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환야 (2)
“이보게, 강 수찬.”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던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은 관복의 중년인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 노 시강님.”
시강은 한림원의 정육품 관직으로, 내가 임관한 종육품 수찬보다 한 끗발 높다.
“아까부터 멍하니 있더군.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정신 좀 차리게. 맡긴 일은?”
“아, 예. 다 끝냈습니다.”
수찬으로서 내가 맡은 일은 시정을 기록하는 것으로, 훗날 국사의 초고가 된다.
먹물이 다 마르지도 않은 종이들을 노 시강이 매서운 눈으로 훑어봤다.
만약 글자가 틀리거나 내용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의 말을 씹은 괘씸죄까지 더해져 된통 혼나겠지.
그래서 맡은 일은 완벽하게 끝냈는데, 노 시강은 엉뚱한 데서 꼬투리를 잡았다.
“이봐. 윗분들 보시는 자료인데 필체가 이게 뭔가?”
“필체 말씀이십니까?”
“쯧쯧, 팔고문을 공부한 자가 이래서야... 과거 공부할 때 뭘 했는지 모르겠군. 황상께서 읽으신 전시 답안지에도 이런 식으로 개발새발 썼나?”
“....”
일부러 꼬투리를 잡고 있군.
내 글씨가 용사비등한 명필은 아니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악필도 아니다.
고향에 계신 스승님께서도 필체 때문에 과거에 떨어질 일은 없다고 하셨고.
그럼에도 노 시강이 꼬투리를 잡는 까닭은 나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뭇 학사의 글씨에선 그 사람의 성정이 묻어나오는 법. 자네 글씨는 무척이나 날카롭고 공격적이군. 칼날로 눈을 찌르는 기분일세. 윗사람들이 보시면 얼마나 언짢아 하시겠나?”
“...시정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기록은 다시 쓰게. 좀 둥글게, 보는 이로 하여금 넉넉한 마음을 갖도록 말이야.”
무려 수십 장을 한땀한땀 정성 들여 다시 써야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뿐.
“난 퇴청할 테니 내일 아침까지 끝내게.”
결국 노 시강은 날 내버려두고 나가버렸고, 나는 절반 남은 황촉에 의지해 철야 작업을 이어나갔다.
내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대충 하다간 한 소리 듣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삼경 뒤에 일을 끝낸 뒤에야 한림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가문이 빈한하여 돈은 없었으나 다행히 집을 마련할 수는 있었다. 향시와 전시에서 잇따라 장원으로 급제한 덕분에 후원자가 붙은 것이다.
스승님과 막역하게 지낸 고관이었는데, 내 처지를 알고는 흔쾌히 집을 마련해주었다.
좀 구석진 곳에 있긴 해도 그럭저럭 오갈 만한 거리.
밤에 황성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이 내 관복을 보고 예를 갖추었고, 나 또한 고갯짓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수고가 많소. 요새 별 일은 없소?”
“아, 강엽 나리. 다행히 없습니다.”
“하긴 용감한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어떤 놈이 감히 소란을 피울까. 계속 수고해주시오.”
“하하, 살펴가십시오.”
야경꾼들을 지나친 나는 곧 집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두들기자 가복들이 헐레벌떡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나리!”
“부인은?”
“안채에 계십니다.”
“알겠네. 밤이 늦었는데 자네들도 쉬게.”
읍하는 가복들을 뒤로하고 안채로 들어가려는데 분홍색 궁장을 입은 아내가 웬 포대기를 안고 왔다.
“오셨어요, 상공.”
“늦었는데 먼저 쉬지 그랬소.”
“상공께서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 제가 어찌 그러겠어요. 그리고 진아가 갑자기 깨서 칭얼거리는 바람에....”
난 자연스레 아내가 안고 있던 포대기를 받았다. 아들 녀석이 졸린지 꿈지럭거리면서 하품한다.
입술을 비집고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이가 날로 무거워지는군. 슬슬 유모를 둬야겠소.”
