 전음을 들은 염왕은 고개를 갸웃하다, 뭔가 깨달았는지 이채를 띠었다.

    심상지경의 고수답게 세작의 몸을 빌린 강엽의 존재를 느꼈는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마수가 급히 물러나는 바람에 승부를 못 냈으니 이번 기회에 끝장을 볼 작정이겠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천지를 채우는 포효가 귓가를 강타했다.

    -우오오오오오오......!

    갑옷을 벗고 진면목을 드러낸 마수.

    단단히 두른 철갑 아래 숨겨진 것은 누더기처럼 얽기설기 꿰맨 자국으로 가득한 거인이었다.

    국부를 가리는 짧은 바지만 걸친 채, 탁한 눈알로 염왕을 노려보는 회백색의 괴물.

    거대한 쇠못이 관자놀이 양옆으로 삐죽 나온 것을 보면 지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사실상 강시나 다름없는 놈이라고 하더니....’

    마수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육안으로 견식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순간에 휙 사라진 마수의 거구가 염왕의 사각에서 나타나 주먹을 내지른다.

    낌새를 알아챈 염왕이 타점을 비스듬히 쳐내면서 마수의 피부를 긁은 그 순간.

    마치 문어발처럼 기형적으로 변한 마수의 하박이 염왕의 도격을 스치면서 그를 떨쳐냈다.

    염왕이 몸을 반전시키며 다시 도격을 내쳤지만,

    쿠우웅!

    회백색의 근육에 비늘이 우후죽순 돋으면서 심도의 칼날을 받아냈다.

    ‘과연 마수라 불릴 만하군.’

    수십 종의 영물과 요마들의 영성을 한 몸에 집약시킨 비인외도의 마인.

    살갗을 뚫고 자라난 뼈가 전신을 감싸고, 싸늘한 한빙지기가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를 강제로 식힌다.

    -우워어어어어어어!

    산천초목을 떨쳐 울리는 사자후에 무인들이 적아를 막론하고 귀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나마 무림맹에선 맹주를 비롯한 수뇌부들만이 버텼지만, 비교적 무위가 떨어지는 자들은 내상을 입은 것처럼 핏기가 가셨다.

    염왕이 쉴 새도 없이 심도로 타격했음에도, 마수 역시 계속 외양을 바꾸면서 맞서 싸운다.

    지성은 애저녁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심상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수완.

    그에 그치지 않고 바닥에서 붉은 줄기가 솟구치며 주변의 시체들을 휘감는 모습에 강엽도 놀랐다.

    “혈목?”

    마수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혈목을 다룬다는 말까지는 듣지 못했건만.

    설마 부활하고 나서 더 강해진 걸까.

    푹푹푹푹!

    시체를 관통해서 피를 빨아먹은 것도 모자라, 그 시체를 끌고 오며 고기방패를 세우기까지.

    다시 한번 터진 염왕의 심상절예가 시체들을 절단하고 마수의 육신에 깊은 상처를 입혔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마수는 아랑곳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인들이 경악할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악...!

    혈목에 매달린 시체 중 하나가 온몸을 뒤틀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여, 여엄...오아아앙! 이이이이, 교오오오으이....

    쩌렁쩌렁 울릴뿐더러 발음도 부정확했으나, 어떤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되긴 했다.

    -조, 조이이이인...! 주주이이인니으음이 저저저저어억!

    “시체를 이용해서 말을 한다... 인상적이긴 하군. 근데 그게 전부냐?”

    심드렁하게 받아친 염왕이 눈을 빛내자, 혈목에 매달린 시체가 갈라지며 내용물을 쏟아냈다.

    -키, 키히익! 너어어어언... 나아아아알 모, 모못, 주겨어어어억!

    “시끄럽다.”

    또 다른 시체를 이용한 마수의 비웃음을 일축한 염왕이 심도를 내쳤고, 마수 역시 어느새 도마뱀처럼 길쭉해진 꼬리를 휘둘러 그에 맞섰다.

    심흔까지 재생하지는 못하는 듯했지만, 상처를 입어도 개의치 않고 계속 몸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심상을 하나로 모아, 등 위에서 만개한 꽃을 통해 포자처럼 터뜨렸다.

    -심상법 구현.

    이성을 조금씩 회복한 끝에 구현한 필살의 절기.

    -마마심무지환(魔痲深霧志患).

    괴물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의 저주가 일대를 휩쓸기 시작한다.

    머나먼 과거, 천형처럼 타고난 병마를 치유하기 위해 이루기 위해 촉망받는 술사는 여러 영물들과 요마의 육신 일부를 자신의 몸에 꿰매고 붙였다.

    인간을 초월한 짐승들의 생명력이라면 병마의 힘조차 극복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성을 잃고 짐승처럼 영락한 술사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었다.

    그렇게 흡수한 괴물들의 영성을 한데 모아 정기신 합일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아득한 세월이 흘러 심상지경에 닿았을 때, 그는 선천적인 천형을 근원 삼아 심상법을 빚어냈다.

    ‘자신의 병마를 타인의 몸에 퍼뜨리고, 그렇게 죽인 자들의 힘을 흡수하는 심상법.’

    만약 이 심상법이 전장을 강타한다면 염왕은 물론 수천 명의 무림맹원들도 다 함께 즉사할 터.

    강엽이 그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뜰 때, 염왕은 오히려 고요한 신색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괴물 자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도양단의 기세로 땅에 떨어지는 심도의 칼날.

    그 순간, 강엽은 이제껏 염왕이 다루었던 일도무겁살과는 다른 느낌을 감지하고 기광을 내뿜었다.

    ‘두 번째 심상절예라고?’

    같은 근원에서 파생된 또 다른 가지.

    설핏 미소 지은 염왕이 휘두른 일도가 전장 가득 퍼진 마수의 심상절예를 종잇장처럼 갈라버렸다.

    -단심일도(斷心一刀).

    심상을 절단하는 심상절예.

    마음을 베기 베기 위해 창안한 심상절예의 칼날이 마수의 심상을 베고 마음을 찢어버린다.

    ‘...그렇군. 이게 염왕이 낸 해답인가.’

    강엽이 천마신공을 창안하고 심상절예를 집대성했듯, 염왕 역시 스스로를 연마하며 더욱 강해졌다.

    [.......]

    침묵에 빠진 마수의 거구.

    외상은 남지 않았으나, 돌처럼 굳어진 채 미동도 않는 놈의 눈빛에서 서서히 빛이 꺼져간다.

    ‘죽이지 않았어. 말 그대로... 마음만 베어버렸다.’

    목숨을 취하지 않고 마음만 죽이는 살심(殺心)의 경지.

    염왕은 강엽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혈마와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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