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58화 (352/450)

71화. 부활 (2)

“일월신교주라니...!”

빙오선은 불신하는 기색이었다.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마인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강엽은 그 의문에 즉답하기보다는 빙궁주의 안에 있는 심상을 느끼며 그를 노려보았다.

‘역용술 따위는 아니야. 육신은 빙궁주가 맞다.’

일월신교주라면 일월신마공을 익혔을 텐데, 빙궁주의 기도는 한없이 음기에 치우쳐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에 일월신마공의 심상으로 여겨지는 기운이 들어있다는 건....

“그렇군.”

정안으로 빙궁주를 살핀 강엽은 비로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섭혼술을 썼나?”

“....”

“내상을 입었어도 빙궁주쯤 되는 사람이 섭혼술에 쉬이 당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심상의 조각을 심어 빙궁주의 정신을 흔들고, 그 틈에 섭혼술을 썼다면....”

너무 미세해서 늦게 발견했다.

빙궁주의 정수리에서 흘러나온 얇디 얇은 실.

바닥을 따라 흘러가며 거대한 뼈무덤과 이어진 실이 빙궁주와 심령으로 연결된 존재를 암시했다.

푸른 광채를 내뿜는 정안을 본 빙궁주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꽤나 신묘한 재주를 지녔구만.”

“숨기는 건 의미 없다.”

쿠구구구구궁......!

발을 들어올려 진각을 밟자 무형의 기파가 동공을 거세게 흔들었다.

뼈무덤마저 출렁거릴 정도로 거센 진동에 빙궁주가 침중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실로 패도적인 보법이군.”

술법진이 일격에 박살나고, 짓이겨진 파편이 팔사도의 피와 함께 튄다.

그 피에 혈공진기의 의념을 실은 강엽이 빙궁주를 가리켰다.

-혈뢰옥.

허공에 떠오른 핏빛 구슬들이 소나기처럼 쏘아진다.

빙오선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이보게, 강 무사...!”

상대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대뜸 공격부터 하다니?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강엽이 만든 핏빛 구슬들은 빙궁주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빙벽을 만든 빙궁주가 뒤늦게 진상을 깨닫고 혀를 차는 순간.

콰과과과과과광!

뼈무덤을 친 핏빛 구슬들이 장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숨겨진 존재를 드러냈다.

빙오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건...!”

얼음 안에서 가부좌를 튼 노인.

등은 곱사등이처럼 구부정하며, 주름은 깊다 못해 흘러내릴 만큼 추레한 몰골.

하지만 흑백이 뒤바뀐 눈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섬뜩한 살광을 발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가둔 건가?”

얼음에 갇힌 일월신교주를 보고서야 강엽은 그가 지난 수십 년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진작에 천수를 다했어야 했는데, 스스로를 얼려서 가사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일종의 귀식대법이니라.”

뒷짐을 진 빙궁주가 말했다.

“과거 본좌는 주화입마에 빠져 이성을 잃었다. 빙궁의 얼음귀신들이 본좌를 막기 위해 싸웠을 땐 정신이 잠깐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찰나처럼 짧았지.”

짓궂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버리고,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신세를 늘어놓는다.

아마 이 모습이야말로 빙궁주, 아니 일월신교주의 진면목이 아닐까.

“그럼 적당히 피를 보면 물러났던 것도...?”

“그래야 놈들이 다음에도 오지 않겠느냐? 놈들과 싸워야 정신이 돌아오는데 굳이 몰살시킬 필요는 없지. 그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이다.”

과거의 비사를 들었을 때 가장 의아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였다.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자가 어째서 빙궁을 몰살시키지 않는가?

“적당히 피를 보면 만족해서가 아니었군.”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지.”

강엽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진실을 깨달은 빙오선은 부들부들 떨었다.

“서, 선조들께선 목숨을 걸고 싸우셨거늘...!”

“덕분에 본좌는 간간이 깨어나서 부활할 계획을 착실히 세웠지. 그들의 희생에 감사한다.”

“이익! 이놈! 닥치지 못하겠느냐!”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군. 그땐 꽃다운 나이였지. 주저앉은 채 실금을 흘리는 꼴이 제법 볼 만했다.”

빙궁주의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지독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일월신교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본좌가 부활하려면 제물이 필요했다. 빙정의 원념에 이끌려 천하제일의 음기를 취했으나, 음양의 균형을 맞추려면 그 못지않은 기운이 있어야 했지.”

“그래서 팔사도를 노린 건가?”

팔사도가 타고난 태양지체. 강엽조차 상극이라 여길 만큼 강대한 열양지기라면 빙정에 필적할 터.

