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79화 (379/450)

75화. 불권 (4)

무림에서 타인의 무공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금기로 여겨진다.

무공의 초식이나 약점이 낱낱이 알려지면 여차할 경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불권은 심마에 대해 알아야 대응할 수 있다면서 자신의 심상절예나 그 시절의 버릇 같은 것들을 시원하게 알려주었다.

‘심상절예 전륜극형.’

과거 흑룡교주의 머리를 깼던 심상절예.

그 후로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발전했다고 했던가.

-전륜극형은 전륜성왕의 고리에 빗댄 심상절예요. 네 단계로 나뉘며, 끝으로 갈수록 강해지오.

등 뒤에 암울한 철륜(鐵輪)을 드리운 심마의 신형.

강엽이 쏘아낸 무광암의 참격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 놈은, 그대로 어깨로 치는 고법으로 맞섰다.

‘단단하군.’

키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무광암과 부딪친다.

맨몸뚱이로 심상절예를 받아낸 놈은 지면에 다리를 반쯤 파묻은 상태로 참격을 밀어내려고 했다.

-우오오오오오오!

계속 버티는 건 버거운지 포효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토해낸다.

투콰콰콰콰콰콰쾅...!

요란한 굉음을 뿌리며 날아간 놈은 그대로 벽을 부수고 들어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콰아아아앙!

날아갔던 방향에서 쏘아지는 직선 경파.

머리를 까딱여 반격을 피한 강엽은 어느새 측면으로 파고드는 심마를 보지도 않고 발로 꿰뚫었다.

하체에서 일어난 발경과 용천혈로 분사한 진기.

음속마저 뛰어넘은 족격이 채찍처럼 강타했지만, 심마는 세 걸음을 물러나는 게 전부였다.

“그걸 맞고 그 정도란 말이지.”

강엽 자신도 맨몸으로 무광암을 맞는다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심마는 무광암을 버텨냈다.

‘상반신이 반이나 날아간 걸 버텼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사람이었다면 무조건 죽었겠지.

그러나 심마는 실체를 얻었을지언정 생을 얻은 것은 아니기에, 상반신이 날아가고도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 심흔을 입은 징후도 보이지 않는 판국.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힘을 뺐다고 해도 초월적인 맷집이다.’

불권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옛날에 다루었던 심상절예는 총 사단계로 구분된다.

그중 가장 약한 철륜의 단계가 얼마나 강한지 알기 위해 심상절예의 위력을 조절했다.

여기서 심마를 이긴다고 끝이 아닌 만큼 놈의 힘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내가 힘을 빼고, 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도 초월적이군.’

적을 체액 한 방울 안 남기고 모조리 삼켜버리는 것이 무광암의 요체.

하지만 심마는 상체가 반파되는 충격을 입었음에도 완전히 삼켜지진 않았다.

‘과연 금강불괴를 극대화한 심상절예.’

소림 외공의 정수인 금강불괴.

흑룡교와의 정마대전 당시 불권은 절대로 부숴지지 않는 금강불괴의 심상을 완성했다.

육신이 단단해지는 걸 넘어, 진기가 금강석마냥 단단하게 응집된다.

부아아아아앙...!

공기를 가르고 들어온 일권.

흡혈귀의 힘과 혈공진기의 거력으로도 다 막아내지 못한 강엽이 쭉 밀려나자 심마가 따라붙었다.

아홉 개의 신형으로 나뉜 분신이 강엽을 가운데에 두고 팔방과 천장에서 공격한다.

‘연대구품...!’

허상을 찾는 건 소용없다. 아홉 분신 모두가 실체였으니까.

무광암을 맞은 충격으로 왼팔이 뜯겨나가서 제대로 된 공격을 구사하진 못했지만, 아홉 개의 신형으로 나뉜 심마의 일체 합공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아홉 분신의 공격은 허공만 칠 따름.

-...!?

한순간 강엽을 놓친 분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릴 때, 천장에서 들이친 심마의 골통이 터져나갔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군.”

상반신이 무너진 뒤로 회색 고리가 급속도로 흐릿해지고 있었다.

기감으로 적들의 육신이 헐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강엽이 눈을 빛내는 순간, 오른손에서 뇌기가 명멸했다.

-뇌망.

자성검은 백서희에게 줬지만, 이젠 자성검 없이도 얼마든지 검초를 펼칠 수 있는 바.

창백한 뇌기가 그물처럼 퍼져나가면서 분신들을 관통하고, 그 끝에 있는 진체까지 뻗어나갔다.

강엽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불권을 향해 달려가는 심마.

하나 남은 주먹을 힘껏 잡아당긴 놈이 일권을 뻗기 전에, 한 줄기 벼락이 시커먼 육신을 관통했다.

-캬아아아아아악!

“끈질긴 놈.”

