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부활 (3)
쿵...! 쿠웅...!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진동.
멀리 떨어진 자들도 알 수밖에 없을 만큼 커다란 진동이 주기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대피는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이제 절반이 빠져나갔습니다.”
“겨우?”
야율산산이 침음했다.
강엽의 충고대로 진동이 더 심해지기 전에 대피시켰지만 시간의 한계에 부딪쳤다.
“소, 송구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는 무인의 모습에 야율산산과 함께 있는 궁주 부인이 딸을 나무랐다.
“이보다 더 빨리 갈 순 없잖니. 가뜩이나 궁인들을 업으면서 나가는데.”
그녀의 말대로 무인들은 시비나 하인 등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이들을 업으면서 대피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시의 주민들까지 대피시켜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그건 알아요. 하지만....”
야율산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닥친다면 피신이 늦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테니까.
“엄마도 얼른 피하세요.”
“딸이 여기 있는데 가긴 어딜 가.”
“엄마!”
“그만. 지아비와 자식을 두고 가는 어미는 없다.”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도 희게 질린 채 어깨가 가늘게 떨렸지만, 딸을 두고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때 모녀의 옆에 거구가 뚝 떨어졌다.
“누구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무인들이 칼자루를 잡았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본 야율산산이 손을 들어 막았다.
“낭왕 어르신!”
“아직 피하지 않았구나.”
옷 여기저기가 찢겼고 피가 묻는 행색.
야율산산은 아설하의 보고로 낭왕이 강적과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르신, 그자는 어떻게....”
“음.”
대답은 없었지만 야율산산은 낮게 깔린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었다.
낭왕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여간 까다로운 놈이 아니더구나. 그놈도 나와 끝까지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고.”
이번의 괴뢰마는 삼화취정을 이루었다.
그런 주제에 정면대결을 꺼려하고 시간을 질질 끌며 말려죽이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결국 싸움을 포기한 낭왕은 놈의 분신들을 쓰러트린 걸로 만족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데 여긴 어떻게 된 거냐?”
“아래쪽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요.”
그녀는 강엽과 빙오선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빙궁의 지하에 있는 동굴로 갔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일단 강 공자의 조언대로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나마 빙궁의 사람들에겐 그녀의 명령이 먹혔지만, 도시의 주민들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진동에 두려움에 떨면서도 과연 도시 바깥으로 떠나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것이다.
사정을 들은 낭왕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글쎄, 이해는 할 수 있다만... 윽박질러서라도 피신시키는 게 좋겠다. 자칫하면 다 죽어.”
“안 그래도 그리 일러두었어요.”
물론 이러고서 아무 일도 없다면 멋쩍겠지만, 시기를 놓쳐 사람들이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그럼 너는 왜 밍기적거리냐?”
“전부 다 피하기 전엔....”
궁주가 없는 지금 명령을 내릴 사람은 야율산산밖에 없으니 마땅히 그녀가 남아야 했다.
낭왕이 궁주 부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딸을 두고 갈 순 없어요.”
“그렇군. 하나 야율 부인부터 피하셔야 유사시에 소궁주도 몸을 뺄 수 있지 않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소궁주는 발이 날래서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소. 하나 야율 부인께선 무공을 모르시지 않소?”
물론 무인들이 그녀를 업고 달릴 수도 있겠지만, 쫓길 땐 가벼운 깃털도 무겁게 느껴지는 법.
“만약의 경우엔 내가 소궁주를 데리고 빠져나가겠소. 그러니 야율 부인께선 먼저 피하시는 게 좋겠구려.”
“그렇게 하세요.”
야율산산까지 거들자 궁주 부인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가족을 두고 어찌 발걸음을 돌릴까.
그러나 낭왕이 그녀부터 피신해야 야율산산도 도망칠 수 있다고 하니 폐를 끼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떠나지 않은 주민들을 독려해주시오. 야율 부인께서 설득하신다면 주민들도 따를 것이오.”
