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28화 (428/450)

85화. 혈세 (3)

썩은내를 풍기는 핏빛의 논밭.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사천 분지는 피와 시체가 굴러다니는 전장으로 변했다.

논두렁조차 붉어질 정도로 처참한데도 무림맹은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할 생각도 못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서 일일이 수습한다면 한도 끝도 없었다.

눈을 감지도 못한 시체들은 까마귀와 파리에게 살점을 공양하면서 사라질 뿐.

다만 모두가 그들을 외면한 건 아니었다.

“걸리면 그냥 넘어가진 못할 텐데....”

“왜, 이제 와서 겁이 나나? 겁나면 돌아가게.”

“누가 겁을 낸다고. 그보다 지금 누가 선두를 맡은지 까먹은 건가?”

“뭣하면 내가 선두를 맡지.”

“그 덩치로?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쉿, 그만 좀 싸워요. 애들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에요? 적이 코앞에 있는 걸 잊었어요?”

이마에 계인을 찍은 젊은 비구니의 타박에 앞에서 포복하던 두 청년은 끙 앓는 시늉을 했다.

후미를 따르던 청년 도사가 말을 덧붙였다.

“혜심 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언제 시체강시들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간악한 혈교의 술사들이 풀어놓은 사냥꾼.

평상시엔 시체더미로 위장하다 산 사람을 발견하면 비호처럼 덮치는 괴물이었다.

놈들은 친인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다시 전장을 방문한 이들을 끔찍한 몰골로 죽여버린다.

거한의 청년, 황보진악이 미간을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해치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놈들은 곱게 뒤지질 않으니까.”

시체강시는 죽을 때 악취를 뿌리는데, 그게 살포되면 다른 시체강시들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악취가 묻은 자들을 쫓아온다.

그렇기에 그들도 힘으로 맞서기보다는 좀 느리더라도 시체 사이를 포복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청수 도장, 시체강시들의 기척은요?”

“...동북쪽으로 삼십 장 방향입니다.”

청수의 말에 일행은 기척을 철저히 숨겼다.

시체강시는 시각과 청각은 둔감하나, 발밑의 진동엔 민감하기에 주의해야 했다.

그때부턴 전음으로 의사를 나눈 네 사람은 시체강시가 있는 곳들을 피해 조심스레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기어다녔을까.

평범하게 걸어간다면 일 각밖에 안 걸렸을 목적지를 한 시진이나 걸린 끝에 도착했다.

[...찾았다.]

선두를 맡은 연가휘의 전음.

뒤따라온 일행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굴러다니는 창조각을 발견하고 일제히 숨을 죽였다.

청수와 황보진악은 입술을 깨문 채 착잡해했고, 소창후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혜정 사저.”

아미파의 장문인으로 내정되었던 난풍혜검 혜정 사태.

일찍이 흑접 토벌 당시 강엽과 인연을 맺었던 그녀는, 아미파가 본산을 버리고 퇴각하자 몸소 적들을 막아서며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뒤쫓아온 팔대교왕과 싸운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저기, 연 시주. 사저의 시신은...?]

연가휘는 씁쓸하게 고개만 저었다.

시체강시들이 물어갔는지 찾은 것은 부서진 복호창이 전부였다.

다음 장문인으로 내정된 고수가 논두렁에서 객사할 줄 누가 알았을까.

소창후가 떨리는 손으로 창조각들과 다른 아미파 비구니들의 유품을 바랑에 쓸어담고 세 사람을 향해 눈짓을 보냈을 때였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청수 도장?”

“시체강시들이 옵니다.”

“...!”

일행의 동요가 발밑으로 전해진 걸까.

시선을 멀리 향한 청수가 혀를 내둘렀다.

“거리가 꽤 있는데도 감지했군요. 준마보다 더 빠르게 오고 있습니다. 다른 시체강시들까지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달려오고 있고요.”

“그런...!”

“갑시다. 괜히 싸워서 좋을 것 없소.”

어차피 들킨 마당에 기척을 숨길 필요는 없을 터.

즉시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하며 경공술을 펼친 일행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적들의 추격이 너무 빨랐다.

“젠장, 청수 도장! 오른쪽 조심하시오!”

“압니다!”

다른 시체강시들을 앞질러서 일행을 쫓아오는 추격자.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빛살처럼 질주하는 거대한 늑대의 모습에 일행의 표정은 퍽 괴이해졌다.

“저 낯짝은 암만 봐도 적응이 안 돼!”

시체를 얼기얼기 짜맞춘 듯한 누더기의 형상.

늑대의 외양을 하고 있되 그 실체는 수십 명의 인간을 재료로 만든 강시였다.

-크르르르르... 컹! 컹!

짐승의 외양이 되면서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는지 늑대처럼 울부짖으면서 일행을 위협한다.

