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80화 (380/450)

76화. 환야 (1)

의념으로 발하는 전성.

불가의 사자후처럼 메아리치는 절규는 그 자체로 세 사람의 심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정통으로 맞았다간 오장육부가 뒤집히겠군.’

심상의 기운을 넓게 두르며 전성에 실린 내공을 차단한 강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석좌에 있던 심마가 그들을 인식한 이후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염왕을 공격하던 분신들까지 일제히 방향을 바꿔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계획이 꼬인다는 건데.’

염왕이 심마를 상대하는 동안 강엽이 용맥에 개입, 심마와 용맥의 결합을 떼어낸다는 계획.

하지만 수십이 넘는 심마의 분신들이 나타난 시점에서 일이 꼬이고 말았다.

“하긴 계획대로 된 일이 얼마나 있다고.”

모든 게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변수와 상황에 맞춰 대응하지 않았던가?

빠지지지지직...!

거세게 휘몰아치는 뇌기의 폭풍이 몰려오는 분신들을 뒤덮었다.

하나같이 금강불괴를 이룩한 괴물들.

눈부시게 명멸하는 벼락이 육신을 불태우고, 암경이 침투했지만 멈춘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호흡 몇 번 내쉴 동안에 기세를 되찾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쯤이면 충분했다.

화아아아아악!

한복판에서 폭발한 거대한 푸른 불꽃이 분신들을 날려버렸으니까.

전신에 창염을 두른 염왕이 쭉 질주했다.

“돌겠군. 용맥과 결합했다고 이렇게까지 수가 불어날 수 있나?”

단순히 부활하는 걸 넘어 이토록 수가 불어날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불권 또한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무량수불, 노망난 땡중의 업보가 하늘을 뚫는구려. 두 사람에게 면목이 없소.”

“하늘이 아니라 땅을 뚫었지. 여기 지하잖나?”

“....”

염왕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강엽조차 잠시 동안 멍해졌다.

“...설마 농담입니까?”

“흠, 재미없나?”

강엽이 불권을 돌아보자 그 역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빛이 많이 불손한데. 대가리 좀 컸다고 건방을 떠는군.”

“그보다 작전을 다시 짜야 할 것 같습니다만.”

“말을 돌리는구나.”

촤아아악!

염왕이 심도를 휘두르자 심마의 분신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더럽게 단단하군. 누가 불권 아니랄까 봐.”

“빈승은 여기 있소만?”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라. 그보다 저것들 동륜으로 안 변하나?”

만약 저 많은 분신이 더 강해지면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그때 분신들 일부가 뭉치더니 회색 고리가 동색으로 바뀌었다.

강엽과 불권이 빤히 바라보자 염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잘못 아니다.”

“우린 아무 말도 안 했소.”

“눈빛으로 욕한 것 같았는데...?”

“강 시주 말대로 작전이나 논하는 게 좋겠구려. 혹시 저 분신들이 처음에 얼마나 있었는지 아시오?”

“정확히 백팔 놈이었지.”

“백팔번뇌라....”

고개를 주억인 불권이 뒷말을 이었다.

“셋이 합쳐셔 동륜을 만들었소. 산술적으로 따지면 동륜은 서른여섯, 은륜은 열둘, 금륜은....”

“넷이군. 하지만 예전의 당신도 금륜이 마지막 아니었나? 그럼 저놈이 그때보다 강하다는 건데?”

“...그럴 거요. 용맥과 결합했으니 무량대수에 가까운 자연지기를 얻었을 테지.”

“청출어람이군. 강엽, 이 사태에 대한 대비책은 있나?”

“특단의 대책 같은 건 없군요.”

용맥과 심마, 나아가 심법진의 결합이 이런 결과를 불러오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하지만 변한 건 없습니다. 염왕 선배님께서 석좌의 본신을 상대해주십시오. 전 방장 대사님을 보호하면서 분신들을 상대하겠습니다.”

동륜으로도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분신들은 바로 은륜으로 넘어갔다.

그때를 노려 퍼부은 두 사람의 심상절예.

무광암과 일도무겁살의 심상절예가 충돌, 삼라만상이 무너지는 충격이 분신들을 휩쓴다.

-......!

멀리 석좌에 앉은 심마까지 범위에 둔 절기.

두 사람의 심상절예가 충돌하며 발생한 광범위한 의념의 해일이 분신들을 덮쳤다.

“원래 변신할 때 기습해야 제맛이지.”

뜨겁게 이글거리는 대기를 단숨에 돌파하는 염왕을 일별한 강엽이 시선을 내렸다.

구우우우우웅!

웅혼한 공명음과 함께 뛰어오른 시커먼 인영들이 금강불괴의 심상절예를 두른 채 돌격한다.

