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탈맹 (1)
광활한 밤하늘 아래 우뚝 선 부처상.
한 손으로 반장을 하고, 다른 손은 수평으로 눕힌 부처상을 본 적미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없이 심상의 정경을 둘러보기를 한참.
“...이게 사부의 심상절예라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멈춰달라고 하셨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네가 폭주할 걸 내다보셨던 것 같군.”
방금까지 아무도 없었던 곳에 나타난 강엽.
하지만 적미성은 그보다는 말에 담긴 뜻이 더욱 거슬리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사부는 위대한 실패자였다.”
언뜻 들으면 모순적인 말.
그러나 강엽은 가만히 경청했다.
“흑룡교주를 격살했고, 수많은 사마외도를 벌했지. 그가 광승이라 불릴 동안 사마는 감히 궐기하지 못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잊고 살계를 범한 불권의 과거.
불권은 과거를 자책하고 번민한 끝에 심마에 시달렸지만, 적미성은 영광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스스로 지옥의 밑바닥을 핥더라도 사마외도를 박멸해 세상을 구하는 게 아라한의 임무다.”
“그래서 불권이 실패했다?”
“서글펐다. 난 광승을 동경했는데, 내가 그를 만났을 땐 광승은 죽고 없었으니....”
그저 심마에 고통받는 늙은 승려가 있었을 뿐.
“나는 사부가 다하지 못한 탕마멸사를 이루겠다고 맹세했다. 이 몸이 지옥에서 영겁을 고문받더라도 마도의 숨통을 끊겠다고 다짐했지.”
하지만 개인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외소림을 이끌면서 사마외도를 닥치는 대로 죽였지만, 놈들은 잡초처럼 자라났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때론 실수하고, 때론 실패하며 더 큰 피해를 내기도 했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 열 명의 도둑을 놓쳐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놓친 열 명의 도둑이 수십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 테니까.”
“....”
“얼마든지 욕하고 저주하라고 해라. 모든 업보는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 너 역시 마찬가지!”
강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적미성이, 들끓는 분노를 적나라하게 토해냈다.
“넌 화근이 될 거다! 광명마교와 흑룡교 이상으로! 혈교 이상으로! 마인 따위에게 천하제일의 칭호가 주어지는 거야말로 정파의 치욕이고 세상의 위협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해악인 강엽은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한다. 설사 이 일로 사람들이 좀 죽어도, 훗날 일어날 혈겁에 비하면 감수할 만한 피해가 아닌가?
그렇게 광기과 아집에 사로잡혀 열변을 토하는 적미성을 물끄러미 보던 강엽이 툭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뭐라고?”
“얼마나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궁금해서 다 들어주긴 했는데, 역시 시간낭비였군.”
“네놈....”
적미성의 얼굴에 분노가 번질 때 강엽은 실소를 그치고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선 몇 날 며칠이고 반박하고 싶은데, 시간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파지직...!
손가락 사이로 명멸하는 새하얀 뇌력이, 팔을 타고 상공을 향해 뻗어나간다.
어느새 하늘의 별바다를 가린 시커먼 구름 사이로 섬뜩한 뇌성벽력이 빗발치는 광경.
“뇌기인가. 저번과 같은 짓거리엔 안 당한다!”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하고, 종아리 비복근으로 발경력을 끌어모아 힘차게 약진한다.
찰나에 천지를 가른 벼락 줄기가 강타했지만, 이를 아슬아슬하게 회피.
단숨에 거리를 좁히면서 일권을 내지른다.
“우오오오오오오!”
두꺼운 전완근을 타고 휘몰아친 전사경 경파.
막강한 용오름이 짓쳐들어오자 강엽은 맞서는 대신 촛불이 꺼지듯 홀연히 사라졌다.
동시에 창백한 섬광이 점멸했다.
쿠르르르르릉...!
한 박자 뒤에 들려오는 장대한 벽력성.
공기가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고, 뜨거운 기류가 몰아치면서 대기의 수분이 급속도로 증발한다.
새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열탕지옥에서 빛이 번쩍이고 농밀한 경파가 대기를 짓이겼다.
한 대라도 맞으면 온몸이 부스러질 강력한 경파.
강엽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경파를 피하고 흘리면서, 수중의 뇌기를 조율하며 반격했다.
자성검법을 대성하고 이룩한 새로운 경지.
굳이 검법을 통하지 않아도 뇌기가 의념대로 움직이며 그 자리에서 초식을 만들어내고 쏟아낸다.
“뇌기가 극에 달해 무초식의 경지에 도달했군!”
뇌기가 춤추듯 회전하고, 꽃을 피워내고, 이리저리 얽히면서 즉석에서 투로를 만들어낸다.
