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90화 (390/450)

78화. 화신 (3)

백 년간 하나의 비원을 추구한 자.

생로병사의 이치를 파고들어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미친 포부를 품은 비인외도의 마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장포를 걸친 뼈가면의 괴인이 담담히 적들을 굽어보았다.

“교주도 참 얄궂군. 하필이면 나로 하여금 너희를 상대하게 하다니.”

쿠와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친 경파가 몰려왔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격공에 쐐기를 박아넣어 무위로 돌린 마의가 손을 뻗어올린 순간.

온몸을 날린 백서희의 검격이 호신강기를 두른 손바닥과 부딪쳤다.

“전사경을 실은 후예사일인가. 제법이지만....”

공력 경파가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빠직거리는 소리가 나며 불똥과 충격파가 튄다.

마의가 눈구멍 너머로 노란 안광을 빛냈다.

“뚫기엔 역부족이군.”

등 뒤에서 돋아난 여덟 개의 거미다리.

지난날 강엽에게 잘렸던 것과 달리 온전한 형상을 갖춘 거미다리의 끝에 시커먼 기운이 응집되었다.

이윽고 여덟 줄기의 흑선이 백서희를 관통하고, 그 너머에 있던 석벽까지 흔든다.

그러나 핏물을 흘리는 대신 흐릿해지는 인영.

이형환위로 위치를 바꾼 백서희의 검이 수십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전신 요혈을 두들겼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흘러나오는 의념의 파동.

“뻔한 수작이군.”

일단 분검으로 물러나게 한 다음 심극이라.

심상지경까지 올라갔던 마의가 보기엔 한없이 어설픈 포석이었지만,

“그래서 내가 돕잖나?”

적절하게 끼어든 약선이 연격을 퍼부어 마의로 하여금 백서희를 방해할 수 없도록 했다.

그 사이 완성된 심극의 검광이 짓쳐들어왔고,

콰아아아아아!

먼젓번과 달리 호신강기를 뚫고, 뒤이은 거미다리까지 끊어내며 그 몸에 자상을 남겼다.

‘얕았어. 하지만...!’

대부분의 힘을 호신강기를 깨는 데 할애하느라 막상 몸통에 이르렀을 땐 위력이 죽어 있었다.

그럼에도 근육을 파고들어 경혈에 닿는 데 성공, 검에 실린 암경을 흘려보냈다.

투아아앙!

그리고 마의가 반격을 취하기도 전에 호쾌한 궤적을 그린 족격이 그를 날려버렸다.

원앙처럼 한 발을 들어올린 약선이 벽에 부딪친 마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몸을 갈아탔다고 하더니 확실히 약해졌군. 이전이었다면 이런 공격은 씨알도 안 먹혔겠지.”

두어 달 만에 놀랍도록 강해지긴 했지만 그뿐, 정작 심검은 꺼내지도 않는다.

“.......”

일어선 마의가 말없이 뼈가면을 움켜쥐었다.

경파에 휘말리면서 금이 간 가면을 부서뜨리자 파릇파릇한 청년이 사특한 기운을 줄줄이 흘렸다.

“확실히... 난 약해졌지.”

팔성자를 상대로 무력 시위를 벌이긴 했으나, 심상지경에 달했던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

그럼에도 그 몸에 깃든 사기는 차츰차츰 주변의 초목을 죽이면서 전권을 넓혀가고 있었다.

“역대 흑룡교주들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너희와 싸우지도 못했을 거다.”

“흑룡교주라고?”

백서희가 흠칫했다. 본인의 핏줄을 싫어했지만, 그들이 선조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설마 그들의 무덤에서....”

“점창파의 계집, 네가 짐작한 대로다. 역대 흑룡교주들답게 지닌 사기도 대단하더군.”

대부분은 흩어지며 자연지기의 일부가 되었지만, 일부는 시신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었다.

그 기운을 흡수한 것으로 전성기에 버금가는 공력을 손에 넣은 것.

그런 마의의 말에 약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사람들을 덮친 괴물들은...!”

“봤나 보군. 그래, 역대 흑룡교주들의 무덤을 지켰던 강시들이다.”

항주의 주민들을 덮쳤던 정체불명의 강시들.

강엽이 흑룡교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서 뭔가 싶었는데 마의가 발견했던 것이다.

뼈가면을 죄다 뜯어내서 맨얼굴을 드러낸 마의가 두 여인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이대로면 내가 패하겠지.”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약선은 그렇다 쳐도, 심극의 경지에 오른 백서희는 만만치 않았다.

“두 달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새 많이 발전했어.”