“몰이사냥을 하려는 거요! 아무래도 늑대의 습성을 곧이대로 물려받은...!”

연가휘의 경고는 이어지지 않았다.

일행의 좌우에서 추격했던 시체강시가 주둥이를 쩍 벌렸던 것.

황보진악이 주먹을 뻗어 시체강시를 후려쳤다.

“감사 인사는 됐다!”

“별로 감사하지는 않는데?”

연가휘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황보진악을 노리던 또 다른 시체강시의 몸통에 방천화극을 찔렀다.

막대한 경파를 품은 방천화극이 시체강시의 몸통을 산산조각 박살내며 파편을 사방에 흩뿌린다.

“그나마 맷집이 별로라서 다행이지. 하긴 시체들을 얼기설기 얽었으니 당연한가?”

잠시 지체하는 사이 시체강시들이 주변을 포위했다.

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행은 시체강시들을 찢고 부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매섭게 몰아쳤다.

놈들의 썩은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바람에 악취가 진동했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혈전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문득 안색이 변한 청수가 외쳤다.

“조심...!”

하늘에서 번쩍인 빛살이 일행을 향해 비스듬히 내리꽂혔던 것.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땐 이미 코앞까지 짓쳐든 뒤였다.

청수가 송문고검을 휘둘러 창극을 막았지만, 가공할 충격파에 그대로 날아갔다.

“청수 도장!”

“...큽!”

한순간에 호신강기를 박살낸 충격. 그 정체가 거대한 창임을 깨달은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창이 장병기라고 하지만 청수를 덮친 창은 사람이 휘두를 수 없을 만큼 큼지막했다.

온갖 기문병기를 다루는 혈교의 마인들 중에서도 이런 거창을 쓰는 자는 한 명밖에 없다.

쿠우웅-!

묵직하게 지면을 강타하는 충격.

땅이 흔들릴 만큼 격하게 뛰어내린 거대한 그림자가 흙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 일견 신령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탐스러운 은빛 털가죽.

대충 하의만 걸친 늑대인간이 허공섭물로 회수한 창을 땅에 꽂으며 입매를 틀어올렸다.

[운이 좋군.]

굳이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천지를 압박하는 존재감에 일행은 창백하게 질렸다.

“혈랑수군(血狼獸君)....”

새로운 팔대교왕 중의 하나.

식인으로 배를 채운다는 비인외도의 괴물이, 거만한 눈길로 그들을 오시하며 히죽거렸다.

[한 놈은 무당의 도사고, 한 년은 아미의 비구니인가? 다른 두 놈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쁘진 않구나. 살점이 야들야들하겠어.]

입술을 핥는 혈랑수군의 모습에 소창후는 깊은 증오를 드러냈다.

“너, 이 괴물이...!”

[어이쿠, 부처를 모신다는 비구니가 험한 말을 쓰면 되나. 구천을 떠도는 네년 장문인이 제자를 잘못 키웠다고 한탄하겠구나.]

“닥쳐-!”

아미파가 본산을 버리고 퇴각했던 것은 혈랑수군이 수백의 시체강시들을 이끌고 쳐들어왔기 때문.

암만 구파라고 해도 팔대교왕이 대군세를 이끌고 오면 답이 없었다.

[자, 들어오너라, 암컷아. 사문의 자매들과 내 뱃속에서 상봉해야 하지 않겠느냐?]

“......!”

껄껄 웃으며 배를 두들기는 혈랑수군의 도발.

눈에 핏발이 선 소창후는 승산이 없다는 걸 잊은 듯이 쏘아졌다.

깜짝 놀란 연가휘와 황보진악이 말릴 새도 없이 살기 가득한 복호창이 혈랑수군의 뱃가죽에 꽂힌다.

투아아아아아앙...!

충격파와 함께 울려 퍼지는 굉음.

소창후의 창격을 맨몸으로 받아낸 혈랑수군이 광소를 토하면서 입매를 긁적였다.

[그래, 생각났다. 네년이 아미파의 장문지재라는 녀석이었군. 한데 장문지재라는 녀석이 이렇게 바깥을 쏘다녀도 되는 거냐?]

“...나는 장문지재가 아니야.”

대번에 세간의 평가를 부정한 소창후가 두 손으로 창대를 휘감듯 잡아당겼다.

“난 장문직을 맡을 만큼 자비롭지 않아!”

상처 입은 집승처럼 울부짖은 소창후의 창격이 다시 한번 털가죽을 찔러들어온다.

그러나 마치 강철끼리 들이받은 것처럼 불티만 내면서 살짝 파고드는 수준에 그쳤다.

[제법이군. 중단전을 연 건 그렇다 쳐도... 네년, 슬슬 머릿속의 신(神)이 깨어나는구나.]

상중하 삼단전이 합일하는 경지.

