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04화 (404/450)

80화. 태풍 (4)

만인이 한 사람을 주목하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길을 걷듯 하늘 위로 걸음을 옮기는 강엽의 모습에 곳곳에서 탄성과 비명이 일었다.

“허공답보(虛空踏步)!”

“과연 천하제일인이군. 한데 귀영이 나선다는 건... 설마 맹주와 싸우고자 함인가?”

새로운 천하팔존들의 대결이 목전에 임박했다는 예감에 군중들이 긴장하는 찰나.

강엽은 서슴없이 양손의 장갑을 벗어던졌다.

“문신이...!”

해와 달의 문양. 낙인처럼 새겨진 시커먼 문양을 알아본 고수들이 대경실색했다.

이래서야 맹주의 말이 맞는 꼴이 아닌가.

“일월마교의 권좌는 공석입니다. 그가 교주라는 건 말이 안 돼요.”

옥청선자가 안타까워하며 호소했지만, 현운 진인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구려.”

“원시안진.”

종현은 눈을 감으며 도호를 외우고, 당천경은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 이럴 셈인가?]

[죄송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네. 서로 양보하면 파국은 피할 수 있어. 손등의 문양도 변명할 수 있단 말이야!]

[불가능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후 강엽에게 몇 가지 당부를 더 들은 당천경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는 참 불효막심한 사위야.]

설령 강엽이 뜻을 접고, 구파일방과 팔가의 수장들이 그를 비호한들 적미성은 멈추지 않으리라.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생각이겠지.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내려선 강엽은 적미성의 주변인들을 쭉 둘러봤다.

“졸자들은 도움이 안 되지 않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폭언.

멸마전의 아라한들과 맹방의 문주들이 울컥한 얼굴로 쏘아봤지만 강엽은 심드렁했다.

무림맹을 나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배려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적미성이 씩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지. 어차피 이 싸움은 우리들의 것. 타인이 끼어들어봤자 방해물밖에 안 된다.”

“대사... 아니, 맹주님!”

멸마전의 아라한들, 특히 갈마중이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적미성은 완강했다.

“물러서라, 사제들. 맹방의 문주들을 호위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결국 적미성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듯 갈마중은 아라한들에게 작게 눈짓했다.

문주들을 호위하며 장내를 빠져나가는 아라한들이 강엽을 한차례씩 노려보며 살기를 드러낸다.

강엽은 둘만 남았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싸우기 전에 뭣 좀 물어보자.”

“얼마든지.”

“왜 하필 지금이냐?”

혈교와의 대전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강엽을 적으로 돌렸단 말인가.

적미성은 뚱하게 대답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뭐?”

“너에 대해 알아봤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유생이었지. 한데 그 짧은 시간에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큼 강해졌다.”

스승 송계학과의 관계가 탄로난 시점에서 과거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광명마교주의 서책은 진짜다. 암야마독이 그의 방에서 찾아냈지. 그 서책엔 어떤 고대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있더군. 진조라고 했던가?”

“....”

“놀라웠다. 평범한 유생이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이 진조의 후계자가 됐기 때문이라니. 지난 세월 강해지기 위해 아등바등한 내 자신이 우스워지더군.”

“그래서 날 치려고 했다?”

“그렇다.”

순순히 인정하는 적미성의 눈빛엔 적의와 경계심,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이 년 만에 이렇게 강해졌는데 시간을 주면 얼마나 강해질까? 지금도 천하제일이라 불리는데 여기서 더 강해지면 고금제일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날 제거하고 싶었나.”

“운명의 세 별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다. 난 내 앞길을 막은 놈을 용서하지 않아.”

그렇기에 만인의 앞에서 강엽의 정체를 폭로하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뭐, 내가 좀 서두르긴 했지. 하지만 네가 일월신마공을 익힌 건 사실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질 테고, 모두가 날 알아줄 거다.”

“거기엔 전제조건이 있군.”

“...?”

“날 이기는 것 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발밑에 무채색의 파문이 일면서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황금빛 위광을 두른 적미성이 기수식을 취했다.

쿠구구구구구궁......!

하늘이 울고 대지가 진동한다.

심상지경의 고수 두 명의 공력이 부딪치면서 장내가 흔들리자 군중들은 겁에 질렸다.

무림맹과 맹방의 고수들이 군중들을 서둘러 피난시키는 와중에도 적미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덤덤한 신색으로 온 심력을 눈앞의 호적수에게 집중할 따름.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가 발밑의 판석을 가죽신 앞코로 툭툭 찔렀다.

두 사람의 공력 파동으로 연단이 날아간 무대는, 바둑판처럼 가로세로에 줄이 그어진 모양새였다.

