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혈세 (1)
강엽이 혈마와 대면하던 그 시각.
일행은 갑자기 멈춘 강엽을 둘러싸면서 호법을 섰다.
타락한 백택을 해치우자마자 두 발로 선 채 고개를 살짝 떨군 모습. 내상을 입은 것 같진 않지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으음, 아무래도 심상세계에 들어간 것 같아요.”
한동안 강엽을 관찰한 백서희의 말에 조영옥이 인상을 쓰며 침음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그렇다면....”
“혈마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두 여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그때, 추락한 호교사천을 찾으러 간 일사도와 완안극이 돌아왔다.
“틀렸소. 검마는 도망쳤소이다.”
“그 괴악이라는 놈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안극이 이를 빠득 갈았다.
강엽이 다 잡은 놈들을 놓쳤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든 것이다.
“술법을 썼거나 방수가 있었던 거겠죠. 만약을 대비해서 퇴로 정도는 마련해뒀을 거예요.”
공양의식의 제물이 되거나 추격대의 발목을 잡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 교도들과는 다르다.
혈마의 최측근인 호교사천은 이 전장에서 스스로를 희생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쪽이에요.”
부상자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참상. 자그마한 부상조차 급속도로 악화되고, 부상을 입지 않은 자들조차 쇠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피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도에서도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는 무인의 보고에 전장은 얼어붙은 것처럼 경직되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신녀가 이마를 붙잡으며 비틀거리자 깜짝 놀란 수성좌와 금성좌가 그녀를 부축했다.
“제 잘못이에요. 혈교의 신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신녀의 신통력으로도 적들이 무슨 수작을 꾸몄는지 내다보지 못했다. 일이 시작된 뒤에야 어렴풋이 공양의식의 내막을 깨달았을 뿐.
“신녀시여, 어찌 스스로를 탓하십니까? 그건....”
“그래. 당시엔 그게 최선의 수였다고. 적어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믿고 있었지.”
두 칠성좌는 신녀를 위로했지만, 그들의 얼굴도 절망에 휩싸인 건 매한가지였다. 적들을 무찔렀는데도 살주를 멈출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의지했던 강엽도 심상세계에서 혈마와 싸우느라 도움을 줄 수 없는 판국.
그 와중에도 곳곳에선 피를 토하는 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살주를 키우고 있었다.
“정말 방법이 없나요? 신교에도 술사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머리를 맞댄다면...!”
“...방금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수성좌가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성좌가 본교에 잠입하여 술사들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행방이 묘연했던 이성군의 외숙부. 조카가 공양의식의 희생자가 되는 동안 그는 암중에서 혈교를 도왔다.
“그자가 변절한 건지, 아니면 속아서 혈교를 도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성좌와 월성좌에 의해 처단되었으니 알 길이 없겠지요.”
그리고 일성좌와 월성좌는 뒤이어 난입한 호교사천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후우, 지금은 총단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호교사천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교도들을....”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호교사천의 무위라면 수뇌부가 없는 신교의 총단을 휘젓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강엽....”
백서희가 젖은 목소리로 강엽을 부르며 그의 뺨을 어루만질 때였다.
신녀가 결연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 가지 해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모두가 희망을 되찾고 반색하는데, 신녀와 가까운 측근들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듯 표정이 굳어갔다.
“본래 인신공양은 기적을 구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었습니다. 다만 후대로 가면서 힘을 얻기 위한 사술로 변질되었지요.”
흉년과 가뭄, 역병 등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안된 술법.
가치 있는 제물을 희생할수록 인신공양의 효과가 증대된다는 걸 깨달은 고대의 마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식으로 힘을 키워왔다.
“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간악하게도 심상지경의 고수와 자신들의 신녀, 그리고 본교의 형제자매들을 희생시켜 혈마를 부활시킬 준비를 했지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강엽을 돌아본 그녀가 안색을 흐리며 말했다.
“막으려면 우리도 인신공양을 해야 합니다. 일월신교의 신녀라면 제물로서 가치가 있겠지요.”
“안 됩니다!”
수성좌를 비롯한 신교의 고수들이 기겁하며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신녀는 완고했다.
“아뇨. 제가 해야 해요. 저쪽에서도 신녀를 희생시켰으니 이쪽에서도....”
“설령 신녀의 말대로 해도 문제가 있소.”
일사도가 턱을 매만지며 하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혈교는 심상지경의 고수도 희생시켰지. 의식을 막으려면 이쪽도 같은 희생을 치러야 한단 뜻이오.”
