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화신 (2)
적미성은 직감했다.
‘사부.’
불권이 명을 달리했다.
직접 본 건 아니나, 상단전의 영성이 불권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주었다.
‘당신다운 마지막이구려.’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 않고 희생한 것도, 마지막까지 사마외도를 끌어안고 죽은 것도.
불권답다는 생각에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
입은 웃는데 눈은 일그러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을 느낀 적미성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사부는 영원히 달아났군. 내가 당신을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멀리.”
그를 무학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던 스승이자, 자신의 야망을 가로막았던 태산 같은 존재.
한평생 뛰어넘고자 했던 스승의 죽음을 깨달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자신의 일부가 뜯겨나간 기분.
“피안으로 가버린 당신을 잡을 수 없다면....”
정면을 주시하는 적미성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과거의 당신이라도 잡을 수밖에.”
-카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소림을 덮친 불권의 심마.
불권의 숨이 끊긴 순간 녀석 역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머리를 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심령을 뒤흔드는 사자후에 소림승들조차 게거품을 물고 졸도한 상태.
십팔나한 중 몇 명만이 간신히 귀를 막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 사형, 어찌 참회동에서...!”
멸마전의 아라한들은 적미성을 대사형이라 불렀으나, 십팔나한들은 그리 부르지 않았다.
그들에겐 있어선 십팔나한의 수장인 무각만이 대사형이었기에.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적미성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심후한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놈들은 약해빠져서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십팔나한들이 항변할 새도 없이 적미성이 사라졌다.
직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심마의 몸통에 천근추의 묘용을 더한 고법을 꽂아넣었다.
어깨에 실린 경파는 버텨도, 무게까지 이기지 못한 심마는 십여 장을 데굴데굴 굴렀다.
다만 충격이 심하진 않는지 벌떡 일어나서 강력한 기파를 발했다.
-심상절예 구현....
“갈!”
적미성의 용천혈이 뿜는 진기에 지면이 크게 파였다. 주변의 땅에 균열이 이지러질 만큼 무식한 보신경.
그러나 기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빨랐다.
콰아앙!
일권을 맞고 고개가 꺾인 심마.
이후 깍지를 낀 주먹을 맞고 비틀거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막는 데만 급급해졌다.
신공절학의 무리도, 절대고수의 신기막측한 움직임도 모조리 배제한 무식한 주먹 세례.
내려찍는 힘에 지면이 둥그렇게 파이고, 거미줄 같은 실선이 사방을 향해 내달렸다.
이미 하체는 지면을 반쯤 파고든 마당.
쾅! 쾅! 쿠아앙!
그러거나 말거나 적미성은 흉신악살 같은 낯짝으로 심마를 칠 뿐.
천년의 거암조차 가루로 만들어버릴 주먹 세례에 자욱한 흙먼지가 하늘까지 솟구친다.
이윽고 끝장을 보기 위해 높게 치켜든 두 주먹.
하나 흙먼지를 뚫고 나온 검은 손이 완맥을 잡아챘고,
콰드득!
양팔을 감싼 호신강기가 으스러지는 위력에 적미성의 낯짝이 더욱 흉악하게 구겨지는 찰나.
-전륜극형.
심마의 뒤편에 황금 고리가 튀어나오면서 적미성의 신형을 저 멀리 쏘아버렸다.
“......!”
적미성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바로 금륜으로...!’
깨달았을 땐 칠 척에 이르는 거구가 포탄처럼 날아가서 사찰의 벽과 전각을 연달아 부순 뒤였다.
사문이 풍비박산이 나는 꼴에 지금껏 관망만 했던 십팔나한들이 노성을 터뜨렸다.
“저, 저...!”
“이놈! 멈추지 못할까!”
적미성과의 은원은 나중에 풀더라도 지금은 사문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리라.
달려드는 적들을 흘깃한 심마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거센 경파가 십팔나한을 덮쳤다.
십팔나한이 대경하여 경파를 막았으나, 가볍게 휘두르는 한 수에 대다수가 쓸려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절반도 안 되는 십팔나한이 반의 반토막으로 쪼그라든 격. 심지어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이들도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쿨럭, 닿지도 못하다니...!”
“의미는, 있었느니라....”
중년의 십팔나한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잔해가 폭발하며 적미성이 날아오른 것이다.
“퉤!”
입 속에 들어간 흙을 가래침과 함께 뱉은 적미성은 거추장스러운 단삼을 제 손으로 찢었다.
수많은 흉터가 새겨진 상반신. 실전을 위해 극도로 압축한 근육들이 별개의 생명체처럼 불끈거렸다.
