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91화 (391/450)
  • 78화. 화신 (4)

    입도공월의 오의를 초식에 적용한 연계식.

    공간을 왜곡하여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광명마교주에 맞서, 강엽은 공간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본디 입도공월은 용맥의 흐름 위에서 공간을 접는 축지법의 술식.

    하지만 간합을 뛰어넘는 정도라면, 굳이 용맥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파앗!

    순백의 장삼에서 선혈이 튄다.

    심검이 호신강기를 뚫고 상처를 입힌 것이다.

    상처 자체는 얕았지만 그 모두가 필살의 의념이 담긴 심흔이었기에 얕볼 수 없었다.

    ‘광명마교주의 호신강기는 막는 데 특화되지 않았어. 대신 상대의 투로를 근본부터 비틀어버린다.’

    얼핏 보면 단순히 거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미로처럼 복잡한 묘리가 숨겨져 있다.

    단순히 단단한 호신강기보다 훨씬 뚫기 어렵거니와, 왜곡된 정도를 감각으로 헤아려야 한다.

    찰나에 수백 합을 주고받는 절대고수의 공방에서 일일이 머리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강엽은 외려 단순하게, 공간을 뛰어넘어 의표를 찌르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투학!

    이번엔 옆구리에서 핏물이 튀었다.

    공방에서 이득을 거두었음에도 강엽의 안색은 펴질 줄 몰랐다.

    입도공월의 술로 호신강기를 무력화시켰는데도 광명마교주는 최소한의 상처만 허용했다.

    강엽과 염왕, 두 명의 절대고수가 합공한다는 걸 감안하면 실로 경이로운 공방이었다.

    게다가 간간이 반격을 날리기까지.

    화악!

    염왕의 심도를 피한 광명마교주가 빛살로 변하고, 되려 뒤를 잡으며 검지를 뻗는다.

    염왕 역시 빛살처럼 가속하면서 전권을 빠져나왔지만 간발의 차였다.

    “심검을 봉인당했는데도....”

    “심검만 잃었을 뿐 경지가 격하된 건 아니지. 심상지경이 곧 심검은 아니지 않나?”

    심검은 심상지경의 고수가 다루는 힘 중의 일부.

    심검에서 파생되는 심상절예는 쓸 수 없지만, 그 외의 기예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광명마교주가 장심을 들어올리자 황금의 불꽃이 양팔을 감싸면서 염왕의 창염을 밀어냈다.

    “가루라신염(伽樓羅神炎)이라 한다네.”

    평범한 열양지기가 아니다. 가루라의 영성이 담긴 태양의 불꽃.

    “무간의 옥염과 가루라의 신염. 어느 쪽이 더 강할지 겨루어보는 것도 재밌겠군.”

    “....”

    전신을 창룡갑으로 감싼 염왕이 푸른 빛살로 변하면서 광명마교주의 위쪽에서 출현했다.

    강엽 역시 핏빛 안개로 변하며 광명마교주의 배후를 노렸다.

    심검과 심도가 교차하는 찰나.

    광명마교주의 눈이 번쩍이면서 양팔을 감싼 황금의 신염이 심검과 심도를 비껴낸다.

    이화접목의 수로 타점을 흩트리고, 엇박자로 찌른 팔꿈치가 강엽의 흉부를 타격.

    강엽이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황금의 신염은 엉뚱한 궤적으로 꺾이며 배후를 노렸다.

    그렇게 강엽의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채찍처럼 뻗은 족격을 염왕의 옆구리로 날린다.

    “재주가 많군, 광명마교주.”

    심도를 세워 족격을 막은 염왕은 반발력을 이용하여 몸을 튕겼다.

    직후 광명마교주의 빈틈을 노렸지만....

    화아아악!

    광명마교주가 빛살로 변하는 바람에 고작 허벅지를 베는 데 그쳤다.

    그 직후였다.

    -일월합신.

    극양과 극음, 양쪽의 기운을 부딪치면서 일어난 충격파가 세 사람이 있는 대기를 찢어발겼다.

    사방 수십 장을 아우르는 섬광이 주변의 고루거각들을 한 줌의 먼지로 만들어버린다.

    “일월신교주의 독문무공인가?”

    일월합신을 알아본 광명마교주가 감탄할 때, 창룡갑을 두른 염왕이 먼지와 수증기를 뚫고 나타났다.

    -무간도(無間刀).

    염왕팔도의 마지막 오의.

    틈이 없다는 이름 그대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심도의 그물이 광명마교주를 가두었다.

    그야말로 도산(刀山)이라고 해야 할 절초.

    그 전부가 심도였기에 가히 심상절예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광명마교주를 압박했다.

    ‘저만하면 빛살로 변해도 뚫지 못하겠군.’

    빛살로 변해 공간을 초월하는 기예는 보신경의 극한이라 불릴 만했지만, 모든 공격을 비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든 것엔 상성과 천적이 있기 마련.