“그래, 원래는 낭왕이라는 놈을 노렸지만 말이다.”

만약 일월신교주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낭왕은 이미 황천길을 거닐고 있었으리라.

“광명마교의 개입은 본좌도 예상치 못했으나, 위기는 곧 기회인 법. 이는 다시 없을 호재였다.”

태양지체의 열양지기는 절세고수의 진기를 웃도니 제물로 삼으면 음양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터.

“만약 팔사도도 없고 낭왕도 없었다면...?”

“그럼 빙궁과 도시 주민들 전체를 제물로 삼았겠지. 어느 쪽이든 본좌는 부활할 운명이었다.”

팔사도가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녀가 광명마교를 이끌고 빙궁에 와서 끼친 폐해는 실로 엄청났지만, 덕분에 일월신교주가 목표를 바꾸었으니 세상일은 참 모를 일이었다.

“철저히 준비하면 근심할 게 없지. 이놈의 몸을 장악한 이후로 본좌는 광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광명마교의 잡졸들은 본좌를 봉인했다고 좋아했지만, 놈들은 본좌의 저력을 너무 우습게 봤어.”

빙궁주의 입을 빌려 말한 일월신교주가 한 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쩌저저저적......!

일월신교주의 본체를 보호한 얼음덩이.

위에서부터 일어난 균열이 바닥까지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강엽이 나서려고 했으나 빙궁주의 몸을 차지한 일월신교주가 즉시 앞을 가로막았다.

“너희는 본좌를 막지 못한다.”

“흐아압!”

그건 강엽의 기합이 아니었다. 일월신교주의 신경이 강엽에게 쏠린 사이 빙오선이 몸을 날린 것이다.

관절을 굽히지도 않은 채 그대로 쭉 올라간 그녀는 한순간에 거대한 마수의 두개골 위에 올라왔다.

그 위에서 가부좌를 튼 노인을 향해 내치는 일장.

쿠르르릉!

절세고수의 장력이 균열이 간 얼음을 박살낸다.

일월신교주의 골통을 박살내기 위해 지팡이를 휘두르는 찰나.

“본좌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느냐.”

무릎 위에 올라간 손이 벼락처럼 그녀의 지팡이를 낚아채서 허공에 고정시켰다.

흑백이 뒤바뀐 안구가 눈웃음을 지었다.

“너희로는 본좌를 막지 못한다고 했을 텐데.”

“이노옴...!”

졸지에 공수탈백인의 수치를 당한 빙오선이 표정을 와락 찌푸리면서 족격을 날렸다.

그러나 일월신교주는 느긋하게 반대쪽의 손을 들어 뾰족한 가죽신을 잡아챌 뿐.

단 두 수로 빙오선을 제압한 일월신교주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심상지경에 이르지도 못한 주제에.”

발목을 낚아채서 크게 휘두르는 모습.

뭘 어찌할 새도 없이 제압당한 빙오선은 그대로 날아가서 동굴의 수정벽과 부딪쳤다.

콰아아앙!

“커억!”

호신강기를 둘렀어도 깊이 들어오는 충격에 그녀는 벽에 박힌 채 피를 왈칵 토했다.

“이제 본좌는 완벽해졌다.”

“글쎄.”

목소리는 뒤에서 울렸다.

일월신교주가 본체를 움직이는 틈을 타서 빙궁주를 기절시킨 강엽이 마수의 두개골 위에 올라온 것.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전개된 심상절예가 일월신교주를 쳤다.

-......!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이지러지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두 사람을 강타했다.

일순 새하얗게 타올랐던 시야는 한참이 지나서야 원래대로 돌아오며 귓가에 이명을 일으켰다.

직후 우레같은 광소가 동공을 떨쳐 울렸다.

“으하하! 놀랍구나! 새파랗게 젊은 놈이 심상지경이라니!”

허공을 밟듯 떠오른 일월신교주가 메마른 입가를 귀밑까지 찢으면서 손을 털었다. 검결지를 따라 일어난 심검으로 무광암을 받아친 것이다.

조금 밀려나긴 했지만 상처는 없는 모습에 강엽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월신교주의 심검과 부딪쳤을 때 손아귀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흠, 피냄새가 독특하군. 게다가....”

강엽의 상처가 절로 아무는 광경을 지켜본 일월신교주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재생의 공능까지. 네놈 백도의 위선자는 아니구나. 하긴 모산파의 술법을 익힌 놈이니 오죽할까. 이쯤 되면 네놈의 연원이 궁금해질 지경이다.”

“생각보다 말이 많군.”

“큭큭, 이해하거라. 다른 이와 말을 나눠본 건 수십 년 만이니라. 열심히 입을 움직여서 재활해야지.”