그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적미성은 빗발치는 벼락을 우격다짐으로 뚫고 전진했다.
심권조차 버틴 육신이 벌겋게 익고, 신경이 마비되면서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꿋꿋히 공격을 이어간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거센 용오름이 강엽이 있던 곳을 삼키고 부처의 약지를 강타, 손가락의 일부를 깎아놓는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균열도 가지 않았던 부처의 육신이 처음으로 상한 순간.
빛살로 화해서 전권을 벗어난 강엽을 따라잡으면서 무식한 육탄전을 걸어온다.
하박과 슬격이 부딪치고, 어깨로 일권을 받아내며 족격을 뻗어 턱뼈를 가격.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합을 나눈 두 사람은 범인이 인지할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부딪쳤다.
찰나의 순간을 수백, 수천 개로 쪼갠 것처럼 감각하고 육방의 공간을 자유롭게 누빈다.
처연하게 웃는 부처상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가운데 파찰음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고,
벼락을 두른 심검과 용오름을 휘감은 심권이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 충돌했다.
“귀여어어어어엉-!”
장대한 노호성과 함께 절기가 쏟아졌다.
백보신권과 대력금강장, 사자모니인 등등 소림칠십이종절예의 총화. 인간의 형상을 띤 비급과 같은 모습으로 거침없이 재액을 휘두른다.
무공의 가짓수만 따지면 강엽조차 능가할 터.
“너, 일월마교의 교주야! 감히 날 농락하는 거냐!”
그러나 맞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일권을 맞은 강엽의 형상이 깨진 거울처럼 박살나고, 그 너머에서 상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온다.
요사스런 붉은 광채를 토해내는 왼쪽의 마안.
환신의 심상법을 흡수한 마안의 환술이 적미성으로 하여금 엉뚱한 방향을 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걸 이제 알았냐?”
“뭐야?”
“강해진 건 인정하지. 지난번과 비교하면 두 배는 족히 강해졌어.”
시큰둥하게 적미성을 바라보는 강엽의 왼눈에 일순 붉은 빛이 강해졌다.
“실험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군.”
“...!”
만상여의 안에 깃든 무망여래지망을 꺼내들긴 했지만, 다른 심상절예는 일절 쓰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없는 심산유곡에서 싸웠다면 굳이 무망여래지망을 꺼내는 일도 없었을 터.
‘원래 교화를 목적으로 만든 심상절예인 만큼 살상력은 전무하니까.’
이대로 놈을 무망여래지망에 가두고 진이 빠질 때까지 고사시키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완성만 하고 실전에선 쓰지 못한 수법을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너야말로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적미성이 밑천을 다 드러냈다면 이 정도로 느슨하게 대응하지는 못했겠지.
강엽은 입매를 씰룩거리는 놈을 삐뚜름히 응시했다.
“불권의 심마를 흡수했다면서? 그놈의 심상절예는 아껴뒀다 저승길 노자로 쓸 거냐?”
“.......”
적미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는 강엽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놈처럼 용맥을 이용하는 것 같은데.”
놈을 처치했을 때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용맥 깊숙이 숨었기 때문이었다.
용맥과의 결합을 풀었음에도 그 힘을 일부나마 이용할 수 있었던 것.
그렇다면 심마와 한 몸이 된 적미성 또한 용맥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 터.
“...그렇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었을 것을.”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살짝 허리를 굽힌다.
길게 숨을 들이킨 적미성이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그의 피부가 흑연처럼 시커매졌다.
흰자위는 불길마냥 벌게진 반면, 눈동자는 금을 녹인 것처럼 노랗게 변했다.
“화안금정(火眼金睛)....”
제천대성의 외양을 묘사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문구.
그의 화안금정은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며,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다고 하던가.
“이제 네놈의 환술은 통하지 않는다.”
불권의 심마처럼 등 뒤에 불타는 광륜을 둔 적미성이 하얗게 이를 드러낸 순간.
적미성의 신형이 강엽의 위에서 나타났다.
투아앙!
발뒤꿈치로 타격하는 회축의 일격.
두 팔을 교차해서 막았지만, 충격이 아래로 가해지면서 부처의 손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널 죽이고 정도의 기치를 바로세우겠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의 사마외도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야!”
적미성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수십 명의 분신이 사방에서 짓쳐들었다.
대성의 경지를 넘은 연대구품.
뇌기가 그물처럼 덮치면서 분신들이 사라졌지만, 몇 배나 되는 분신들이 절초를 퍼붓는다.
몇 명은 심권을 쓰거나 심봉(心棒)을 쓰면서 뇌기를 상쇄하고 의표를 찌르기까지.
‘마안은 안 먹히나?’
심마와 합일되면서 육신통이 극대화된 걸까.
