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03화 (403/450)

80화. 태풍 (3)

무림맹을 뒤집은 폭탄 선언.

강엽이 일월신마공을 익혔다면서 낙인을 확인해보자는 적미성의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맹주의 파격에 기함한 사람들도 이젠 설마 하는 눈빛을 보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이 구양 모도 할 말이 있소! 과거 귀영이 사특한 사술을 부렸다는 증인들을 확보했소이다!”

“언가의 주인 언중해가 삼가 무림 동도들께 고하오! 귀영은 본디 평범한 유생으로, 이 년 전에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소! 그 사이 이토록 강해진 게 혹시 마공을 익혀서가 아닌지 우려되오!”

구양세가와 진주언가, 두 가문의 주인이 적미성의 주장을 거들면서 강엽의 행적을 성토한다.

계속해서 불리한 증언들이 쏟아지자 대문파의 수장들도 섣불리 비호하지 못했다.

강엽과 인연이 있는 무당과 화산, 점창의 장문인들이 그의 공적을 나열하며 반박할 뿐.

[어떻게 할 텐가?]

귓가에 꽂히는 당천경의 전음.

올 게 왔다는 듯이 담담한 신색이었지만, 그 목소리엔 초조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무고를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맹주의 요구대로 장갑을 벗는 거지. 그러면...!]

[광명마교주를 죽인 이후에 말입니다.]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당천경은 입을 다물고 강엽의 말을 경청했다.

[전 서희와 함께 교주의 방으로 갔습니다.]

교주가 죽는 바람에 석탑의 권능을 넘겨받지 못하지 않았던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교주의 방을 찾아서 샅샅이 뒤졌다.

[제가 찾는 건 없더군요. 그땐 이미 탈탈 털린 뒤였습니다.]

당시엔 패배를 예감한 광명마교의 잔당이 교주의 유산을 챙겨 도망친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이제 보니 그게 저 여자의 짓이었던 모양입니다.]

백서희에 버금가는 은신술의 달인.

모두가 무림의 사활이 걸린 싸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암야마독은 교주의 방을 뒤적였던 것이다.

[하면 혐의를 인정하겠단 건가? 자네가 일월마교의 교주라고?]

[.......]

만약 무고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의심은 밑도 끝도 없이 깊어질 터.

그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겠지.

[이보게. 만약 그리 되면 본문이라고 해도....]

만약 강엽이 사마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당문은 나설 수 없다. 오히려 강엽과의 관계를 부정해야 할 판.

한데 무슨 수로 이 위기를 빠져나가겠단 말인가.

그때 저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퍼퍼퍼퍼퍼퍼펑!

맹주의 취임을 기념하는 폭죽이라기엔 거리가 맞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무림맹의 간부들이 하나같이 경악하고 있었다.

“설마 적이 쳐들어왔다고?”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온 시선이 취임식에 쏠린 지금 다른 구역들의 방비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게 사실.

하나 맹방들이 한 자리에 모인 지금 싸움을 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광명마교주쯤 되는,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집는 신위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대문파의 수장들마저 말문이 막힌 기색으로 강엽과 적미성을 번갈아보는 와중, 푸른 무복을 입은 맹원이 날랜 경공술로 뛰쳐들어왔다.

연단에 선 적미성을 향해 부복하며 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상양대(上陽隊)의 부대주 조하상이 삼가 맹주께 고합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뇌옥을 침범했습니다!”

“죄수들은 어찌 되었느냐?”

대답 여하에 따라선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

계파의 문주들과 멸마전의 아라한들마저 덩달아 긴장해서 부대주를 지긋이 노려봤다.

당황한 부대주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본대와 창룡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적들이 뇌옥을 제압하고 죄수들을 빼내고 있었습니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게야!?”

발을 쿵 구르면서 타박하는 자.

좀 전까지 강엽을 성토하던 구양세가의 가주가 눈에서 불을 뿜어내자 부대주가 눈썹을 씰룩였다.

자격 없는 자가 함부로 보고체계에 끼어든다는 것에 적잖이 불쾌감을 느끼는 낯빛.

“그 얼굴은 뭐냐? 일개 부대주 주제에 감히...!”

“구양가주.”

무표정한 얼굴로 적미성이 말했다.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치게.”

“매, 맹주님!?”

설마 면전에서 이토록 험한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던 걸까.

그러나 적미성은 자신이 말한 바를 지켰다.

쾅!

턱밑에서 격공을 맞은 구양가주가 피떡이 되어 쓰러졌던 것.

과격한 처벌에 모두가 놀라는데 적미성의 목소리가 담담히 이어졌다.