주먹을 당기는 시늉을 하자 뇌기에 관통된 심마가 쭉 끌려온다.

-끼기긱!

육신을 관통한 뇌기의 올가미를 잡고 끝까지 반항했던 놈은 머리가 터진 뒤에야 멈추었다.

검은 핏물이 묻은 발을 암석에 문지른 강엽은 놈이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얼핏 보면 죽은 것 같지만....

“고맙네. 덕분에 살았으이.”

감사를 표한 불권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놈은 죽지 않았네. 다시 부활해서 우릴 덮칠 게야.”

이미 숭산의 용맥과 결합한 놈은 불사나 마찬가지.

거기에 환신의 심법진과 하나로 결합하기까지 했으니 일행의 동선을 손금 보듯 꿰뚫어보고 있을 게 뻔했다.

“철륜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군요. 장기전의 양상으로 흐른다면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최대한 빨리 염왕 시주와 합류해야겠군.”

“그래야지요.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잡음이 낀 느낌입니다.”

아무리 공력을 쏟아도 일정 이상 닿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의지가 기감을 막는 듯한 느낌.

“어쩌면 이것도 놈의 수작이겠지요. 이유가 뭐든 간에 이 장소 전체가 우리에게 적대적입니다.”

심지어 공기마저 희박해서, 한 군데에 오래 있다간 호흡할 공기가 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암만 흡혈귀의 목숨이 질겨도 공기가 한 줌도 남지 않는다면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 터.

“일단 이동해야겠습니다. 염왕 선배님이 어디 계시든 심법진의 진축은 찾아야 하니까요.”

“음? 심마가 진축이 아닌가?”

“아닙니다.”

강엽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본 놈이 진축이었다면 환신의 심상이 느껴졌을 겁니다. 놈이 의도적으로 숨긴 게 아니라면요.”

“으음, 그렇다면....”

“최악의 가정이지만, 좀 전에 제가 상대한 놈은 심마의 본체가 아니었을 공산이 큽니다.”

“.......”

불권 역시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침중한 안색으로 염불을 읊조렸다.

강엽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어디로 가야 할지 느껴진다는 거겠지요.”

왼팔에 두른 환신의 심상.

강엽은 그것이 지남침처럼 방향을 잡아준다는 사실을 알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 *

시커먼 암석으로 이루어진 동굴.

곳곳에 자리한 시뻘건 야광주들이 요사한 빛을 토해내는 가운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이걸로 셋.”

심권으로 분신을 박살낸 강엽이 손을 털었다.

흑룡교의 유물로 백무량의 잔념과 상대하면서, 그가 심권을 다루는 감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득한 것.

심마를 세 번이나 상대하면서 베는 것보다는 부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체력은 어떠십니까?”

“버틸 만하네.”

불권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신공을 잃은 노승의 육신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뿐.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얼마 못 가서 탈진하겠지.

“잠시 쉬는 게 좋겠군요.”

“서둘러야 하지 않은가.”

“대사님께서 쓰러지시면 그게 더 문제입니다. 저도 지금은 좀 쉬어야 하고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불권도 못 이기는 척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기조식을 할 순 없어도 몸에 새겨진 습관대로 신공의 호흡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가사 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불권이 물을 마시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렇게 앉으니 몸이 무겁구먼. 한창 걸을 땐 몰랐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는 기분일세. 자고 일어나면 근육이 비명을 지르겠어.”

“...무공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광명마교주의 심검을 봉인하느라 무공을 잃지 않았나.

그렇다면 불권의 목숨이 다하기 전에 광명마교주를 죽인다면 무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늦었네. 설령 지금 당장 광명마교주가 쓰러져도... 그때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겠지.”

“.......”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돌처럼 굳어진 강엽의 얼굴을 본 불권이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나이 백 세를 넘겼네. 큰 병 걸리지 않고 장수한 것만으로도 큰 복이 아닌가.”

“하지만 무공을 잃지 않았다면....”

“물론 조금 더 오래 살았겠지. 하나 큰 차이는 없을 게야. 환신이 천명을 다했듯 이 늙은 땡중도 언젠가는 하늘의 부름을 받지 않겠는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으셨습니다.”

“예끼, 이 친구야. 살 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를 언제까지 부려먹을 겐가? 앞으로의 일은 젊은 자네가 해결해야지.”

“전 딱히....”

“아네. 자네는 정파인이 아니지.”

“....”

“그래도 악인은 아니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제가 혈마나 광명마교주 뺨치는 마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확신은 무슨. 그저 느낄 뿐일세.”

“...?”

“적어도 내게 있어 자네는 심상지경의 고수도, 운명의 세 별도 아니야. 그저 늙고 병든 땡중이 갑자기 숨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평범한 청년이지.”

“....”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걸세.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말문이 막힌 강엽의 모습에 불권이 씁쓸하게 웃었다.