“아직은 괜찮아요. 제가 힘 센 거 상공도 잘 아시잖아요?”
알통을 만드는 시늉을 하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와 정원을 거닐었다.
밤바람이 불었지만 계절이 여름이라 그런지 오히려 시원했다. 벌레만 좀 없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둘, 아니 아들까지 합쳐 셋만 있게 되자 서로를 대하는 말투가 자연히 편해졌다.
“가끔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져.”
“응?”
“너랑 만나고,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나는 관직에 진출해서 학사가 되었잖냐.”
“흐응,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시원한 바람을 폐부 깊이 들이쉬며 기지개를 켠 아내가 예쁘게 웃으며 날 돌아봤다.
“당신이 나를 구해주지 않았으면 난 죽었을 거야. 부상을 입은 채 이름 모를 산에서 객사했겠지.”
“....”
아내는 무림인이었다.
회시를 보러 북경으로 가는 중에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그녀를 발견했고, 그 길로 의원까지 업고 갔다.
평생 단련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응급처치까지 하고 산길을 주파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어쨌든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수이고, 살문을 배신했기 때문에 같이 있으면 위험할 거라 말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거니와, 며칠간 함께 다니면서 정이 든 마당.
나는 오히려 그녀를 데리고 북경까지 왔다. 살수들이라 해도 감히 황성에 오지는 못할 거라 설득하면서.
실제로 그동안 우리는 평온을 누렸다.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낳을 때까지 살수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가끔식 불안해하는 아내를 볼 때면 나도 덩달아 두려워졌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 믿는다.
* * *
자던 중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옆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내가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엔 작은 침대에 누운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잘 자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방을 나섰다.
감각이 예민한 아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여보...?”
“자고 있어. 난 바람 좀 쐬고 올게.”
늦게까지 일하면서 피곤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왠지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는 느낌.
맑은 공기를 마시면 좀 나아질까 싶어 침의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몸이 멈칫 굳어졌다.
희미하긴 하지만 이건 분명....
“피냄새?”
아내가 있는 침실을 돌아봤다. 아무리 방에 있다고 해도 그녀쯤 되는 고수가 피냄새를 못 맡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부르는 것보다 시커먼 복면을 걸친 놈들이 담을 넘어오는 게 빨랐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피가 땅을 점점이 물들인다.
“이런. 집주인께서 마중 나오셨군.”
“...너흰 뭐냐?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감히...!”
“어디긴 어디야. 배신자 칠호의 집이지. 요새는 백서희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던가?”
“...!”
아내의 정체를 알고 왔다. 아내가 염려한 대로 살수들이 기어이 황성의 성벽을 넘은 것이다.
“관리의 집에 쳐들어오다니 정신 나갔군. 흑접이 막나간다고 하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우리에 대해 잘 아는군.”
“칠호가 알려줬겠지. 배신을 하면 원래 금제로 죽는데 그년은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모르겠어.”
놈들이 멋대로 떠드는 동안 더 많은 살수들이 월동문과 담을 넘어 내원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게, 가복들을 죽이고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당황한 건 따로 있었다.
‘왜 향기롭게 느껴지지?’
이만한 피비린내라면 구역질이 나야 정상이다. 한데 이름난 명주의 향처럼 감미롭기만 했다.
“너희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뭔 헛소리지?”
다른 살수들과 달리 복면을 쓰지 않은 장발의 청년.
머리를 가리는 흑립을 검두로 살짝 들어올린 그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칠호 그년의 정체를 알면서도 정을 통했다니 어이가 없군. 멍청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지.”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살수들이 시퍼런 검을 늘어뜨린 채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난 전력을 다해 외쳤다.
“서희, 도망-! 커억!”
“시끄럽다.”
말을 끝나기도 전에 들이닥친 칼날. 살수들이 나를 지나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에서 피가 간헐적으로 쏟아진다.
