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혈세 (2)
대륙은 넓고 각 지역의 풍토는 다양했다.
풍년이 드는 곳이 있으면, 흉년이 드는 곳도 있는 법.
어떤 곳은 홍수 때문에 끙끙 앓고, 어떤 곳은 몇 달째 비가 안 와서 가뭄에 시달린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흉작이 짓는 곳이 늘어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참다 못한 지주들이 승려와 도사를 초빙하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식견 있는 도사들은 우려했다.
“천기가 이상하오.”
승려들 역시 의아하게 여겼다.
“무량수불. 흉년과 함께 사특한 요마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제갈세가나 모산파를 제외하면 술사들은 속세와 깊은 연을 맺지 않기에 항간엔 알려지지 않았다.
제갈세가 역시 마교와의 싸움에 골몰하느라 술사들의 서신을 받았지만 큰 도움을 주진 못한 상황.
그러나 이제 모두가 깨달았다.
쏴아아아아아아!
“비다! 비가 내린다!”
“잠깐, 뭔가 이상해!”
하늘에서 내리는 핏빛의 폭우.
며칠 동안이나 내린 혈우로 인해 산천초목은 피로 물들었고, 강과 호수도 피내음을 풍겼다.
그때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우웨엑!”
“먹지 마! 다 독으로 변했어!”
혈우를 맞은 농작물은 독성을 띠었고, 사람들은 괴질에 시달렸다.
강과 호수, 숲과 산에서 흉폭한 괴물들이 창궐했다.
“아, 아버지! 어, 어떻게... 으아악!”
“히익! 죽은 자가 돌아왔다! 죽은 자가 되살아났어!”
망자들이 일어나서 산 사람들을 덮치고, 그들에 의해 죽은 자들은 다시 괴물로 되살아났다.
온 천하가 재앙에 시름하니 인세에 지옥이 도래했음이다.
“하늘에 붉은 별이 떴소.”
“흉성이다! 저 흉성이 천기를 어지럽히고 있어.”
무림과 술가, 관부와 상계.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요사하게 빛나는 붉은 흉성이 재앙과 연관이 있음을 알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요혈성(妖血星)이다! 그분께서 돌아오셨구나!”
“오오, 혈신이시여....”
천하 곳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암약했던 혈교도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경배했다.
혹자는 이 기쁨을 알리고자 그동안 억눌렀던 마성을 드러냈다.
“경배하라, 이교의 죄인들이여! 혈신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세상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이 혈귀 새끼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혈겁을 일으켰던 혈교도들은 토벌됐지만, 무림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죽은 적미성을 대신해서 무림맹주에 뽑힌 청성파의 장문인 이송 진인은 보고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혈교도들이 강해졌단 말이오?”
“예, 스스로 혈령교위라 주장한 자가 절정고수 세 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착각일 가능성은? 그놈이 사실 혈사교령이거나 이쪽에서 뭔가 오해한 게 아니외까?”
“곳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착각은 아닙니다. 또한 평교도들 역시 강해졌다고 합니다.”
“으음....”
보고를 올린 제갈의현이 한숨을 쉬었다.
“은거한 술사들이 본가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 요혈성이 혈마의 별이라고 말입니다.”
“나 역시 사문의 서찰을 받았소. 청성산에서 사특한 요수들이 나타났다고 하더구려.”
요수는 청성의 도사들에 의해 처단됐지만, 문제는 그런 일이 천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병입니다. 양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공을 익힌 무인들도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성수장과 당문에 지원을 요청하겠소.”
천마의 사건으로 무기한 봉문에 들어간 사천당문이었다.
그러나 당문이 있어야 병자들을 살릴 수 있을 터.
“또한 맹방들을 소집하시오. 혈마가 부활했다면 혈교가 궐기할 터. 우린 하나로 뭉쳐야 하오.”
“예, 그리고....”
“또 뭔가 남았소?”
“일월마교에 잠입한 세작들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산 일대는 재앙을 피했다고 합니다. 또한 개방이 태화문과 백담서원이 터전을 비운 사실을 확인했고, 천금상단 역시 사업장들을 철수시켰습니다. 정황상 천산으로 피신한 걸로 보입니다.”
“......!”
“필시 천마가 수를 썼을 겁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아낼 수 있겠소?”
만약 재앙을 피한 방법을 알아낸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갈의현의 얼굴엔 떫은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알아내라고 했지만, 소문에 따르면 초대 교주의 영령이 천산을 가호했다고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내 혼백의 존재를 의심하는 건 아니나, 초대 교주라면 천 년 전의 사람이 아니오?”
“예. 남북조 시대의 사람이지요.”
설령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초대 교주의 영령이 무림맹을 지켜주진 않을 것 아닌가?
“신강 일대의 사람들이 천산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천마와 연이 있는 자들도 모여들고 있지요.”