“난 듣기 싫은데.”

격공으로 일월신교주를 견제하는 사이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허공에서 뒷짐을 진 채 격공을 막은 일월신교주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음한지기의 영약인가?”

보은패를 대가로 빙오선에게 받은 물건.

그건 빙정의 기운을 흡수할 수 없는 방계 혈족들과 무사들을 위해 구비한 영단이었다.

빙정만은 못하지만 귀한 약재들이 들어간 만큼 상당한 음한지기를 품은 비약.

목함에 있는 영단 세 알을 짓씹어 삼킨 강엽이 숨을 고르는 모습에 일월신교주가 어이없어했다.

“그러면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지도 못할 텐데?”

“후우...!”

대답 대신 싸늘한 숨을 토해낸 강엽이 양손의 손등에 새겨진 힘에 집중했다.

양 손등에서 하얀 불꽃과 냉기가 쏟아져나오자 일월신교주의 흑백안이 꿈틀거렸다.

“네놈...?”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껏 일부러 쓰지 않았던 뇌기가 올올이 풀려나면서 산발적으로 강엽을 감싸고 돌았다.

‘영약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싸우진 못했겠지.’

줄곧 억눌려 있다가 한번에 튀어나온 뇌기와 열양지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었다.

잠시 지켜본 일월신교주가 침중하게 물었다.

“...네놈이 본교의 독문신공을 어찌 아는 게냐? 본좌는 누구에게도 가르쳐준 적이 없거늘.”

강엽은 대답 대신 출수했고, 일월신교주는 날랜 경신술로 공격을 피하고 하늘로 올라섰다.

“말하지 않겠다면 좋다. 힘으로 알아내마!”

우드득! 뿌드드드득!

벽력같은 일성과 함께 일월신교주의 몸에서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굽혀졌다.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낀 강엽이 심상절예를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뼈만 남은 마수의 두개골.

살점 한 조각 남지 않은 새하얀 이무기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 * *

“시체가 일어선다?”

그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시귀와 강시, 망자 등 상리를 벗어난 괴물들과 싸워본 경험 덕에 어지간한 괴이는 내성이 쌓였으니까.

하지만 근육은커녕 관절과 신경도 없는 뼈가 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파시식!

거대한 뼈가 포효하자 구렁이의 영체를 봉인한 부적이 가루가 되며 희끄무레한 연기가 풀려나왔다.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근원으로 돌아간 영체의 모습에 강엽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군. 교주가 하필이면 여길 고른 게....’

거대한 이무기의 뼈를 둘러싼 반투명한 형상.

일월신교주가 씹어삼킨 빙정의 원념과 본래의 원념이 합쳐져서 마수가 눈을 뜬 것이다.

농밀한 영체로 근육과 신경 등 몸을 움직이기 위한 조직을 대체하여, 거대한 동체를 일으킨다.

비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

어느 샌가 대등한 눈높이까지 치솟은 이무기가, 강엽을 삼키기 위해 쇄도하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구만.

내심 혀를 차며 중얼거린 강엽은 심검을 높게 치켜들고, 일도양단의 기세로 힘차게 내리그었다.

찰나 수십 장에 이른 장대한 참격이 이무기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

한 수에 몸이 반파된 이무기가 통째로 넘어가며 동공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놈은 죽지 않았다.

온몸을 비틀고 괴로워할지언정 끈질기게 살아남아 강엽을 상대로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심검을 맞고 살아남았다고?’

심상절예는 내공의 소모가 극심하기에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심검에 베였으니 죽을 거라 생각했다.

절세고수가 맞았어도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텐데.

[녀석은 생전에 이 땅을 지배한 대마수였다.]

강엽의 예상을 비웃듯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전성.

이무기가 강엽을 상대하는 사이 눈부신 휘광에 감싸인 일월신교주가, 마침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사방에 쩌적 금이 가며 빛의 파편이 흩날린다.

길쭉한 팔다리를 지닌 탄탄한 근육질의 사내.

신령스러운 은발을 뒤로 넘긴 수려한 사내가, 광오한 눈길로 강엽을 굽어보고 있다.

[초대 빙궁주가 이놈을 잡았을 때 괜히 백 일이나 걸린 게 아니지. 승천을 눈앞에 뒀으니 오죽할까. 지금도 생명력 하나만큼은 질기다.]

사내의 손짓에 이무기가 신하를 자처하듯 두개골을 숙이며 그를 떠받든다.

익숙하게 이무기 위에 올라탄 사내가 강엽과 빙궁주, 빙오선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싸움은 지상에서 이어가자꾸나. 선배된 도리로 네게 진정한 일월신마공을 보여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