“이제부터 본 맹주가 말하는 도중 끼어드는 자는 하극상에 준하는 죄로 다스리겠다.”

심상지경의 고수가 발하는 패도적인 기세.

무형의 기세가 동심원의 형상으로 퍼지면서 장내를 찍어누르자 명숙들은 삽시간에 해쓱해졌다.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든 그들을 경멸 어린 눈으로 둘러본 그가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귀영, 무슨 짓을 한 거냐?]

군중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우는 전성.

마치 이 소란의 배후에 강엽이 있음을 확신하는 말투에 군중의 시선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러나 다리를 꼰 자세로 앉은 강엽은 피식 웃을 뿐.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너밖에 없으니까.]

“음?”

[넌 일사도와 팔사도를 살려뒀지. 팔사도는 빙궁 때문이라고 넘어가도 일사도를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한데 지금 그 연놈들이 갇힌 뇌옥이 공격받았군. 그들이 처형당하기 전에 구하려는 것 아니냐?]

다소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지언정 진실을 짚어내는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

심상지경의 고수답게 비대하게 발달한 상단전의 영감이 신통력의 영역으로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중요한 건 아니지.’

설사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 해도 어떻게든 강엽을 엮어서 보내버리겠다는 심산이리라.

여기까지 온 이상 화해의 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맹주, 아까부터 억지가 심하지 않소!”

“그렇습니다. 누가 배후에 있는지는 침입자들을 제압한 뒤에 알아봐야 할 일. 맹주라고 모든 게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고 독선입니다!”

대문파의 수장들조차 절차를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적미성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적미성은 듣는 시늉도 안 했다.

목을 돌려 섬뜩한 뼛소리를 내고는 강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인다.

[네놈은 전에도 흑룡교의 잔당들을 살려뒀지. 난 같은 전철을 반복하지 않는다. 광명마교의 사도들을 끌고 와서 이 자리에서 참수해주마.]

“저 개새끼가...!”

보다못한 백서희가 검을 빼들려는 찰나, 강엽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날 부르고 있잖냐. 마땅히 내가 가야지.”

“괜찮겠어?”

적미성 역시 정치적 생명을 걸었으니 어떻게든 강엽이 일월신마공을 익혔음을 증명하고 그를 무림 공적으로 선포하려고 할 터.

강엽이 대답 대신 쓰디쓴 웃음만 흘리자 백서희는 식겁했다.

“너 설마?”

“여기까지인 것 같다.”

“잠깐, 그럴 것까진 없잖아!”

“방법이 없어.”

이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자리에서 적미성을 꺾어도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안 그래도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수장들은 강엽이 사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는데, 억지로 덮어봤자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지인들과 차례차례 눈을 마주치며, 눈인사로 작별을 대신했다.

“상공, 준비하고 있을게요.”

“미안하오.”

“뭘요. 전 상공 때문에 무림맹과 손을 잡았어요. 저들이 상공을 쳐내고자 한다면, 저도 무림맹을 떠나서 지아비를 따라야겠지요.”

애써 쾌활한 미소를 지은 조영옥이 백서희와 당묘정을 돌아봤다.

“하지만 동생들은....”

“난 무조건 따라갈 거예요.”

백서희의 즉답에 조영옥이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걸린 종현의 모습에 백서희가 움찔했다.

“그럼 인사드리고 와. 어쩌면... 영영 못 뵐 수도 있으니까.”

“그럴게요.”

녹아내리듯 사라진 백서희가 군중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장문 사형에게 향했다.

“...엽랑.”

당묘정 역시 분위기를 읽었는지 안색을 흐렸다.

“면목이 없소. 축복받은 혼례식을 해주고 싶었는데....”

“절 두고 가진 않으실 거죠?”

“당문에 남는 게 안전할 수도 있소.”

“아뇨. 당문에 남으면 평생 엽랑을 못 만날 거예요. 당문은 저와 엽랑의 관계를 부정할 테니까요. 어쩌면 이 아이를 부정할 수도 있어요. 저 또한... 정략혼을 이유로 잘 모르는 사람과 혼인할 수도 있고요.”

“당문주님이 계신데 그러겠소?”

“때론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전 이 아이가 양지에서 당당히 살기를 바라요.”

“....”

“아버지와 가문엔 송구하지만, 전 이미 출가외인이에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당신을 따라가겠다.

굳건한 눈빛에 강엽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문엔 피해가 없도록 하겠소.”

그게 어찌 말로만 되겠냐만 당묘정은 믿는다는 듯 따뜻한 미소로 강엽을 배웅했다.