“한때 이 늙은 화상은 옹졸한 마음으로 이 땅의 모든 사마외도를 불같이 증오했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르침을 잊고 대의를 위한답시고 불살계를 범한 게야.”

“그땐 한창 전쟁 중이 아니었습니까.”

“그 마음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져갔다는 게 문제였네. 이미 그때부터 심마라는 독이 이 늙은이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웠던 게지.”

“그래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순간 부처를 잊고 야차가 되는 걸세.”

불권은 문득 먼 과거를 돌아보듯 아련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안 됐었지. 이 늙은이가 그랬기에 그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게야....”

그가 말하는 아이가 누구일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강엽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미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못난 사부가 잘못 가르쳤지. 사부라는 작자가 그 모양이니 어찌 잘 가르치겠나.”

“그게 어찌 대사님의 탓이겠습니까.”

“녀석을 참회동에 가둬놨네.”

소림이 사마외도를 계도하기 위해 만든 뇌옥.

사실상 한 번 갇히면 소림이 풀어주기 전엔 나갈 수 없는, 그 안에서 영원히 썩어야 하는 지옥이었다.

“오해하진 말게. 자네와 싸웠기 때문은 아니니까.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반성하라고 넣어둔 게야.”

“무림맹은 그들을 받아줬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장은 필요하니까. 맹주께서 말씀하시더군. 지금은 전력이 부족하니 공으로 과를 갚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일세.”

“그럼 풀려나겠군요.”

“그땐 멸마림이라는 이름을 내려놔야겠지. 무림맹의 편제 아래서 백의종군해야 하네. 그 이후는... 녀석이 뉘우치길 바랄 뿐.”

글쎄, 과연 적미성이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칠까.

강엽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제자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부의 마음에 굳이 대못을 박고 싶진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다.’

적미성을 놓아준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해도, 당장 손을 쓸 수 없다면 이 이상 연연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상념을 이어나가는 때.

‘저건?’

돌연 흠칫한 강엽이 격공으로 불권의 뒤를 강타했다.

콰아앙!

“...벽이 움직인 겐가?”

불권이 등지고 있었던 벽이 갑작스레 꿈틀거리면서 그를 빨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놈이 방식을 바꿨나 보군요.”

철륜의 심상절예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층 과격하게 나왔다.

천장에 박힌 핏빛의 야광주.

그 안에서 길게 찢어진 눈동자가 튀어나오면서 두 사람을 향해 또르륵 굴러가는 게 아닌가?

내면으로 침습하는 사특한 기운을 감지한 강엽은 눈썹을 치뜨면서 건조하게 내뱉었다.

“별 시답잖은 짓을.”

심상을 다루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욕칠정이 폭주하는 환술.

정안으로 심법진의 수법을 꿰뚫어본 강엽은 불권에게 호신의 술법을 씌워 그의 정신을 보호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 이미 안 좋은 안색이 더욱 수척해진다.

“놈은 우리가 회복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나 보군요.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걱정하지 말게.”

“그럼 결례를 좀 저지르겠습니다.”

불권의 머리와 사지를 허공섭물로 묶고, 핏빛 강사로 연결해서 단단히 고정시킨다.

“길을 열어라, 혈목!”

바닥을 뚫고 올라온 핏빛 줄기들이 통로 저편으로 나아간다.

제멋대로 닫히려는 암벽을 힘으로 막으면서 두 사람이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던 것.

질긴 강사로 불권과 엮인 강엽은 그대로 몸을 날려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콰아아앙!

막강한 경파가 암벽을 부수고 통로를 만든다.

서서히 막혀가는 통로를 혈목으로 막고, 그 사이를 절묘하게 빠져나가면서 혈목을 회수.

같은 과정을 반복해서 나아간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미 그곳에선 싸움이 한창이었다.

-심상절예 구현.

허공에서 심마를 튕겨낸 염왕이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강대한 의념이 태동한다.

-일도무겁살.

그 아래 있던 심마가 산산조각 부서진다.

그러나 염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뭘 하고 있나!? 왔으면 어서 도와!”

“심마가....”

불권이 탄식을 쏟아냈다.

염왕에게 덤비는 심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대충 봐도 수십이 넘는 심마가, 일제히 회색 고리를 띄우며 염왕을 향해 덤벼드는 광경.

일부는 방향을 바꿔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쯧, 몰이사냥이었나?”

암벽을 움직이며 그들을 몰았던 건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나.

심법진의 힘으로 기감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기에 영락없이 함정에 빠져버렸다.

우우우우우웅...!

강엽의 왼팔을 휘감은 묵빛 문자.

길을 알려준 환신의 심상이 저편에 있는 존재와 공명한다.

동굴의 천장과 땅을 잇는 거대한 석좌.

부처의 연화대를 닮은 석좌에 앉은 시커먼 심마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