    광명마교주 역시 어설프게 탈출하는 대신 호신강기를 극대화하여 절초에 맞섰다.

    팟! 푸확!

    허벅지가 베이고 등에서 핏물이 튄다.

    상처가 얕았음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수십 곳을 베였기 때문에 피투성이로 전락한 몰골.

    순백의 장삼 역시 원단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지금이다!’

    염왕이 열어준 조그마한 틈새.

    광명마교주 역시 일부러 드러낸 빈틈을 알아차리고 눈을 빛냈지만, 그전에 강엽이 먼저 나섰다.

    한계까지 꾹꾹 눌러담은 공력을, 심검에 담아 폭발하듯 내쏜다.

    -무광암.

    한 줌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어둠.

    횡으로 내쏜 궤적이 절묘하게 틈새를 찌르며, 광명마교주의 심장에 이르렀다.

    “이런...!”

    황금의 신염이 어둠에 반발했지만, 무광암은 되려 신염마저 집어삼키며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염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외통수로군.”

    심상의 기운을 두른 가루라신염은 심검과 맞설 만큼 강력하나, 무광암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불권의 심마처럼 극한으로 응축한 금강불괴였다면 버틸 재간이 있었겠지.

    그러나 빛을 잡아먹는 무광암은 가루라신염의 천적.

    태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담겨 있었기에 가루라신염을 끝도 없이 집어삼켰다.

    쿠구구구구궁......!

    천하를 논하는 절대고수들의 길항.

    아득한 상공에서 싸우고 있는데도, 기파의 충돌만으로 전각들이 무너지고 대지가 쩍쩍 갈라진다.

    미리 사람들을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국지적인 재난에 휘말려 뼈도 추리지 못했을 터.

    저 멀리 떨어진 전장을 곁눈질한 염왕은 심도에 최대한의 공력을 담아 심상절예를 펼쳤다.

    -일도무겁살.

    놈이 심검을 되찾기 전에 마무리를 짓는다.

    무광암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지금이야말로 이 지난한 싸움을 끝낼 절호의 기회.

    그 와중에도 호신강기를 펼치는 광명마교주의 역량은 대단했으나, 주도권은 이쪽으로 넘어왔다.

    -......!

    무광암과 일도무겁살이 충돌하며 자아낸 만상의 사멸이 세 사람의 전장을 뒤덮었다.

    시야가 하얗게 타오르고, 귀가 먹먹해지는 충격.

    [간발의 차였군.]

    그 안에서 광명마교주의 의념이 일었다.

    [이번엔 죽는 줄 알았다. 불권에게 한 방 먹었던 때만큼이나 심장이 철렁했어.]

    직후 안에서 일어난 눈부신 섬광이 심상절예의 격돌로 인한 충격조차 밀어내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설마...!’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두 사람의 안색이 납처럼 굳어지고,

    [구사도가 애썼군. 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본좌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심검을 되찾은 광명마교주가, 두 손을 높이 뻗으면서 일도양단의 기수식을 취했다.

    -심상절예 구현.

    천리마저 베어버리는 역천의 심상.

    순식간에 항주 전역을 장악한 광명마교주의 의념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심검을 벼려냈다.

    -천단.

    그리고 모든 것이 갈라졌다.

    * * *

    용맥의 자연지기와 몽상정토의 혼백.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기운을 손에 넣은 광명마교주가 심검을 휘두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난날 무림맹에서 휘두른 것처럼, 광명마교의 총단 전체를 박살내는 게 아닐까.

    “하늘이....”

    적아를 막론하고 전장에 모인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역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한 풍경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말을 잇지 못한다.

    광활한 하늘이 갈라지고, 그 너머로 언뜻 드러난 찬연한 별바다의 절경을 보며 무슨 말을 하겠는가.

    “.......”

    경악과 불신 속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두려움.

    불현듯 무림맹의 정예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지났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게 기우가 아님을 증명하듯, 아득한 상공을 지배한 상제(上帝)의 목소리가 대지를 짓눌렀다.

    [본좌가 곧 천하다.]

    하늘을 뒤집었고, 땅을 장악했으며,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배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림맹의 정예들은 새하얗게 질려서 질겁했고,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눈앞에 적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무릎 꿇고 경배했다.

    엎드린 채 오열하면서 절대자를 경외했다.

    “신인이시여! 신인이시여!”

    “가루라의 화신께서 돌아오셨도다! 이교의 죄인들은 천벌을 받을지어다!”

    “오소서, 우리의 주인이시여!”

    광명마교의 주인이 그에 화답했다.

    [충실한 교도들이여, 그대들의 충성은 보답받았다. 본좌는 힘을 되찾았으니, 이 땅을 그대들과 함께 정화하고자 한다.]

    “아아...!”

    [우리의 성지를 더러운 흙발로 짓밟은 죄인들을 무찔러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장기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공황에 빠진 무림맹의 적도들을 향해 살의를 드러낼 따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저항했으나,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만큼 부질없었다.

    콰직! 서걱!