“쯧쯧, 이 순진한 친구야.”
어느새 내 앞에 쪼그려앉은 흑립 사내가 피웅덩이에 손가락을 찍으면서 날 비웃었다.
내 머리채를 들어 강제로 쥐어올린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잘 벼린 칼날처럼 섬뜩했다.
“그러게 낄 데 못 낄 데 구분을 해야지. 한낱 관인 나부랭이가 어딜 무림의 일에 끼어드나? 살려주고 싶어도 우리 정체를 알아서 못 살려주겠네.”
“컥, 이거... 놔라.”
“안 돼. 저걸 봐야지.”
놈이 내 턱을 붙잡고 강제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 강엽!”
“으아아아앙...!”
살수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었는지 피를 흘리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수들에게 끌려온 아내가 내 옆에 무릎 꿇고, 아들은 다른 살수의 손에 붙들려 시끄럽게 울고 있다.
아내가 악다구니를 썼다.
“팔호, 이 사람들은 놔줘! 나만 죽이면 되잖아!”
“늦었다. 우리 정체를 알고 있지 않나.”
“...제발 아이는 살려주시오.”
흑립인의 말대로 이들의 정체를 아는 이상 나와 아내가 살아날 가망성은 없었다.
나는 옆드려 빌며 애원했다.
“쿨럭, 우리 아들은... 죄가 없지 않소. 우리는 죽여도 제발 그 아이만은...!”
“흐음, 어떻게 할까.”
턱을 매만지며 고민한 흑립인이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데려가지.”
“팔호님?”
다른 살수들이 놀란 듯 바라보자 흑립인은 어깨를 으쓱 추어보이면서 대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그냥 살려준다는 뜻은 아니니까. 칠호의 아들이라면 살수로서 재능이 있을 거 아니냐?”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뇌하기도 좋지. 부모의 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거다. 어때, 너희도 만족하지?”
마지막 질문은 나와 아내에게 하는 것이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데, 한 살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근데 이대로 떠나기는 아쉽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칠호년이 반반한데....”
아내를 보는 살수들의 눈빛에 음욕이 번들거린다.
흠칫 놀란 아내가 나와 팔호를 번갈아보고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 순간 흑립인의 손이 까딱였다.
촤아악!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내는 나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 안해....’
힘겹게 마지막 숨을 내쉰 그녀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망막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아, 아아....”
“쯧쯧, 멍청한 자식들아.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거냐? 속히 빠져나가지 않으면 우리 다 죽는다.”
흑립인이 나를 돌아보며 조소했다.
“자네는 그냥 둬도 죽겠지. 마지막까지 무력감을 곱씹으며 죽게나.”
마지막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는 내 아들과 살수들을 데리고 집에서 떠났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한 아내를 향해 비척비척 기어갔다. 그녀를 품에 안고, 눈을 감겨주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허어, 이 무슨 참람한 흉사란 말인가.”
저승사자는 찾아오지 않고, 백발을 기른 자그마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월동문을 넘어왔다.
나와 아내를 발견한 그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서둘러 걸어왔다.
“이런, 한발 늦고 말았구나.”
“쿨럭! 노인장은...?”
“지나가던 과객일세. 집에서 피냄새가 진동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건만 늦었군.”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환단을 꺼내 건넸다.
“됐습니다. 전 이미....”
“혹시 아들을 빼앗기지 않았나?”
“그, 그걸 어찌?”
“아까 웬 복면인들이 지붕을 타고 넘는 걸 봤네. 선두를 달리던 흑립인의 품에 웬 갓난아기가 있더군. 그게 자네 아들이었을 줄이야.”
분위기를 보건대 노인은 무림의 기인이사인 것 같았다. 그런 이가 왜 황성에 온 걸까.
의문이 앞섰지만 노인의 질문이 더 빨랐다.
“아들을 구하고 싶지 않나?”
“...!”