“피차 금강불괴라면 더 단단한 놈이 살아남겠지.”
반쯤 굽힌 무릎을 쭉 펴며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
...콰아앙!
대기가 찢기는 소리보다 더 빨리 심마의 면전에 도달해서, 그 몸통에 가차없이 일권을 꽂아넣는다.
그러나 심상절예를 쓴 심마는 고통을 호소하기는커녕 외려 적미성의 턱뼈를 후려쳤다.
“흐읍!”
멈칫하는 틈을 타서 명치를 때린다.
복근을 불끈거려서 연격을 막아냈지만, 방어를 뚫고 사지백해를 찌르르 울리는 위력엔 적미성조차 절로 신음이 나왔다.
똑같이 금강불괴인데도 차원이 다른 맷집이었다.
‘이게 사부의 옛날 심상절예...!’
심마를 버리고 새로이 심상을 쌓아올린 불권과 사마외도에게 무자비했던 시절의 불권.
어느 쪽이 더 강하냐고 단언할 순 없다.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었을 테니까.
다만 연달아 꽂히는 일격은 하나 하나가 무거웠다.
‘젠장, 심상절예를 쓴다면....’
지금 쓰면 몸이 못 버틸 것이다.
내공을 되찾은 것과는 별개로 오랫동안 갇힌 탓에 몸상태가 완벽하진 않았으니.
하지만 쓰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터.
-심상절예 구현.
일단은 살아남는 게 급선무였다.
-천장강신 번천멸각.
백팔에 달하는 화엄신장의 강림.
온전치 않은 몸상태 탓에 제 위력이 나오지 않았으나, 적미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의 심마를 최대한 소림의 경내에서 멀리 떨어트리면서 일권을 퍼붓고 또 퍼붓는다.
과거 귀영은 술법과 연계한 뇌극의 심상절예로 허점을 찌르고 승부를 뒤집었으나,
‘이놈에겐 그럴 만한 재능도, 지능도 없다.’
백팔의 화엄신장이 구사하는 소림의 신공절학이 심마를 쉼없이 후리고 짓눌렀다.
그러나 금강불괴의 심상을 지닌 놈답게 그 모든 공격을 처맞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오히려 심마의 반격초에 화엄신장이 산산조각 쪼개지고 있는 마당.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적미성에게 돌아와서 오장육부를 진탕시켰다.
목구멍에서 들끓는 핏물을 삼키면서 일권을 뻗는다. 본디 심어(心語)로 다스렸던 신장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행동으로 짚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했다.
-우오오오오오오!
“웨에엑!”
결국 백팔의 화엄신장이 무너지면서 적미성은 한 됫박이나 되는 선혈을 게워냈다.
그럼에도 형형하기 그지없는 안광.
“...아직이다!”
입술을 덧칠한 피를 닦지도 않고 몸을 날려 심마를 낚아챘다.
“네놈도 점점 약해지고 있지! 사부가 죽어서! 내 말이 틀렸느냐, 이 망령놈아!”
-쿠오오오오오!
사람이었다면 눈이 있었을 부위를 움켜쥔다.
안쪽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적미성은 심마의 머리를 쾅 박았다.
뒤이어 두 절대고수가 절벽에 틀어박히고, 균열이 일어난 절벽에서 다시 싸움이 이어졌다.
적미성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심마 역시 싸움이 거듭될수록 금강불괴라는 말이 무색했다.
팔다리와 어깨, 몸통에서 재처럼 시커먼 가루들이 흩날리더니 종국엔 껍질이 떨어져나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등 뒤의 금색 고리는 옅어지면서 은색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
“그래, 사부가 극락정토로 갔는데 네놈이 계속 살아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심마의 시운은 여기까지였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끊임없이 부딪쳤다.
이미 적미성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
금강불괴는 깨져나가 이마 사이로 피가 흘렀고, 살갗이 벗겨지고 베이면서 피투성이가 됐다.
오른쪽 다리와 왼쪽 주먹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뼈가 부러졌겠지.
쾅! 투아앙! 콰직!
개의치 않는다. 심마를 죽이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제 와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은 되려 죽음으로 직행하는 길.
그렇게 몸이 망가질 때까지 싸우니 이제는 저잣거리 왈짜들처럼 직선적이고 단조로운 주먹질만 했다.
그러나 그 안엔 무수한 변화가 깃들었다.
‘정중동.’
소림의 무학을 관통하는 이치.
자그마한 손놀림에도 현기(玄機)가 묻어나면서 조금씩 공방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흡사 포효처럼 들리는 흉성과 함께 전신 발경의 무리가 동반된 단타가 명치를 강타했다.
