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탈맹 (2)
삼화취정의 요건인 정기신의 합일.
원영신은 하나를 이룬 정기신을 조금씩 떼어내어 그릇으로 삼고, 의념을 불어넣어 빚어낸다.
검선과 일월신교주, 광명마교주를 비롯한 심상지경의 고수들이 다룬 원영신은 조금씩 형태가 달랐다.
그들이 만든 원영신을 탐구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고, 짬짬이 짜임새를 구상했다.
‘내가 나설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투사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말하자면 자율적인 의사를 가진 원영신.
그러나 무턱대고 만들면 원영신이 독립을 시도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접근해야 했다.
아직 진조가 존재한 시절에 그의 도움을 받아 뼈대를 세웠고....
‘만들긴 했지만 어느 정도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군.’
항주의 대전이 끝난 뒤에 가까스로 완성했지만, 정작 원영신의 한계를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알아낸 건 심검은 쓰되 심상절예는 쓰지 못한다는 것.
정기신의 비중을 늘려도 공력만 증가할 뿐.
“원영신이 심상지경의 고수와 얼마나 싸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점에 감사를 표하지.”
“이 자식!”
악다문 잇새로 노기를 쏟아낸 것도 잠시.
다음 순간 놀랄 만치 싸늘하게 가라앉은 적미성이 코웃음을 쳤다.
“이깟 심흔 따위야 재생하면 그만이다!”
바위같은 근육이 수증기를 피어올리면서 상처를 재생했다.
상처에 침투한 강엽의 의념을 체외로 배출하고 있는 것.
하지만 강엽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의념이 폭주하면서 기혈을 헝클어뜨렸다.
“커헉! 너, 너...?”
“숨겨둔 밑천이 없으면 이만 끝내자.”
산산조각 깨져나간 심상의 정경 사이로 새로운 심상이 나타난다.
찬란한 별들이 흐드러지게 만개하고, 별로 만든 은하가 흘러간다.
태양과 달, 그 사이에 수놓인 억만 개의 별들.
일월성신의 심상 아래, 강엽의 손등에 어린 태양과 달의 문양이 농밀한 의념의 파동을 뿜어냈다.
-일월쇄태극.
일월신교의 개파조사 유익의 심상절예. 음양오행의 이치를 뜻한 대로 구부리는 절대적인 심상.
무량여래지망이 깨져나간 틈새 사이로 새롭게 등장한 심상이 용맥의 힘을 틀어막은 그 순간.
“끄아아아아아아악!”
용맥의 자연지기가 빠져나가는 상실감에 온몸을 비튼 적미성이 빠르게 쏘아졌다.
“귀여어어어어어엉!”
격노에 휩싸인 일권이 채찍처럼 날아온다.
그러나 훨씬 늦게 움직인 강엽이 주먹을 잡으면서, 그 안에 담긴 거력은 허무하게 스러졌다.
“형편없군.”
용맥의 기운을 빼앗겼다 하나 심상지경의 무공은 여전할 터.
그런 이의 주먹이 후발선제의 묘리에 속수무책으로 잡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흥분하지 마라. 냉정하게 판단해. 상대의 수를 예측하고 어떻게 허점을 찌를지 궁구해라.”
“...!”
무공 교두들이 어린 제자들을 가르칠 때 쓰는 격언.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들을 말은 아니었다.
“놈, 감히 마두 주제에! 이 몸을 가르치는 거냐!”
소림 무학의 정수를 익힌 아라한답게 주먹과 다리뿐 아니라 어깨와 무릎, 팔꿈치에 이르기까지 전신을 이용한 박투술로 연격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노도처럼 이어지는 공세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몸에 닿을 만큼 가까운데도 닿지 않는다.
“광명마교주에게 배웠지.”
공간을 굽혀 투로를 왜곡시키는 신기(神技).