군데군데 박살난 놈들이 눈에 띄긴 해도 그 숫자는 얼마 안 된다.

‘놈들의 진입부터 제한해야 한다.’

등 뒤에 둔 불권을 허공섭물로 띄웠다. 불권 역시 강엽의 진의를 깨닫고 저항하지 않았기에 옮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입 방향이 정해진 외진 구석.

강엽은 몇 겹의 호신 술법을 두른 불권을 앞에서 보호하며, 몰려오는 분신들을 상대했다.

은륜이 되면서 몇 배로 단단해진 분신들은 심검을 정통으로 맞고도 생채기에 그쳤다.

다만 심상절예를 맞은 팔다리는 반쯤 끊어지고, 몸통에도 긴 상처가 남아 검은 핏물을 울컥 게워냈다.

하지만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강 시주! 앞을 보게!”

땅속에서 그림자들이 솟구치며 새로운 분신들이 나타났던 것.

공격을 피하면서 반쯤 끊어진 팔뚝을 완전히 잘라낸 강엽이 외쳤다.

“진조!”

[크흐, 준비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심법진의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거대한 마신상이 떠올라 강엽을 덮었다.

그것이 심상절예라는 것을 알아본 염왕이 심마를 발로 날려버리면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저건 갈수록 괴물이 되는군.”

-크르르르르르...!

염왕의 족격을 맞고 날아간 심마가 강엽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염왕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 난 보이지도 않는 거냐?”

* * *

사마외도를 증오하는 마음이 심마가 되었다면, 심마 역시 사마외도를 증오할 터.

마신상이 출현한 이후로 분신들은 더욱 미쳐 날뛰고 있었다.

-우오오오오오!

정신없이 쏟아진 신공절학들이 마신상을 후려친다.

강엽이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금륜을 띄운 심마의 본신이 염왕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용맥의 자연지기를 무한히 끌어다쓰는 신위.

등 뒤에 띄운 금륜은 빛을 뿜는 것을 넘어 타오르는 광륜(光輪)으로 화했다.

하나 염왕은 그런 심마와 싸우면서도 오히려 구석으로 몰아간다.

‘저쪽은 신경 쓸 필요 없겠군.’

장기전의 양상으로 간다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염왕이 주도권을 쥐고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후계자야, 저놈들 슬슬 또 변하려고 하는구나.]

은륜의 분신들이 마신상을 두들기는 동안 일부가 뭉치면서 금륜으로 변했다.

“버틸 수 있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더욱 위험해졌다. 아무리 진조라도 물량공세가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힘을 소진할 게 아닌가?

[네놈은 짐을 무엇이라 여기는 게냐? 저깟 놈들은 떼거지로 몰려와도 짐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 믿고 맡기지. 난 용맥에 개입해서 심마를 떼어낸다.”

[한 가지 더. 짐이 보기엔 네놈의 왼팔에 걸린 그 심상이 열쇠가 될 것 같구나.]

금륜으로 변한 분신 셋의 합공을 팔로 쳐낸 진조가 마뜩찮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미천한 술사놈이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꼴이라니. 살아있었다면 피떡을 만들어줬을 것을.]

“내가 보기엔 둘이 똑같은데.”

다른 사람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의지 자체를 비틀어서까지 계승자를 남기려는 광기.

흔히 비슷한 부류는 서로를 정말 좋아하거나, 미치도록 싫어한다고 하던데....

‘동족혐오도 아니고 뭔.’

진조가 금륜의 분신들을 막아내는 동안 강엽은 수인을 맺고 심력을 집중했다.

“강 시주.”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고맙네. 그리고 이게 필요할 게야.”

불권은 강엽을 향해 감사를 표하면서,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넘겨주었다.

마치 옥으로 만든 것처럼 선명한 녹색을 띠는 지팡이.

그것이 소림의 신물이자 방장의 장문령부인 녹옥불장(綠玉佛杖)임을 알아본 강엽이 눈을 빛냈다.

“본사의 장문령부는 숭산에서 가장 오래된 신목(神木)의 가지를 꺾어 만든 물건일세. 신목은 용맥의 기운을 받고 자란 만큼 이 지팡이에도 기운이 깃들었지.”

귀한 장문령부를 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불권은 스스럼없이 녹옥불장을 강엽의 손에 쥐어주면서 염불을 외웠다.

‘원래는 금시환령을 쓸 생각이었는데....’

태산북두 소림의 신물답게 반편이가 된 금시환령 이상으로 웅혼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숭산의 용맥뿐만 아니라 역대 방장들의 법력이 깃들면서 영성을 지닌 신병이 된 것이다.

구우우우웅...!

녹옥불장을 땅바닥에 꽂자 거세게 요동치는 심법진의 공간.