호광에서 강엽을 피신시켜려다 잡히지 않았던가.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인정한다. 넌 꽤나 위협적이다. 그 심극을 완성시켰다면 아까 한 수로 목숨을 잃었겠지.”

그러나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백서희가 심극을 완성하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일 뿐,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애석하지만 여기서 그 가능성을 짓밟아야겠군. 시간 끌기는 여기서 끝이다.”

한쪽 손을 들어올리는 마의의 모습.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두 여인이 달려들었으나, 마의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화아아아아아악...!

검푸른 불길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지면을 내달리며 순식간에 두 여인을 가둬버린 흑염.

수풀이나 나무 등 불쏘시개가 많은데도 그것들은 태우지 않는다.

불현듯 불길이 그린 형상을 깨달은 백서희가 날선 목소리로 외쳤다.

“태극...!”

정확히는 반전된 역태극이었다.

응당 뜨거워야 하는데도 얼음처럼 싸늘하고, 매캐한 연기를 피워올리지도 않는다.

그때 약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설마... 대법인가? 그때 모용세가에서 못했던 대법을, 지금 하겠다고?”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비원.

의술로는 불가능한 목표에 닿기 위해 심상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마의였다.

진정으로 생사를 초월하는 심상절예를 손에 넣기 위해 인신공양의 대법까지 하지 않았던가.

강엽으로 인해 실패했음에도, 새로운 육신을 얻어 다시 한번 비원에 도전하는 집념.

“교주는 약속을 지켰지.”

여상히 중얼거린 그 순간이었다.

-......!

인간의 청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의념의 메아리.

눈뜨기 힘든 어마어마한 광량에 두 여인은 본능적으로 그게 광명마교주의 의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엽...!’

걱정이 들었지만 지금은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

두 여인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호신강기를 최대한 전개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공격은 없었다.

마의 역시 불길을 제어하느라 사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용맥의 자연지기와 몽상정토의 혼백들.”

광명마교주가 강해도 그 혼자서 천하의 자연지기와 몽상정토의 혼백들을 독점하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광명마교주는 흘러넘치는 힘 일부를 사도들에게 나눠준 바.

그것은 지난날 호광성을 뒤집으며 아등바등 모은 힘에 필적했다.

“좋군. 이 정도라면...!”

만약 모용세가에서 비원을 이뤘다면 이 힘을 이런 식으로 낭비할 필요도 없었겠지.

역태극의 형상으로 불어닥치는 검푸른 옥염.

흑룡교주들의 시신에서 뽑아낸 사기와 용맥의 자연지기, 몽상정토의 혼백들이 섞이기 시작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우워어어어어...!

혼백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억지로 심상을 비틀기 위해 그들의 힘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과정에서 혼백이 통째로 뭉개진 것.

그렇게 뭉개진 혼백들 사이로 자신의 의념을 투영한 마의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새로운 몸을 얻어서 좋은 것도 있지. 기존의 심상이 흐려진 탓에 새로운 심상을 새겨넣기 쉬워졌거든.”

투아앙!

등 뒤에서의 기습.

갑작스러운 섬광으로 인해 안력이 마비된 백서희가 두 눈을 감으며 다시 한번 심극을 날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약선이 권강을 뻗으며 마의가 피할 방위를 미리 차단해두고 있었다.

마의를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간다는 것을 직감한 것.

“소용없다. 이제 와서 날 막아봤자....”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검푸른 불길을 휘돌리며 두 여인의 공세를 튕겨낸다.

피를 토하면서 나가떨어진 여인들의 모습.

마의는 그들을 무시하고, 어느덧 용오름을 그리고 있는 검은 불길을 향해 두 팔을 가득 벌렸다.

사람의 생사를 관장하는 광오한 심상.

본래라면 존재할 수 없는 심상을 억지로 빚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아아아아아아!

검게 불타는 용오름 위로 수많은 혼백들이 꾸물거리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마의는 반대로 환희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와라! 고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심상을 빚자!”

그 말과 함께 용오름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혼백들이 마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마의를 새로운 숙주로 삼으려는 듯 끝도 없이 스며들면서 힘이 충만해진다.

하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뭐냐?”

용오름의 표면을 타고 절규했던 혼백들. 석탑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몽상정토에 갇혔던 그들과는 별개로,

용오름 자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꿈쩍도 안 했던 것이다.

역대 흑룡교주들의 사기와 용맥의 자연지기가 합쳐진 기운.

본래 계획대로 심상을 비틀기 위해선 혼백들만 아니라 저 힘까지 통째로 흡수해야 한다.

대법이 설계부터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용오름이 가만 있을 리가....

“......!”

마의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용오름이 지면을 타고 백서희에게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웩 피를 토하며 머리를 쳐든 백서희 또한 눈앞의 일에 식겁했다.