“천마의 의중이 무엇일 것 같소?”
재앙을 피한 것에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혈교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가.
“현재로선 파악되지 않습니다. 취임식과 혼인식을 치른 뒤엔 반쯤 칩거하고 있으니....”
정식으로 교주가 되었으니 전면에 나설 만도 한데, 전혀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가만히 있을 자가 아니니 곧 행동에 나설 겁니다. 빙궁과 하오문과도 손을 잡았으니까요.”
비밀리에 이루어진 동맹이지만 제갈의현은 세작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알아냈다. 원래라면 몇 달은 걸렸을 텐데. 이건 마치....’
혹시 일부러 알려준 게 아닐까.
흉중의 의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제갈의현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추측이 맞다고 해도 강엽의 의중이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무림맹이 맹방들을 소집해 전시 체제로 돌입했을 무렵.
“혈교의 타격대가 비밀리에 공래산맥(邛崍山脈)을 넘었습니다!”
“새로운 팔대교왕들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운남과 귀주로 빠졌습니다!”
천하를 불태우는 정마전쟁이 시작됐다.
* * *
쏴아아아아아......!
시원하게 내리는 밤소나기.
최근 천하를 도탄에 빠트린 혈우가 아니라, 맑고 투명한 비였다.
뒷짐을 진 채 교주전의 창문을 통해 바깥 정경을 보고 있던 강엽은 문득 등에 와닿는 따스한 손길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전에 비해서 확연히 커진 배를 만진 백서희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누가 그러더라. 올해는 풍작이라고.”
“다행이군. 수확량이 많으면 배 곯는 이들이 줄어들 테니....”
“중원은 난리가 났겠지?”
“아마도.”
정식으로 교주위에 오른 뒤 혼사를 치르고, 조직을 개편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뒤로는 반쯤 칩거하면서 무공 수련에 몰두했지만,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하오문이 가져다주는 소식과 피난을 오는 이들이 퍼뜨린 소문 덕분에 천하의 정세는 꿰고 있었다.
팔대교왕이 이끄는 혈교의 군세가 사천 분지를 침공했다는 소식.
혈마와 호교사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세는 무림맹에 극도로 불리했다.
진작에 십이전대를 투입했는데도 연전연패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때 방에서 나온 당묘정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령아는 잠들었어요. 애가 밤에 활발해지니 재우는 것도 쉽지 않네요.”
“괜찮소?”
“네? 아, 매일 하는 일인데요. 이젠 익숙해....”
“아니, 그게 아니라. 본가의 소식을 듣지 않았소.”
“....”
당묘정의 입매가 다물렸다.
강엽을 따라오면서 가문과 의절한 신세라지만 감정까지 정리한 건 아니니까.
그녀가 가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혈교가 쳐들어온 지금 가문의 운명은 풍전등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혼인식에 숙부님께서 찾아오셨지. 당문은 정매를 버리지 않았소. 정매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오.”
혼인식을 하는 날, 그녀의 숙부이자 사부인 활수명의 당우경이 찾아왔던 것이다.
비록 정체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멀리서만 지켜봤지만, 조카의 행복을 빌어주지 않았던가.
“당 숙부님께 기물을 하나 드렸소. 만약 당문이 위기에 처하면 쓰라고. 그럼 내가 즉시 입도공월을 열고 당문을 구하러 갈 것이오.”
“엽랑....”
당묘정의 눈이 붉어지면서 목소리가 젖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인 강엽은 옆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백서희도 품에 안았다.
“점창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위기에 처하면 그게 어디든 난 즉시 달려갈 거야.”
무림맹에서 탈출하는 그날 강엽 일행을 비호하기 위해 동지들에게 검을 겨누었던 점창파였다.
전대 장문인의 보은패 때문이라고 해도, 그들이 곤경에 처하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강엽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품에 안긴 백서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고마워요. 여보.”
그렇게 두 여인이 강엽의 품에서 조용히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데 입구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만 두고 너무 깨가 쏟아지는 거 아니에요?”
조영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자 강엽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어서 오시오, 옥매. 갔던 일은 잘 됐소?”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대부분의 상단들은 탐탁치 않아 했거든요. 장안대상회와 휘주대상련의 대행수들만 생각해보겠다고 여지를 줬어요.”
거만의 부를 쌓은 대상단들.
조영옥의 외조부인 천금상단주는 천하를 대표하는 십대상단에게 격문을 보냈다.
그들이 보유한 식량과 물자를 일월신교가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것.
“물론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모든 물자를 팔진 않을 거예요. 무림맹과 혈교가 비싸게 매입할 테니까요. 우리에겐 끽해야 삼 할쯤이야 팔까요?”
“어차피 우리도 모두 살 수 없소.”
아무리 일월신교가 돈이 많아도 대륙을 휩쓴 재난으로 인해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은 상황에서 십대상단의 물류를 감당할 순 없었다.