-......!
허리가 꺾인 심마를 그대로 내리꽂아 대지 깊숙이 심는다.
사람이었다면 척추뼈가 으스러졌겠지만, 워낙 단단해서 그런지 작물마냥 땅을 깊이 파고들었다.
“아직 안 끝났다!”
놈의 다리를 잡아 좌우로 패대기치고, 저 멀리 골짜기를 향해 내던졌다.
바위를 박살내고 폭포까지 처박힌 심마의 육신.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쉰 적미성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힘겹게 끌고 갔다.
-끼이이익....
“...너도 죽고 싶진 않겠지.”
그러나 불권이 죽은 지금, 미망에 불과한 심마가 살아남을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지가 부서진 채 널브러진 심마를 오연히 내려다본 적미성이 짓씹듯 내뱉었다.
“이전엔 용맥으로 숨어서 살아남았을 터. 하나 이제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거다.”
용맥에 숨기 전에 그의 손에 죽을 테니까.
적미성은 손가락뼈가 모조리 금이 간 주먹을 억지로 들어올려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위력이 제대로 실리지도 않은 솜주먹이었지만, 심마 역시 단단함을 잃었기에 맥없이 꿰뚫렸다.
그렇게 사부의 심마를 완전히 끝내버린 순간.
후우우우우웅!
심마의 육신을 이루었던 잿가루들이 칠공을 비롯한 전신 모공으로 흘러들어왔다.
“젠장! 바퀴벌레보다 끈질긴 놈!”
그러나 심마의 기운은 해를 끼치지 않았다.
외려 심상절예의 충돌로 인한 심흔을 비롯한 온몸의 부상을 치유하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뜻밖의 사태에 떨떠름한 것도 잠시.
온몸으로 심마의 기운을 받아들인 적미성은 파도처럼 몰려오는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그렇군. 이게 사부가 가졌던 번뇌인가.”
불권이 생전에 지녔던 번뇌와 사마외도를 향한 증오심이 가감없이 전해진다.
그 순간, 적미성은 깨달았다.
“내 몸을 숙주로 삼은 것은 상관없다. 대신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게다.”
심마는 그와 하나가 되었음을.
그와 함께 무뎌졌던 기감이 빠르게 회복되면서 일대의 상황이 단숨에 파악되었다.
‘이놈의 능력 모두가 내 것이 되었다.’
한때 숭산의 용맥과 결합되었던 심마의 능력.
그때만큼 강력하진 않지만, 적미성 역시 용맥으로부터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 있었구나, 쥐새끼.”
숭산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기척.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챈 괴뢰마가 대응에 나서기도 전에 적미성이 그들 사이에서 불쑥 솟았다.
“이런...!”
“쓸 만하군.”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매만진 적미성이 낭패감에 찬 괴뢰마를 향해 일권을 들어올렸다.
괴뢰마의 분신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으나, 전신 발경으로 움튼 강대한 기파에 모조리 휘말렸다.
괴뢰마가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목을 잡아챈 적미성이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익숙한 기척이다. 괴뢰마인가?”
“외소림의 괴물...!”
“수고를 좀 해줘야겠다. 날 가까운 석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내가... 할 거라, 생각하나?”
머리에 피가 안 돌아 파리하게 질렸으면서도 적미성을 보는 괴뢰마의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러나 적미성은 무신경했다.
“궁금하군. 네놈을 반송장으로 만들어서 끌고 가면 석탑을 통과할 수 있을지.”
광명마교의 사도를 생포하겠다는 선언.
하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적미성이었기에 괴뢰마는 광오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설령 사도의 시체를 가져가거나, 사도 본인이 동행해도 교도가 아닌 자는 석탑을 통과할 수는 없다.
석탑은 교주가 관리하는 교의 잔략자산. 만약 사도가 엉뚱한 마음을 품는다면 즉시 그 안에 갇히겠지.
그러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금, 교주는 과연 그렇게까지 석탑에 관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자결해야....
타타타탁!
혀를 깨물려고 하는 찰나, 적미성의 손가락이 속사처럼 전신 아혈과 마혈을 짚었다.
호신강기도 벗겨졌기에 힘없이 당한 괴뢰마의 눈매가 흔들리는 그때 적미성이 작게 속삭였다.
“굳이 자결을 하려는 것 보면 이용할 건덕지가 있는 모양이군. 알려줘서 고맙다.”
“...!”
세상의 명운을 건 정마대전. 그 싸움에 또다른 변수가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