“왜 나한테 와? 아, 안 돼! 오지 마!”

피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좀 전에 입은 내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것이다.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듯이 기세를 불태우는 용오름의 전진에 백서희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린 약선이 쿨럭거리면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도...!”

아마 도망치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백서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도망치는 대신 검을 들어올려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었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힌다.

겨울 호수처럼 고요한 명경지수.

‘좋아. 해보는 거야.’

기혈이 들끓어 심극은 못 쓴다.

발을 일보 내딛는 것과 동시에 하체를 비틀고, 자색 검날을 사선으로 내리긋는 검격.

“.......”

당연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의 역시 긴장한 기색으로 보고 있다가 실소를 흘렸다.

“역대 흑룡교주들의 사기와 용맥의 자연지기가 합쳐진 기운이다. 그깟 칼질로 벨 수 있을 리가....”

그렇게 비웃은 것도 잠시였다.

돌연 용오름 한복판에 비스듬히 실선이 그어졌고, 궤적을 따라 윗부분이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놀라서 눈만 홉뜬 마의가 뒤늦게 이상을 깨닫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용오름이 풀리면서 그 안에 있던 기운 중 일부가 백서희의 체내로 흘러들어갔고....

“아.”

끓었던 기혈이 가라앉고, 내상 역시 아물면서 활력이 샘솟았다.

‘그렇구나. 이건....’

역대 흑룡교주들의 사기.

비록 오래전에 죽었다 해도 절대고수의 기운엔 나름의 의념이 묻어나는 법이다.

그 의념이 백서희의 몸에 흐르는 용혈에 이끌렸고, 그렇기에 마의의 대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마의가 취한 게 역대 흑룡교주들의 사기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공교로운 우연이,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그가 애써 마련한 기회를 통째로 앗아갔다.

마의의 의념이 깃든 사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안에 깃든 용혈의 의념이 자연지기를 끌고 온 것.

상단전이 폭발하는 감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온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역대 흑룡교주들의 의념이 용혈의 영성을 일깨운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백회혈이 활짝 열리면서 그녀의 감각이 한 차원 위로 도약했다.

‘그렇구나. 내 심극이 나아갈 방향은....’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우주.

만개한 꽃밭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별하늘이 망막을 가득 채웠는데,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이 본래의 자리를 이탈하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활짝 열린 상단전의 영성이 별을 받아들인 순간.

‘아.’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누구는 너무 멀어서 어렴풋이 보였고, 누구는 조금 떨어진 채 앞을 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문득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서둘러 쫓아가려 할 때였다.

-어딜 가느냐?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챘다. 뒤를 돌아보니 표독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잡고 있는 마의가 있었다.

-저 앞으로 가려고? 아니, 넌 못 간다.

그 심상의 힘은 내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더욱 강하게 움켜쥐는 힘에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백서희는 억지로 고통을 삼켰다.

“...켜.”

-뭐라고?

“비키라고, 이 돌팔이 새끼야!”

퍼억!

볼때기를 맞은 마의가 억 하고 쓰러졌다. 그녀는 마의의 안면을 발로 후려친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뒷모습.

앞서가는 이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띌 만큼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같이 가.”

애원했지만 닿지 않는다.

무거운 한 걸음을 떼며 힘겹게 나아갔다.

일보를 내딛는 것조차 식은땀이 비오듯이 흐를 만큼 힘겨웠으나, 꿋꿋이 나아갔다.

-안 돼! 그건 내 힘이다! 생로병사의 극한에 이를 내 심상의 힘이...!

뒤에서 간절하게 소리치는 마의도 땅을 기으며 아득바득 쫓아왔지만,

백서희는 그를 뿌리치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저 멀리 보이는 강엽의 등을 향해서.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엽! 강엽..!”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과 코에서, 칠공에서 피가 쏟아져도, 그저 이를 악물고 힘겨운 걸음을 이어갈 뿐.

그러던 어느 순간.

‘아.’

강엽의 걸음이 잠시 느슨해지면서, 힘겨워하며 따라온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설핏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엽!”

어디서 힘이 솟구친 걸까.

온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진 순간 그녀는 나비처럼 날아서 강엽의 품에 안겼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저 자신은 여기서 멈추지 못한다고 말했다.

“알아.”

그들이 겹친 것은 우연이었다.

이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겠지.

“먼저 가. 금방 쫓아갈게.”

잠시 놀란 듯 바라보던 강엽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맞댔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래도....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쫓아와라.

“...응.”

몸을 돌리는 강엽을 따라 흑포 자락이 흘러내렸다.

저 앞에서 길을 막고 있는 자.

광명마교주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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