일사도는 일전의 무공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만큼, 강엽을 제외하면 심상지경의 고수는 백서희뿐.
백서희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려고 할 때, 일사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심상지경의 고수는 저 덩치를 희생시키면 되니 굳이 백 소저가 희생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군요. 저 용을 잊고 있었네요.”
타락한 백택을 무찌른 뒤에 정신을 잃은 구두룡. 사태가 긴박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저만한 덩치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고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균형의 추를 이뤄도 살주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소.”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혈마를 깨우기 위한 의식이니까.”
그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눈치껏 잠자코 있던 팔사도까지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치며 재촉했다.
“뜸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봐요. 당신이 말하기 전에 속 터져 죽을 것 같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말은 안 하지만 백분 공감한다는 듯이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의 교리에 천하가 피에 잠길 때 혈마가 강림한다는 구절이 있지. 일월신교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일월신교를 천하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지 않소?”
“그 말씀은?”
“일월신교 말고도 다른 곳에서 공양의식을 벌였을지 모르오. 만약 그렇다면 신녀와 저 용을 희생시킨다고 해도 막는다는 보장이 없지.”
시작은 일월신교였을지 몰라도, 연쇄적으로 다른 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신녀께서 희생하셔도 헛수고로 끝날지도 모르오.”
“.......”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신녀는 물론이고 강엽 일행까지 착잡한 표정으로 낙담을 금치 못하는 그때였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하얀 피풍의를 흩날리는 남자가 어깨에 정신을 잃은 일성군을 짊어진 채 내려오고 있었다.
“일성군님!”
“설마 살아계신단 말인가?”
강엽이 일월구천관에서 나왔기에 영락없이 일성군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교도들이었다.
정혼자의 죽음을 예감하고 눈물 젖은 눈으로 혈전을 치렀던 화성좌도 놀라서 달려왔다.
“안 죽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좀 처맞아서 인사불성이 되긴 했는데....”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성군을 돌려준 사내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상황은 대강 알고 있다. 이거 참, 기껏 이겼는데도 상황이 영 개운치 않게 끝났는걸.”
“뉘시오?”
수성좌가 주름살을 찌푸리며 묻는데, 신녀가 입을 벌리며 뒤늦은 경악성을 토했다.
“설마 이런 일이...!”
“신녀시여, 이자를 아십니까?”
“...초대 교주이십니다.”
“예에?”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질 때 신녀는 재빨리 엎드리며 외쳤다.
“삼십칠대 신녀 유소향이 삼가 조사를 배알합니다!”
신녀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허언을 할 리는 만무. 칠성좌를 비롯한 신교의 고수들도 벼락처럼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강엽 일행만 떨떠름하게 사내를 바라볼 따름.
“이보게들! 자네들도 멀뚱멀뚱 서지만 말고 얼른 예를 갖추게!”
“아니, 됐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유익이 아니야. 그의 잔념이라고 할까. 말을 놓으라곤 안 하겠다만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으니 일어나라.”
상황도 급하니 허례허식에 매달릴 수는 없는 법.
유익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사람들은 쭈뼛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서 다시 한번 예를 갖추었다.
작게 주억인 유익이 말했다.
“시간 없으니 본론만 말하지. 강엽은 일월구천관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일성군을 죽이지 않았고, 나 또한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성군은 패했으니 그의 교주 계승권을 박탈하겠다.”
강엽이 나왔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기에 일성군의 세력은 착잡해할지언정 반발하진 않았다.
유익의 정체를 의심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해서 고개를 떨구었다.
“계속 말하지. 아까 저 친구가 했던 말이 맞아. 신녀와 구두룡을 희생시켜도 의식을 막진 못한다. 온 천하가 고통을 겪을 테고, 혈마는 완전히 부활할 거다. 다만 천산 일대에 한해서라면 살주를 막을 수 있지.”
“그렇다면...!”
“아니, 굳이 신녀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예?”
“내가 희생하겠다. 나는 일월성신의 잔념이니 신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지. 오히려 그녀를 희생시키는 것보다 더 나을 거다.”
“안 됩니다! 초대 교주께서 어찌!”
“구두룡의 봉인이 깨진 시점에서 일월구천관의 역할은 끝났다. 일월구천관이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지지. 겸사겸사 후손들을 위해 한 몸 불사를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최후라고 생각하는데?”
한쪽 눈을 찡긋한 유익이 짓궂게 웃으면서 신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넌 살아서 강엽을 도와라. 네가 그를 지지해야 교도들도 새로운 교주를 따를 것 아니냐.”