“너희들도 미안하다. 이게 마지막으로....”

하후진과 청수, 함께 싸우면서 정든 친우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였다.

하후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랄 말고 나도 데려가라.”

“...진심이냐?”

“내가 누구 남편인지 잊었냐? 네가 이렇게 가버리면 숙정방과 정매는 무사하겠냐고.”

강엽이 사라지면 그 화살은 숙정방에게 쏟아질 테니 단목정도 피해를 볼 것이다.

“뭐, 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만 우리 정매가 고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몇 달 뒤면 아이가 태어날 텐데 건강 챙겨야지.”

“염왕께서 걱정하실 텐데.”

“상관없다고 하실걸?”

“...?”

“언젠가 네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 숙정방에 불똥이 튈 것 같으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라더라. 내 여자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면서 말이야.”

“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염왕은 앞날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제자에게 일러두었던 것이다.

“뭐, 너 따라가면 욕 좀 먹겠지만 사부님은 별로 신경 안 쓰실 거다. 무림맹이 사부님을 상대로 뭘 어쩔 수 있겠냐?”

“딴엔 맞는 말이군.”

“그러니 작별인사는 이 말코랑 하라고.”

하후진의 손바닥에 등짝을 맞은 청수가 아픈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흘겼다.

“거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팠냐? 나도 아프다. 마음이 아파.”

“그건 또 뭔 개소... 어휴, 말을 말아야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흘린 청수는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부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강 도우가 사문과 관련해서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고요.”

“충격받진 않았나?”

“당연히 충격받았지요. 친구라고 믿은 사람이 마교주였다니! 근데 강 도우 정말 일월마교주입니까?”

“내가 교주였다면 여기 있겠나?”

“하지만 일월마교와 관련이 있는 건 맞지요?”

“교주의 독문무공을 익혔지.”

“허어. 사조님께선 일월마교의 교주 무맥은 끊겼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내홍을 겪은 것 아닙니까?”

“우연찮게 기연을 얻었다.”

“뭔가 내막이 있나 보군요. 하지만 묻지 않겠습니다. 전 강 도우를 믿거든요.”

“....”

“제가 본 당신은 선인은 아니었지만, 악인도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적당히 이타적인, 평범한 사람이었죠. 제가 본 마인들과는 십억 리 정도 차이가 있었어요.”

“...그거 욕이냐, 칭찬이냐?”

하후진이 투덜거리자 강엽은 피식 웃었다.

“헤어지는데 욕은 아니겠지.”

“전 우리가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천기를 엿보는 재주도 없으면서 앞날을 내다본 것처럼 미소 짓는 청수의 모습.

강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 다시 만날 거다.”

“그땐 적인가요?”

“네가 날 적대하지 않는다면, 계속 친구로 남겠지. 너도, 하후진도 모두 내 친구다.”

그때였다.

“강 무사.”

갑자기 세 사람 사이에 거구의 사내가 뚝 떨어졌다.

옷과 주먹에 핏물이 가득한 전강의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뭐여? 어디 싸우다 왔수?”

“멸마전의 사형제들이... 장 분타주를 납치했소.”

고통과 번민으로 일그러진 전강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강 무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으면 장 분타주를 죽일 거라 했소. 강 무사와 오랜 인연을 맺었으니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근데 거절하셨군요.”

그렇지 않다면 드잡이질을 했을 리가 만무했다.

“난 장 분타주의 가문을 부순 죄인이오. 그 업보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남은 생은 장 분타주를 지키는 데 쓰겠다고 맹세했소.”

“....”

“하나 친구를 배신할 순 없소. 그게 장 분타주의 친구라면 더더욱.”

“물론 장경은 내 친구입니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고요.”

진정한 친구라면 위기를 모른 척하지 않는 법.

강엽의 눈짓을 받은 하후진이 히죽 웃으면서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같이 가겠수다.”

“저도 가지요. 저들이 무고한 이를 잡았다면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좌시할 수 없습니다.”

청수까지 나서자 전강은 거절하지 못했다.

삼화취정의 고수가 두 명이나 합세하면 천군만마처럼 든든할 터.

그때 강엽이 물었다.

“혹시 장경의 피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사형제 중 한 명이 도망쳤소. 내 주먹에 그의 피가 묻었소.”

전강 역시 강엽의 말뜻을 깨달은 눈치.

강엽이 엄지를 깨물어 피를 냈다.

“놈이 도망친 곳에 장경이 있을 겁니다. 양피지의 표식을 따라가세요.”

“고맙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이 있기 마련.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테니, 일행은 훗날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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