“이건 비무대다. 내 특별히 단단한 대리석으로 준비했지. 운남의 특산물인 점창산의 대리석으로 말이다.”

강엽도 점창의 대리석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내가고수들의 장법에도 깨지지 않는 물성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절대고수에겐 소용없었다.

콰앙!

두 사람의 신형이 흐릿해지면서 판석이 깨지고, 돌부스러기가 튄다.

어지러운 기류에 휘말린 부스러기들이 허공에서 가루가 되는 동안, 두 절대고수는 비무대를 자유롭게 누비면서 손속을 겨루었다.

구파일방과 팔가를 비롯한 천하 무림의 인사들이 지켜보는 생사결.

그러나 외부의 시선에 두 사람은 잡히지 않는다.

이따금씩 번뜩이는 섬광만이 두 사람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

붉은 섬광과 황금빛 섬광이 교차할 때마다 커다란 충격이 닥치고, 어지러운 실금이 비무대를 할퀴었다.

뜨겁게 고조되는 공기 속에서 살의가 부딪치고, 막강한 공력 파동이 쉴 새 없이 터져나간다.

절세고수조차 순식간에 절명할 태풍이었다.

* * *

비무대가 내려다보이는 상석에선 논의가 한창이었다.

“무량수불, 저들이 협력했다면 무림에 평화와 안녕이 찾아왔을 것을....”

“한 산에 호랑이가 둘일 수는 없소.”

아미의 장문인 혜정 사태가 안타까워하는데 허리춤에 유엽도를 패용한 장신의 도객이 짧게 대꾸했다.

광동진가의 가주인 극위도(極位刀) 진운용이었다.

“오늘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충돌했겠지. 저들은 누군가의 밑에 있을 자들이 아니오.”

“맹주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거늘.”

모용세가주가 한탄하는데 옥청선자가 얼음장처럼 싸늘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맹주를 다시 뽑아야겠군요.”

“선자, 몹시 위험한 발언입니다.”

“아뇨. 적 맹주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맹원들과 군중들을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그게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책임을 피할 순 없어요.”

“하나 투표의 결과를 뒤집을 순....”

“이 자리에서 제언하지요. 화산파는 현 맹주 권패 적미성의 탄핵을 건의하겠습니다.”

“...!”

“무당 역시 동의합니다.”

“점창도 마찬가지요.”

구파 중 셋이 탄핵안을 들고 나왔다.

“맹규에 따르면 맹방의 삼분지 일이 건의하고, 삼분지 이가 대회합을 열어 찬성하여, 원로원의 재가를 받으면 그 즉시 맹주가 해임됩니다.”

본래는 영구 집권을 노리는 맹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맹규. 그러나 행사된 적은 무림맹의 긴 역사를 통틀어 한 손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

“모용도 동의하오.”

“무량수불, 아미 역시 찬성합니다.”

“제갈도 찬성표를 던지겠습니다.”

“청성은 중립을 지키겠소. 맹주위를 두고 경쟁한 만큼 찬성하면 자칫 세간의 오해를 살까 두렵구려.”

정치적 이유로 중립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찬성표나 다름없는 상황.

다른 대문파들도 속속들이 발언하면서 찬성 쪽으로 기울어질 때, 종남파 장문인이 물었다.

“개방과 곤륜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

적미성에게 힘을 실어준 대문파들.

개방주 만리독행개 우황신과 곤륜파의 원로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찬성하겠소이다.”

“곤륜 역시... 동의하오. 무림 동도들에게 폐를 끼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구려.”

여기서 적미성의 편을 들어준다면 다른 대문파들과 반목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물론 적미성이 이긴다면 곱게 넘어가기 힘들겠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개방과 곤륜까지 찬성을 표하는 와중에 한 문파만이 침묵을 견지했다.

“당문주께선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당천경은 가만히 싸움만 보고 있었다.

사위로 점찍은 강엽의 신변을 우려해서일까.

“...적 맹주를 탄핵하고 말고는 중요치 않소.”

“그게 무슨....”

“어차피 저 싸움에서 패한다면 죽을 테니까. 죽은 자는 맹주위를 지킬 수 없지.”

“우리들도 잘 압니다. 하나....”

“귀영이 이긴다면 그를 어찌 처우해야 하오?”

“....”

“귀영이 정말 일월마교주의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소. 하나 적 맹주의 도발에 응했단 것은 스스로를 변호할 생각을 버렸다는 뜻이오.”

“일단 구속한 다음에 조사해야지 않겠습니까.”

“적 맹주를 죽인 죄는?”