    창이 복부를 뚫고, 칼날이 목을 떨어트린다.

    술법진의 수혜를 받고 있는 교도들은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로 무림맹의 정예들을 몰아붙였다.

    “갈! 제자들은 검진을 펼쳐라!”

    “우리에겐 도망칠 곳이 없다! 무림의 정기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워야 하느니라!”

    구파의 장문인들과 팔가의 가주들이 제자들을 독전했으나, 그들 역시 낙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광명마교주가 심검을 되찾기 전에 광명마교를 함락시킨다는 당초의 목표가 어그러진 셈.

    광명마교주를 죽이거나, 하다못해 광명마교를 확실히 제압했다면 뭐라도 해봤겠지만....

    [총군사님, 후퇴를...!]

    [아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오. 일단 후퇴한 다음에 전열을 정비해야 싸울 수 있소!]

    육성으로는 싸움을 독려해도 전음으로는 후퇴를 종용한다.

    그러나 제갈의현은 완고히 거절했다.

    [맹주님이 돌아오지 않으셨소!]

    멀리서 맹주의 기파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걸로 봐선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맹주를 두고 후퇴하는 게 말이 되나.

    ‘설령 맹주님이 안 계시더라도 후퇴는 불가. 저자가 우리가 퇴각하는 걸 지켜보지 않을 거다.’

    아득한 상공에서 전장을 오연하게 굽어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우리가 물러나면 교주는 다시 한번 심상절예를 쓸 것이오. 우리는 전멸을 면치 못하겠지.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가 아니라 섞여야 할 때요.]

    난전의 양상으로 흐른다면 제아무리 광명마교주라 한들 심상절예를 쓰지 못할 터.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다들 공황에 빠진 나머지 머리가 굳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소.]

    귀영과 염왕, 광명마교주와 싸우는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말에 다른 이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설마 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 *

    제갈의현의 말대로 두 사람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했군.”

    염왕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상반신을 가른 상처를 따라 끈적한 선혈이 흘러내린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했겠지.

    “지금 당장 손을 쓰지 않는다면....”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저놈이 우릴 그냥 내버려두겠느냐?”

    어쩐 일인지 광명마교주는 연격을 취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 허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마치 명상에 빠지기라도 한 모습. 심검을 되찾는 과정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걸까.

    “조심해라. 놈은 더 강해졌을 거다.”

    “그야 심검을 찾았으니....”

    “아니, 그거 말고. 불권의 심상이 놈에게 넘어갔을 공산이 크다.”

    “알고 있습니다.”

    불권 역시 염려하지 않았던가.

    애당초 심상을 엮어 심검을 봉인했기에, 불권의 명이 다하면 심상까지 딸려나올 수 있다고.

    만약 최악의 우려대로 되었다면 광명마교주는 본래의 심상에 불권의 심상까지 얻었다는 뜻.

    물론 그렇게 얻은 심상을 다룰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겠지.’

    염왕이 품에서 단약을 꺼내 으적 씹었다.

    “소환단입니까?”

    “그래, 안 먹는 것보단 낫겠지.”

    “이렇게 하면 더 나을 겁니다.”

    태양의 문양이 새겨진 오른손을 염왕의 명문혈에 가져갔다. 명줄이나 다름없는 요혈을 짚인 염왕이 움찔했지만, 강엽의 손길을 쳐내지는 않았다.

    오른손을 통해 어마어마한 기운이 들어왔던 것.

    “남한테 줘도 괜찮은 거냐?”

    “선배님께서 돌아가시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심흔을 입은 이상 염왕은 싸울 수 없다. 그때까진 강엽 혼자서 시간을 벌어야 하리라.

    염왕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장차 마교주가 될 놈이 쓸데없이 인심만 좋군.”

    “아직 결정한 건 아닙니다만?”

    뚱하게 구시렁거린 강엽이 손을 떼고 물러나자 염왕은 그의 어깨를 툭 밀어주었다.

    “먼저 가라. 곧 따라갈 테니까.”

    강엽은 여상히 끄덕였다. 발바닥 용천혈로 경파를 뿜으면서 적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허공에서 그렇게 다시 한번 대치한 두 사람의 모습.

    “홀로 싸울 텐가?”

    “난 혼자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진조도 있었지. 그 갑옷이 본좌의 심상절예를 막아냈군.”

    강엽의 몸을 빈틈없이 감싼 검은 갑주.

    절대방어의 공능을 지닌 마신갑 덕분에 불의의 일격을 맞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두 개의 심상절예라. 일월성신의 영성을 지닌 네가 다중 심상을 다루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군.”

    굳이 다중 심상을 언급하는 이유.

    그 속뜻을 헤아린 강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을 때, 광명마교주가 피식 웃으며 똑바로 섰다.

    “보여주마.”

    -심상절예 구현.

    광명마교주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공력.

    강엽이 뭔가를 할 새도 없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간 심상의 파동이 일대를 휩쓸었다.

    -무량여래지망.

    불권의 심상절예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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