입도공월의 술로 공간에 개입하는 법을 깨달은 이후, 강엽 역시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
“네가 광명마교주처럼 강했다면 나도 목숨을 걸고 싸웠겠지만, 네겐 그럴 가치가 없는 것 같군.”
“내가 그놈보다 못하다는 거냐-!”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월쇄태극으로 용맥의 기운을 남김없이 빨아들인 다음, 곧장 다음 수로 넘어갔다.
차륜전을 걸어오는 백팔의 화엄신장들을 힐끗 보고, 손뼉을 짝 쳤다.
양손이 조금씩 어긋나며 태극의 형상을 그려나가고, 그 사이로 하얀 뇌기가 실타래처럼 이어진다.
-심상절예 구현....
막대한 의념의 파동에 적미성이 입술을 비틀었다.
“뭔가 했더니 그때의 심상절예냐? 강력한 건 인정하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
금강불괴가 된 화엄신장들이라면 어지간한 심상절예는 능히 버텨낼 수 있을 터.
화엄신장들이 파상공세를 퍼붓는 동안 아득한 상공으로 솟구친 적미성이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오!”
강엽을 향해 두 주먹을 뻗으면서 떨어진다. 화엄신장들의 백팔나한진에 화룡점정을 찍는 필살의 권격.
그러나 부딪치기 직전, 두 손으로 태극을 그린 강엽의 전신에서 서로 다른 의념이 움텄다.
뜨거운 열화의 심상과 차가운 빙극의 심상.
백염과 빙백의 두 심상이, 태극을 그리는 백뢰의 심상과 얽히면서 전혀 다른 힘으로 변모한다.
-심상절예 만상여의 오의 삼재융극(三才融極).
본래라면 합일은커녕 공존도 할 수 없는 상극의 심상들이 강엽의 의지 아래 하나로 통합.
그리하여 이전엔 없었던 새로운 심상을 자아냈다.
“말도 안...!”
일대를 휩쓴 심상의 파동에 적미성이 현실을 비관하는 순간.
-삼청연화(三淸蓮花).
하나로 합쳐진 삼종의 심상절예.
각기 하얗고, 붉고 푸른 광채를 내뿜은 심상이 백팔나한진을 강타하고.
일순 빛이 번뜩이면서 오감을 삼켜버리는 눈부신 충격이 별바다의 정경을 휩쓸었다.
* * *
쿠구구구구구궁...!
무림맹을 통째로 뒤흔든 지진.
그것이 심상절예의 여파임을 깨달은 백서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엽...!”
무림맹의 전각군을 쓸어버린 기파. 고강한 자들은 그 안에 담긴 의념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죽립을 쓴 백발홍안의 노인이 탄성했다.
“그분께서 성공하셨구려.”
“그러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앳된 여인.
복면을 뒤집어쓴 그녀는 하늘을 힐끗 보고는 쓰러진 적을 사뿐히 즈려밟았다.
단발머리의 여인이 핏발이 선 눈으로 부득 이를 갈았다.
“크악! 죽여, 버리겠어...!”
“얼씨구, 잘도 그러겠네.”
가녀린 체구와 맞지 않게 두 주먹으로 암야마독을 분쇄한 여인.
그녀 앞에 백서희가 툭 떨어졌다.
“오.”
복면 여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처음 만나는데도 한눈에 알아보겠네. 신녀께서 말씀하신 아이가 너구나?”
“예의를 갖추시오, 금성좌. 선대 교주님의 혈손이자 주군의 부인이 되실 분이오.”
워낙 작게 말한 데다 사방이 어수선했기에 무림맹 고수들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좌의 발 아래에 깔린 암야마독은 그 말을 알아듣고 눈을 부릅떴다.
“일월...!”
“좋게 말할 때 닥치렴.”
한 대 맞고 기절한 암야마독의 꼬락서니에 백서희는 허 감탄했다.
“만만한 년이 아닌데 잘도 제압했네. 일월신교의 칠성좌는 다 당신처럼 강해?”