왼팔을 감싼 환신의 심상이 녹옥불장 안으로 흘러들어가며 심법진을 강제로 열어젖힌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의 근원을 위협하는 힘을 느낀 걸까.

숫제 비명까지 질러가며 발광하는 심마의 모습에 강엽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쩌저저적! 쩌저저저저적...!

녹옥불장을 꽂은 자리에서 시작된 균열이 삽시간에 뻗어나가 벽과 천장을 덮는다.

심법진의 진축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용맥과 이어진 가장 내밀한 요혈이나 마찬가지.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틈에 자신의 심상을 흘려내면서 균열을 더욱 확장시킨다.

-혈라지망.

심법진 안에 태동한 심법진.

핏빛의 줄기들이 틈새를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면서 심법진과 용맥을 강제로 떼어낸다.

-카아아아아아악...!

“효과가 있군! 분신들이 되살아나지 않네!”

불권의 말대로 부숴진 분신들은 부활하지 못했고, 남은 분신들 역시 이전만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엽은 싸움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 * *

환신의 심상을 길잡이 삼아 용맥에 동조한 강엽은 어느 순간부터 환상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노부의 심상을 거부한 거냐?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든 세상이었다.

시간은 분절된 것처럼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고, 귓가를 강타했던 굉음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현실감이 흐려지는 곳에서, 백발을 기른 홍안의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수염을 매만졌다.

체구는 강엽의 가슴팍에 못 미쳤지만,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은 실로 막대한 수준.

노인이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강엽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환신이군.”

-묻는 말에나 답해라, 놈!

쩌렁쩌렁한 호통에 실린 기운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 나부낀다.

그러나 강엽은 답하는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심법진 안에 자신의 의념을 남겨둔 건가.”

언젠가 환야진서를 손에 넣은 자신의 전인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의념을 숨겨둔 것이리라.

“당신도 그것만으로 자신의 술법을 터득하는 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할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려. 술법을 다 익힐 때쯤엔 이미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을 거다.”

그래서야 다시 제자를 찾아야 할 판이다. 제때 제자를 찾지 못한다면 술맥은 끊길 터.

“그건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심법진에 의념을 남겨둔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

-...알고 있었느냐?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거든.”

당장 진조와 백무량, 유익이 비슷한 방식을 쓰지 않았던가.

“내가 심법진만 갖고 있었다면 환야진서를 해석한 시점에서 당했겠지. 당신의 심상은 평범한 술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니까.”

-네 녀석...!

그제서야 강엽이 심상지경에 달한 고수라는 것을 알아봤는지 환신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바보 같은... 무공과 술법 양쪽에 통달했다고? 네놈이 무슨 마교주라도 된다더냐!

“비슷하다.”

-뭣이?

강엽이 양손의 장갑을 빼고 태양과 달의 문양을 보이자 환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바깥의 두 사람을 응시했다.

-미친놈들. 어딜 데려올 사람이 없어서 일월신교의 주구를 데려와?

“알았으면 포기하....”

-아니.

“음?”

-노부는 포기할 성싶으냐. 이대로면 노부의 술법이 영영 세월의 사토 속에 파묻힌단 말이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무맥이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데. 그렇게 따지면 당신의 술맥도....”

-그딴 저급한 무맥들과 비교하지 마라!

노성을 지른 환신이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히 올렸다.

-비인부전이라고 하지만, 영원히 사장되는 꼴을 볼 순 없지. 아쉬운 대로 네놈에게 전수해야겠다.

“거절한다.”

-...진심이냐?

“당신에게 배우려면 심상부터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럼 내 의지가 뒤틀리지 않나? 만사 제쳐두고 당신의 술법을 익히려고 하겠지.”

강엽에게 있어 환신의 술법은 그런 대가를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환신도 억지로 심상을 받아들이도록 수작을 부렸겠지.

-네놈은 심상법을 깨우쳤느냐?

“아니.”

-그럼 노부의 술법이 도움이 될 거다.

“심상법은 당신 없어도 깨우칠 수 있다. 그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짐을 떠안는 경험은 지긋지긋해.”

진조도, 유익도 강엽 자신의 의사는 듣지도 않고 멋대로 후계자로 삼지 않았던가.

“정말 제자를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배움이 절실한 사람을 찾았어야지. 당신은 발상 자체가 글러먹었어.”

-네놈이 뭘 안다고.

환신이 걸을을 내딛자 해일처럼 아득한 존재감이 몰려왔다.

-오냐. 이젠 말로 설득하지 않으마. 네놈이 배우지 않겠다면 강제로 쑤셔넣어주지.

염왕과 불권, 진조는 개입하지 못한다.

환신의 의념이 깨어난 순간부터 두 사람의 시간은 외부와 서로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으니까.

-누가 이길지 보자꾸나.

환신이 비틀린 조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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