탄핵을 하더라도 그전까지는 맹주다. 그리고 적미성이 죽기 전에 탄핵이 가결될 가능성은 없었다.

적미성은 무림맹주의 신분으로 죽고, 강엽은 무림맹주를 살해한 죄를 뒤집어쓸 터.

“맹주를 살해한 죄는 무겁소. 만약 그가 맹주를 죽인다면 이젠 무림맹과 함께할 의사가 없다는 거겠지.”

“그럼 어찌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무림 공적으로 선포해야 하오.”

“...!”

공적의 굴레가 씌워지는 순간 다시는 백도 정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다.

당천경이 그걸 모를 리 없으니, 이는 강엽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지 않겠다는 뜻.

독한 결정에 대문파의 수장들마저 혀를 내두를 때, 당천경은 멀리 있는 딸을 보고 있었다.

처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딸의 모습에 그는 바짓단을 꽉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

강엽과 엮일 여지를 썩둑 잘라내서 당문을 지켰지만,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저를 무림 공적으로 몰아가십시오.

그게 당문이 사는 길이라면서 스스로 악업을 뒤집어쓴 사위의 전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 * *

“탐색전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적미성의 몰골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잘 정리한 머리는 산발이 되었으며, 옷은 걸레짝이 되는 바람에 추레하기 그지없는 몰골.

그러나 찢긴 옷매 사이로 드러난 육신엔 상처 하나 없었다. 오래전에 새겨진 흉터들만이 그가 수많은 사지와 역경을 뚫고 이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지난번보다 훨씬 단단해졌군. 호신강기 없이도 통상 공격은 맷집으로 때우고 있어.’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타격했음에도 오장육부를 흔들기는커녕 외려 반발만 일어난다.

이만한 금강불괴라면 육신의 힘만으로도 어지간한 절세고수쯤은 때려죽이지 않을까.

“그동안 뭘 한 거지?”

“네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기연을 얻었거든.”

걸레조각이 된 옷을 뜯어버리면서 근육을 불끈거리자 피부가 급격하게 뜨거워진다.

마치 피가 쏠린 것처럼 붉게 물든 육신 위로 시커먼 영기(靈氣)를 뭉게뭉게 뿜어내는 형상.

가늘게 뜬 눈으로 적미성을 관찰한 강엽은 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불권의 심마를 흡수했나.”

“나는 과거의 사부와 한 몸이 되었다. 탕마멸사의 의념이 나와 함께하는 거지!”

버럭 사자후를 토한 적미성의 신형이 빛살로 변하면서 강엽의 배후를 잡았다.

채찍처럼 후려친 손등이 허공을 찢어발긴다.

한 끗 차로 붉은 안개로 바뀐 강엽이 인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자세로 일권을 내질렀다.

투아아아아앙-!

금강불괴조차 깨부수는 심권이, 허공에 둥근 파문을 그리며 적미성을 날려버린다.

좀 전까지 군중들이 있던 자리를 연달아 박살내고 깊숙이 파묻는다.

맹원들이 군중들을 피신시키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났을 만큼 어머어마한 피해였다.

“화끈하군! 하지만 아직 멀었다!”

명치에 새겨진 선명한 주먹 자국. 하지만 적미성이 시커먼 수증기를 내뿜자 빠르게 사라졌다.

“금강불괴도 모자라서 재생의 공능인가.”

얕은 상처라고 해도 심흔을 자력으로 회복했다면 얕볼 수 없겠지.

안 그래도 귀찮은 놈이 몇 배로 성가셔졌다.

‘이대로 싸우면 걷잡을 수 없겠군.’

무림맹의 고수들이 군중들을 피난시키긴 했지만, 이대로 싸운다면 무림맹 자체가 끝장날 수도 있다.

“...이걸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심상의 기운을 두른 적미성이 쇄도하는 순간.

강엽의 손아귀를 타고 흐르는 무채색의 파동이 비무대가 있던 일대를 집어삼켰다.

-심상절예 구현.

온몸으로 부딪치는 고법을 한 손만으로 막는다.

천근추로도 상쇄되지 않아서 깊은 고랑을 그리며 쭉 밀려났지만, 심상절예 자체는 완성되었다.

-만상여의.

심상절예를 집대성한 심상절예.

사바를 떠나 정토에 잠든 어떤 고승의 심상이, 강엽의 장심에서 춤추듯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건 설마...!”

낯익은 기운에 적미성의 호목이 부릅뜨인 찰나.

-무량여래지망.

천계를 어지럽힌 제천대성을 붙잡은 석가의 심상.

강엽에게 모든 걸 맡기고 떠난 불권의 심상절예가, 그 제자를 향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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