하물며 이쪽이 제안한 금액은 미친 듯이 치솟은 시세에 못 미치니 원래라면 성사될 수 없는 거래.
다만 상단주 일가가 위기에 처하면 천산으로 망명을 오는 것을 받아주겠다는 뒷거래를 제안했다.
“상인들은 저울질을 하고 있어요. 우리와 무림맹, 혈교 중에서 누가 이길지를요.”
설사 혈교가 패권을 차지하더라도 상계를 쥐락펴락하는 그들을 건드릴 순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건 힘의 문제가 아니라 쓸모의 문제니까.’
상계가 박살나면 천하의 물류가 마비되니, 결국 혈교를 도왔던 대상단을 중용하리라는 판단.
백서희와 당묘정의 눈치를 본 조영옥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십대상단 모두 무림맹의 승산을 높게 보진 않는다는 거죠. 광명마교와의 전쟁이 끝나고 전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는데 연이어 혈교까지 상대하니까요.”
“그렇겠지.”
팔대교왕까진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겠지만 혈마와 호교사천은 얘기가 다르다.
안색이 어두워진 백서희와 당묘정을 위로하면서도, 강엽은 냉정하게 승산을 계산했다.
‘호교사천이 등장하면 무림맹에 승산은 없다. 혈마까지 나서면 그날부로 끝나겠지.’
결국 무림맹이 얼마나 버티는지가 관건이었다.
의기로 똘똘 뭉친 자들이 끝까지 싸운다면, 혈교가 천하를 병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놈을 쓰러트릴 힘을 갖출 때까진 무림맹과 정파를 이용해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 대가로 천하는 너덜너덜해지겠지만, 그것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참, 할아버님께서 증손주는 언제 볼 수 있냐고 재촉하시던데요? 두 동생 모두 회임했는데 저만 못해서 애가 타시나 봐요.”
“흠흠, 내 노력해보겠소.”
강엽이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하는데 문득 익숙한 느낌이 기감을 자극했다.
“옥매, 혹시...?”
“그래서 말씀드렸죠.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요.”
배시시 웃은 조영옥이 깜짝 놀란 두 동생의 사이를 비집고 강엽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겼다.
“태명은 뭘로 지을까요, 상공?”
“아, 축하드려요, 언니!”
“흐응, 이제야 진짜 가족 같네. 근데 거긴 제 자리거든요, 조 언니?”
당묘정이 축하하는 소리와 백서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가운데.
강엽은 세 여인의 틈바구니에서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가족을 지키려면 반드시 혈마를 쓰러트려야 했다.
* * *
세 여인이 잠든 것을 확인한 강엽은 마지막으로 요람에서 잠든 딸의 얼굴을 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아비의 손길을 느꼈는지 가늘게 눈을 뜬 딸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요 녀석아, 밤엔 일찍 자야지. 네가 잘 자야 엄마도 덜 고생하지 않겠냐.”
“빠아-”
딸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옹알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라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옆에서 단잠을 자는 당묘정의 머릿결을 만지면서 강엽이 작게 속삭였다.
“엄마가 지금은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네가 잘 위로해줘야 한다, 령아야.”
“빠아....”
정말로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엽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서 등잔의 불을 껐다.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아비를 배웅하는 딸아이를 뒤로하며 전각을 나온 강엽은 어느새 소나기가 그친 밤하늘을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껴서 흐리긴 해도 다시 비가 내릴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곳엔 죽립을 쓴 장발의 청년이 바랑 하나만 메고 있었다.
“가시렵니까?”
“그래, 너무 오래 있었지.”
“하후진이 섭섭해하겠군요.”
“오래전에 하산한 녀석이다. 계속 끼고 있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일가까지 이룬 녀석이 아니냐.”
“천산 바깥에선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텐데요.”
“제자 녀석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아무렴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도 굶고 다닐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 징글징글한 마교나 잘 건사해라.”
“감사합니다.”
“뭐가?”
“하후진을 보내주신 것 말입니다.”
“착각하지 마라. 난 방임주의다. 제자의 인생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그놈은 널 따라온 게 아니라 자기 내자를 챙긴 거다.”
“그래도 선배님께서 반대하셨으면 녀석도 갈등했겠지요. 단목 방주만 설득해서 떠났을지도 모르고요.”
“그럼 평생 친구로 대해줘라.”
“그럴 겁니다.”
“...오래 살아남은 자는 고독한 법이지. 언젠가 세월이 네 마음을 할퀴고 좀먹을 거다.”
“그건 경험담입니까?”
“글쎄, 어떨까.”
피식 웃은 염왕이 죽립을 살짝 들어올리며 눈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미리 말하마. 추억을 많이 쌓아둬라. 훗날 네 곁의 사람들이 떠나면 행복한 추억이 널 지탱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