“아니, 내가 특별히 강한 거지. 근데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구나?”
“저 할아버지가 한 말 못 들었어?”
졸지에 할아버지라 불린 수성좌가 할 말을 잃고 머쓱해질 때 금성좌는 키득거렸다.
“참, 그분의 연인이라고 했지. 그분이 교주가 되시면 넌 대부인이 되겠네.”
“....”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그냥.”
정파의 일원으로 산 지는 얼마 안 됐는데도 무림맹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심정이 복잡했던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든 걸까.
“근데 우리 일행은?”
“광명마교의 잔당들과 함께 도주 중. 거참 칠성좌인 내가 그 일광충(日光蟲) 새끼들을 탈출시키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시답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앞이나 보시오.”
수성좌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우린 지금 정마대전의 한복판에 있으니까.”
천하의 칠성좌가 정마대전을 운운할 만큼 화려한 면면들이 일행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신령스러운 기운을 두른 수려한 중년 문사.
“누가 쳐들어왔나 했더니 일월마교에서 오신 분들이었구려. 심지어 칠성좌가 두 명이나 오셨다니.”
“엥? 한눈에 알아보네?”
금성좌가 신기해하자 제갈의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누가 광마권후(狂魔拳后) 교아랑과 일월운장(日月雲長) 정도준을 못 알아보겠소?”
“이게 다 네 탓이야, 수성좌 늙은이. 그러게 왜 언월도를 독문병기로 삼고 지랄이야?”
“그러는 금성좌도 그 쓸데없이 걸걸한 입담과 무식한 주먹질 때문에 정체가 탄로나지 않았소?”
“그럼 내 탓이라는 뜻?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저놈한테 물어보자. 지는 사람은 신도(神都)에서 천 냥치 술값을 사는 거야.”
“...제발 부탁인데 좀 진지해지면 안 되오? 우리가 마실 나온 것도 아니잖소.”
백서희도 십분 동감이었다.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수장들이 모이고 있는데 뭔 꼴값이란 말인가?
‘이런 사람들이 최고 간부들이라니, 일월신교 괜찮은 거 맞아?’
새삼 정파를 등지고 일월신교로 넘어가는 결정이 맞는 건가 진심으로 회의가 든다.
그때 제갈의현이 고개를 돌렸다.
“백 여협.”
나직한 부름이었지만 힘이 담겼다.
백서희가 돌아보자 제갈의현이 씁쓸한 기색을 흘리며 두 성좌를 가리켰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면, 백 여협께선 저들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소만.”
점창파 장문인의 사매라는 신분을 고려한 경대.
아직은 여지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라는 뜻이겠지.
“죄송합니다, 총군사님.”
“...마음을 굳히신 것이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제갈의현이 장탄식을 쏟아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가 눈매를 굳혔다.
“하면, 맹규에 의거해서 이제부터 백 여협을 공격하겠소. 다소 손속이 과해도 해량해주시오.”
“제가 드릴 말씀이군요.”
자성검을 반쯤 뽑은 순간 무지막지한 의념의 파동이 제갈의현과 주변인들을 사로잡았다.
“저희를 보내주세요. 그 은혜는 훗날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불가능한 걸 아시잖소?”
설령 힘에서 밀리더라도 칼 한번 맞대보지 않고 고이 보내준다면 무림맹의 위상은 땅에 떨어진다.
“광명마교의 잔당들을 탈출시켰다는 걸 알고 있소. 그쪽으로도 고수들이 갔소. 개방주께서 추격대를 이끌고 계시니 머지않아 따라잡을 터.”
백도 정파 최고의 경공술을 지닌 개방주라면 추격을 뿌리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
완안극이 나선다면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추격대의 다른 고수들을 막지 못한다면 잡힐 것이다.
그때 금성좌가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완 노사라는 애늙은이랑 태화문주 말고 다른 사람도 붙었거든. 솔직히 그런 거물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거물?”
“천하팔존 신유.”