신녀는 교도들의 정신적인 지주.
만약 그녀가 신교를 구한답시고 희생한다면 교도들은 길 잃은 어린 양처럼 방황하리라.
“혈마가 부활하면 세상은 도탄에 빠지겠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지옥이 될 거다. 그러니 너희가 살아남으려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엽을 바라본 그는 빙긋 웃으면서 눈꺼풀을 내렸다.
“뒷일을 부탁한다, 후손들. 그리고 강엽의 동료들.”
너희가 세상의 희망이니까.
그 말을 한 직후, 눈부신 빛에 휘감긴 유익의 몸이 구두룡과 한데 엮이더니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어느덧 붉게 물든 황혼빛의 하늘을 하얗게 물들인 서광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빛가루를 뿌린다.
눈처럼 점점이 떨어지는 빛가루를 맞은 사람들은 각자 가지각색의 표정이 되어 생각에 빠졌고.
-네게 큰 짐을 맡기고 가는구나, 강엽. 나의 환생.
귓가를 간지럽히는 아련한 목소리에, 강엽은 손가락을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 * *
“유익....”
문득 귀에 닿은 음색에 강엽은 착잡해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야.’
비록 희미하긴 했지만, 유익이 남긴 목소리는 마음속에 확실히 전달된 바.
쿠구구구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해일처럼 일어난 흙먼지.
수십, 수백의 괴물들이 나자빠진 시산혈해 위에서 혈마가 씩 웃으며 목을 뚜둑 꺾었다.
[벌써 갈 생각이냐? 이제야 재밌어지는데?]
흰자위는 핏줄이 터진 것처럼 붉어지고, 검은자위는 하얗게 변색된 눈.
형태는 다르나 정마안과 비슷한 공능을 지닌 혈마안(血魔眼)이 강엽을 꿰뚫어본다.
[깜짝 놀랐다.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심상세계를 구축하고 천 년간 수련했거늘, 이런 나와 대등하게 맞설 줄이야. 심지어 진조뿐 아니라 세 연놈들의 힘까지 네게 전해졌군. 천마를 자처할 만해.]
-구오오오오오오!
혈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뻘건 화염이 타오르며 그의 뒤에서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강엽의 원영신과 싸웠던 삼두육비의 핏빛 수라. 그러나 그 덩치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했다.
강엽을 수호하듯 배후에 선 마신과 비슷한 덩치를 이룬 핏빛 수라가 눈동자를 둥글게 휘었다.
[이 녀석은 익숙하지 않나? 내 심상의 일부를 깎아서 신녀를 통해 종놈에게 전달했지.]
혈옥귀군이 썼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
산처럼 거대해진 덩치만큼이나 압도적인 기척이 온 천지를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마신 역시 위기감을 느끼는지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핏빛 수라를 견제하는 그때.
“언제 부활할 거지?”
[하하,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머지는 않았겠지. 며칠 이내로 여길 빠져나갈 거다.]
한쪽 입가만 말아올린 혈마가 두 팔을 벌린 자세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듯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기대되는구나. 천 년 만에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맛볼 수 있겠어. 일단 나가면 만 명 정도 죽인 뒤에 그 피를 모조리 마실 생각이다.]
“순혈도 아닌 놈이 피맛에 미쳤군.”
인간과 흡혈귀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혈.
그러나 흡혈귀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죽이고 피를 마시면서 진조에 한없이 가까워진 존재.
혈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넌 피를 좋아하지 않나 보군. 흡혈귀답지 않은 태도다. 피를 맛봤다면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알지 않나?]
“이젠 피 안 마신다.”
[흠,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혈마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굳이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내 앞길을 막으려거든 각오는 하고 와라. 그렇게 싸웠는데도 내게 별다른 유효타를 못 꽂지 않았나?]
“피차 마찬가지지.”
심상세계에서 싸운 것인 만큼 현실에서 싸운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상단전의 영감은 이 정도로는 혈마를 못 죽인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아마 혈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지금 가진 힘으로는 강엽을 제압하지 못한다는 것을.
[좋아. 힘이 완성되면 찾아오도록. 아니면 내가 먼저 찾아갈지도 모르겠군. 그때가 되면 누가 진정 세상의 주인이 될지 가릴 수 있겠지.]
쩌적! 쩌저저저저적!
혈마의 말과 함께 심상세계가 갈라지면서 두 사람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진다.
상대의 모습이 어둠에 묻힐 때까지도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각오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