전설 속 화안금정까진 아니더라도 환술에 낚이지 않고 강엽이 있는 곳을 정확히 타격한다.
쾅! 터엉! 투아아앙!
좁은 공간에서 극히 절제된 동작으로 분신들을 없앨 때, 막강한 심상의 파동이 너울지듯 퍼졌다.
-심상절예 구현.
분신들이 강엽을 상대하는 사이 공력을 끌어모은 적미성이 비장의 수를 꺼내든 것.
-천장강신 번천멸각.
백팔의 화엄신장이 나한진을 그린다.
단지 강엽을 포위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심상의 정경을 부수며 억지로 틈새를 만들어냈다.
“감사하마, 귀영.”
하늘 높이 떠오른 적미성이 화엄신장에 둘러싸인 강엽을 오시하면서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심마를 떨치고 사부가 새로이 만든 심상절예. 과연 얼마나 대단한지 견식해보고 싶었지. 사부가 귀천해서 이젠 기회가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불권이 무망여래지망을 강엽에게 넘기면서 간접적이나마 겪어본 바.
적미성의 낯짝이 처연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사부는 영락했다. 헛된 번뇌에 사로잡히지만 않았어도 고금에서 가장 위대한 무인이 됐을 것을!”
강엽을 포위한 백팔의 화엄신장들이 수레바퀴처럼 움직이며 소림칠십이종절예를 퍼붓는다.
창백한 벼락이 춤추고, 백염과 빙백이 충돌하면서 일대를 뒤집었지만 조금도 밀리지 않는 위용.
신장들의 피부가 거무스름한 광택을 내는 것을 보고서야 강엽은 영문을 깨달았다.
“...신장들도 금강불괴를 이뤘나.”
불권의 심마가 썼던 심상절예 전륜극형.
그 심마가 적미성과 한 몸이 되는 바람에 심상절예 역시 변질되고 만 것이다.
그 맷집은 지난날 심법진에서 싸웠던 심마의 분신들 이상으로 단단하기 그지없다.
‘이만하면 철륜... 아니, 동륜급도 넘겠어.’
가장 낮은 철륜만 해도 무광암을 써야 부술 수 있을 만큼 철통방어를 자랑하지 않았던가.
용맥에서 끌어모으는 자연지기로 백팔의 화엄신장 전부를 금강불괴로 만드는 위용.
만약 광명마교주가 이 자리에서 대신 싸웠어도 제법 까다롭다고 평하지 않았을까.
천하의 용맥을 한 손에 움켜쥔 광명마교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북해에서 만난 일월신교주보다는 고강했다.
“이깟 모조품 따위 모조리 없애주마!”
백팔의 화엄신장들이 내지르는 절기들.
강엽은 혈무화와 심상화를 통해 피했지만, 정작 무망여래지망의 부처상은 처절히 망가지고 있었다.
산봉우리조차 무너뜨릴 경파들이 쉼없이 쏟아지면서 부처의 손가락을 부수고, 팔뚝을 갈라버린다.
산산조각 쏟아지는 파편들 틈에서 강엽을 발견한 적미성이 살광을 희번뜩 빛내며 쏘아진다.
단숨에 허공을 갈라버리며 강엽의 사각을 포착, 무지막지한 심권을 때려박았다.
콰콰콰콰콰쾅!
대기가 이지러지고, 의표를 찔린 강엽이 추락하는 가운데 화엄신장들이 일권을 날리고, 발로 가격한다.
튕기듯이 하늘로 솟구친 강엽의 위에서 나타난 적미성이 포권하듯 모은 양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투아아아아앙-!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추락한 강엽과 함께 두 사람을 감싼 심상의 정경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에 귀밑까지 찢어지는 광소를 터뜨린 적미성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주먹을 당긴 순간.
“끝이다, 귀...!”
“확실히 이대론 안 되겠어.”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눈을 부릅뜬 적미성이 몸을 빛살로 바꿔서 전권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촤아아아악!
그전에 들이닥친 심검이 등짝을 깊숙이 가르고 장기의 일부를 갈라버렸다.
“커억!”
대체 어떻게.
불신이 역력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 곳엔 멀쩡한 강엽이 검결지를 내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형편없이 당하면서 피떡이 됐건만, 그러한 기색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싸운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
무언가 깨달았는지 동공이 확장된 적미성이 급하게 시선을 내리며 이를 빠득 갈았다.
“원영신...!”
좀 전까지 그와 드잡이질을 벌이던 강엽이 핏빛의 안개로 변하면서 홀연히 사라졌던 것.
아래에서 올라오는 핏빛 안개를 회수한 강엽이 무감정한 눈으로 적미성을 굽어봤다.
“그래서 말했잖나. 넌 실험 상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