이번엔 제갈의현이 멈칫했다.
신유가 살아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가 강엽을 도우러 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신유 노야가 대체 왜 당신들을...?”
“뭐, 갚을 빚이 있다고 했던가? 그 인간이 왔을 땐 깜짝 놀랐지.”
물론 백서희는 알고 있었다. 사전에 강엽으로부터 어떤 인선을 동원했는지 들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당신들을 보내줄 순 없소이다.”
“포기하게, 검후.”
뒤를 이어 등장한 여인.
넓은 소매에 연분홍 꽃문양을 새긴 아리따운 여인이 매화향을 풍기며 전각의 위층에 내려섰다.
“...옥청선자님.”
“일대에 천라지망이 펼쳐졌소.”
허허로운 기도를 두른 무당의 장문인 역시 한쪽 전각을 차지하며 일행을 안타깝게 내려봤다.
“검후, 자네가 강한 건 알고 있네. 칠성좌도 있으니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도 막을 수 없겠지. 하나 우린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들을 막아야 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우리가 죽지 않으면 누가 죽겠는가.”
“....”
백서희가 울컥해서 입을 다무는 사이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일대를 포위했다.
금성좌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힘으로 돌파해야겠는걸?”
수성좌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서희는 낭패감에 사로잡힌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몰려오는 날카로운 기세의 검객들.
사일검수들을 대동한 종현이, 도호를 읊으며 앞으로 나섰다.
“장문 사형....”
“꼭 가야겠느냐?”
“...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요.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그런가.”
눈을 감으며 숨을 고른 종현이, 돌연 우렁차게 소리쳤다.
“제자들은 검을 들어라!”
채채채채챙!
날카로운 기세를 발하는 사일검수들.
하지만 그들의 검은 사문을 배신한 여인과 마교의 종자들이 아닌, 아군을 향하고 있었다.
“장문인?”
“미안하오, 총군사. 저 아이가 선대 장문인께서 건네신 보은패를 들고 협박하지 뭐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자 제갈의현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백서희를 돌아보았다.
“선대 장문의 보은패라니....”
“총군사도 알다시피 혈교와 맹월림이 궐기했을 때 더 아이는 본산을 도왔소. 선대 장문인께선 은혜를 갚기 위해 보은패를 선물하셨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들을 보내면 우리 스스로 팔을 자르겠소.”
상상도 못한 선언에 백서희가 놀라서 외쳤다.
“장문 사형!”
“무림의 은원이란 그런 것이다. 설령 목숨을 내주더라도 반드시 지켜야지. 하나 적에게 이로운 일을 했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검객이 팔을 잃는다면 인생이 끝난 것과 진배없다.
하나 종현은 물론 점창의 제자들 중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반면 제갈의현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한탄했다.
“본맹은 오늘 많은 걸 잃었군요.”
졸지에 정파끼리 내전을 벌여야 할 판.
모두가 싸우기 싫어하면서도,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야속한 운명이 놓여 있었다.
그에 제갈의현이 할 수 없이 손을 들어올릴 때.
콰아아앙!
시커먼 옷자락을 흩날리는 장신의 청년이, 묵직한 소성과 함께 장내에 떨어졌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한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질질 끌고 온 행색.
“귀영!”
“매, 맹주...!”
사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꺾이고, 부러진 늑골이 살갗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단전 역시 산산조각 박살나서 폐인으로 전락한 몰골.
하나 무인 노릇을 못할 만큼 망가졌으면서도 명줄은 붙어 있었다.
제갈의현이 급히 물었다.
“적 맹주를 죽일 생각인가?”
“그럴 생각이라면 벌써 죽였겠지요.”
“그럼?”
“살릴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죽이지 않을 뿐. 그를 죽일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정녕 공적이 되려는 겐가?”
“각오했습니다. 그러니....”
포위한 무인들을 쭉 둘러본 강엽이 무심하게 경고했다.
“쫓아오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