“노부는 무인이 아니네. 하나 유구한 술맥을 이은 전승자로서 오래전부터 제자를 찾고 있었지. 내 술법을 익히면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게야.”
“어, 어째서 제게 그런 기회를....”
“연을 느꼈다고 해둠세. 일단 이 구명환부터 먹게나. 살아야 복수를 하든, 아들을 구하든 할 게 아닌가?”
귀신에 홀린 듯이 노인이 내민 단환을 받았다.
생긴 건 평범했으나 영험한 기운이 있는 것처럼 자꾸만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단환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쿠구구구구궁...!
돌연 정원이 흔들리면서 거대한 핏빛 줄기가 땅을 뚫고 자라났다.
“이게 뭔...!”
노인이 뭘 할 새도 없이 붉은 나무가 정원을 장악한 가운데 내가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노인을 담담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시간이 된 모양이군.”
“뭐, 뭣?”
“환야진서. 당신이 남긴 비급을 읽었을 때 알았다. 당신의 술맥은 환술에 기반을 뒀다는 걸.”
“너..! 어떻게...!”
“그러면 심상법 역시 환술일 가능성이 크겠지. 그게 어떤 형태로 날 사로잡을지 궁금했다.”
“네놈, 설마 일부러 노부의 심상법에 당한 거냐?”
“아무렴 내가 당신에게 속아넘어가려고. 당신이 전성기 시절에 심상법을 펼쳤어도 통할까 말까 한데.”
영락한 의념으로서 심법진에 기생한 환신은 생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열등한 존재.
기껏 펼친 심상법도 어설프기만 했다.
“그러니까 심법진 따위에 깨지는 거다.”
“이런...!”
그제서야 내가 어떤 수로 심상법의 영향에서 벗어난지 깨달은 환신이 탄식했다.
“모든 술법을 무위로 돌리는 심법진이라니... 술사 자신의 목숨을 조르는 짓을!”
“천생 술사인 당신은 하지 않을 짓이지.”
환신이 펼친 심법진과 충돌하느라 처음부터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혈라지망이 발동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환신의 심상법이 완전했다면 제아무리 혈라지망이어도 먹히지 않았겠지.
그러나 놈의 심상법은 조악했다. 비유하면 옷 구실도 못하는 넝마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마침 환술은 나도 꽤 자신 있는 분야지. 딱히 당신에게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왼쪽의 눈이 마안을 개방하자 환신이 만든 심상법의 환상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일어났다.
“왜, 왜 그런 짓을....”
“이 정도로 어설프면 들여다보기도 쉽거든.”
정안까지 개방해서 심상법을 파헤친다.
심법진과 심상법, 둘의 차이를 면밀히 비교하고 파훼하여 심상의 본질에 도달.
그렇게 얻은 깨달음의 정수는 고스란히 혈라지망에 영향을 끼치면서 새로운 형태를 낳았다.
‘진조와 유익의 심상법은 마안으로도 파훼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술법의 근원이자 이상향.
호신강기였을 때와 심법진이었을 때는 상반된 공능을 보였지만 방향성이 달라진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면을 보여주었을 뿐.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술법을 금하는 심법진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이런 심상법이 있을 리가...!”
“당신에겐 감사해야겠지. 덕분에 벽을 넘었어.”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진 노인을 검지로 겨누면서 나는 이제 막 태동한 심상법을 발동시켰다.
-심상법 혈라지망.
이 세상 모든 술법을 파훼하고 장악하는 심상법.
콰아아아아앙!
산산이 조각난 환신의 심상법이, 양눈의 정마안을 통해 흘러들어오며 내면의 심상에서 새롭게 수렴된다.
-끄으으아아아악!
깨져나간 풍경 속에서 사멸되는 환신의 의념. 가엾은 노인이 호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진실을 말해주었다.
“당신의 술맥은 심상의 형태로 내 안에 있다. 당신은 바랐던 대로 전인을 남긴 셈이야.”
그러니 기뻐해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환신의 의념을 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