소창후 역시 그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삼화취정을 목전에 두었던 것이다.

“조심하시오, 혜심 스님!”

“싸울 때는 같이 싸워야지, 저 다혈질이...!”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청수를 대신해서 좌우로 들어온 연가휘와 황보진악.

연가휘의 방천화극에선 검푸른 강기가, 황보진악의 주먹에선 전사경의 회오리가 치고 있었다.

[한 놈은 삼화취정인가! 이거 더 재밌어지겠어!]

같은 삼화취정이라고 해도 무공의 격차는 크다. 초입과 농익은 고수가 대등할 순 없는 노릇.

굴강한 근육을 불끈거리며 황보진악의 권격을 튕겨낸 혈랑수군이 방천화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강과 창강이 얽히면서 뜨겁게 타오르고, 대기를 강제로 찢어발긴다.

괴물의 형상답지 않은 정교한 투로로 연가휘의 허점을 열어젖힌 혈랑수군이 씩 웃었다.

[끝났다, 애송이.]

“흡...!”

콰아아아앙!

연가휘가 피를 뿌리며 널브러지고,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던 황보진악도 발에 채여 굴렀다.

직후 소창후의 창을 손가락으로 튕겨낸 혈랑수군이 벼락같이 그녀를 잡아채서 어깨를 깨물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쯔아압!

피를 빨아들인 혈랑수군의 눈동자가 일순 붉은빛을 띠면서 요사한 기운을 발한다.

얼굴이 하얘진 소창후가 벌벌 떨면서 축 늘어질 때.

퍼석!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혈랑수군이 피를 빨다 말고 주둥이를 들어올렸다.

어느 샌가 몸을 일으킨 청수가 맨손을 뻗으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당의 상징인 송문고검은 주인의 손을 떠나 늑대인간의 늑골 사이로 파고든 뒤.

호신강기를 베고 들어온 통증에 혈랑수군이 눈빛을 가라앉히면서 소창후를 멀리 내던졌다.

[허어, 얼핏 보면 이립도 안 된 것 같은데... 그 젊은 나이에 이기어검이라고?]

가장 낮은 단계인 수어검이긴 해도, 어검술을 구사했다는 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삼화취정에 오른 것도 놀라운데 어검이라니. 아무리 천하의 기운이 맥동하는 난세라고 해도 정도가 있거늘. 아니면 무당의 진전을 이었기 때문인가?]

혈랑수군의 감탄에도 청수는 좋아하지 못했다.

호신강기를 뚫고 상처를 입히긴 했어도 털가죽을 관통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던 것.

[큭큭, 너무 낙담하지 마라. 만약 장기를 관통했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게다.]

대롱대롱 매달린 송문고검을 뽑은 혈랑수군이 검날을 쥐어 터뜨렸다. 평생을 함께한 사문의 보검이 망가지자 청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광경은 더욱 놀라웠다.

“재생의 공능...!”

비록 얕다고 하지만 어검으로 낸 상처가 간단히 봉합되다니?

[삼화취정 둘과 그에 준하는 둘이라. 그럭저럭 손해는 면했군. 아미산 일대를 배회한 보람이 있어.]

땅에 꽂은 창을 뽑은 그가 청수와 세 사람을 둘러보며 의념을 발했다.

-심극 전개.

뇌리에 강제로 쑤셔박힌 압도적인 의념이 필패를 상기시킨다.

필살의 절초로 숨통을 끊어서 반격의 여지를 없애버리겠다는 선언.

송문고검을 잃은 청수는 검지와 중지를 뻗은 검결지를 쥐어 받아칠 준비를 했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꿈틀거려봐야지 않겠는가.

그렇게 확정된 죽음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 한데 집중한 공력을 터뜨리려고 하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커허!?]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격에 찢어질 듯이 눈이 커다래진 혈랑수군이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머리에 쓴 죽립을 누르며 땅에 착지한 장발의 사내.

수염 없이 매끈한 턱을 드러낸 사내가 서늘한 시선으로 늑대인간을 돌아보았다.

“천마에게 들은 적 있지. 혈교에 늑대 모양의 형상을 한 괴물이 있었다고. 그 후신쯤 되는 모양이군.”

[누구냐!?]

사내가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시체가 알아서 뭘 하려고.”

[...!]

혈랑수군이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허공에 그어진 수십 개의 궤적이 육신을 천참만륙한다.

-심상절예 일도무겁살.

의념의 파동을 최소화한 심상절예.

심흔까지 재생할 여력은 없는지 수백, 수천 조각으로 나뉜 혈랑수군은 그렇게 고혼이 되었다.

그제서야 드러난 수려한 사내의 얼굴에 청수가 반색했다.

“염왕 선배님...!”

“무림맹 군영으로 안내해라.”

염왕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 수뇌부들 낯짝 좀 봐야겠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