“휴, 알겠습니다. 당부하신 대로 하겠어요.”
잠시 야율산산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딸이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안색을 흐렸다.
야율산산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금방 따라갈게요.”
“...조심하렴.”
그렇게 무인들이 궁주 부인을 호위하며 장내를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앞으로 시선을 던진 야율산산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무사하시겠죠?”
어머니와 무인들 앞에선 의연한 척했지만 그녀는 아직 방년에 불과한 소녀였다.
두려움에 짓눌릴 것 같았으나 소궁주의 책임감으로 억지로 버텼을 뿐.
쿠구구구구궁...!
진동이 울릴 때마다 평생의 추억이 어린 거처가, 어릴 적 새둥지를 보겠다고 올랐던 나무가 흔들린다.
낭왕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녀석이라면 성공할 게다.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녀석이니까 말이다.”
* * *
이무기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겠다는 선언.
강엽이 무어라 하기 전에 일월신교주가 흑백이 반전된 눈을 둥글게 휘며 손가락을 뻗었다.
검결지에 맺힌 탁한 잿빛의 삼매진화가 일순 거대한 구체로 화한다.
[걱정하지 말거라. 도망치진 않으니까.]
장정의 몸집만한 거대한 강구가 손톱 끝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구친다.
‘이런...!’
직접 공격하는 대신 천장을 부수는 선택.
만약 강엽을 공격했다면 심검으로 베거나 피하는 식으로 대응했겠지만, 이번엔 제대로 허를 찔렸다.
쿠르르르르릉... 콰아아앙!
영겁의 세월 동안 지반을 떠받친 천장도 절대고수의 한 수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장대한 폭음과 함께 쏟아져내리는 파편의 소나기. 사람 하나는 가뿐히 짓이길 종유석과 바윗덩이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호신강기를 펼쳐 낙석을 부순 일월신교주가 조소를 흘리는 사이, 강엽은 지체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시기를 놓쳤다간 정신을 잃은 빙궁주는 물론이고, 내상을 입은 빙오선도 매몰될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상황을 지켜보던 빙오선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나, 난 됐으니 궁주부터...!”
강엽은 듣지 않았다. 피를 게워내는 그녀를 옆구리에 끼자마자 어검술로 지팡이를 조종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거리가 꽤 멀었기에 직접 움직이기엔 여의치 않은 상황.
‘내가 가면 너무 늦어.’
빛살처럼 허공을 가른 지팡이가 바닥에 엎어진 빙궁주의 위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콰콰콰콰콰쾅!
어검술을 이용한 검막. 빙궁주의 몸 위에서 뜬금없이 치솟은 용오름이 낙석을 산산이 분쇄한다.
위로 솟구치면서 그 광경을 지켜본 일월신교주는 냉소가 듬뿍 담긴 전성을 뿌렸다.
[그럼 먼저 올라가보마. 조금 천천히 따라오거라. 의관을 갖추고 기다릴 테니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걸 방증하듯 귓가를 파고드는 전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무기의 무지막지한 덩치를 감안해도 천장까지 닿기엔 역부족일 터.
그러나 만물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듯 이무기는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우오오오오오!
수백 년 만에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을 자축하듯 이무기는 아가리를 벌려 포효했다.
자연히 낙석이 아가리로 떨어졌지만, 이무기가 턱을 다물자 잘게 쪼개진 부스러기가 됐다.
[하하하하하하!]
동공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광소를 터뜨린 일월신교주는 그렇게 나갔다.
그동안 빙오선을 낀 채 빙궁주의 지척에 온 강엽은 땅을 굴러 혈목을 불러냈다.
연이은 격전으로 두 번이나 심상절예를 쓴 마당.
암만 내공이 심후해도 이만큼 무리하면 피로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후의 싸움을 생각하면 어검술을 쓰는 것도 자제해야 하리라.
‘혈목을 짠다면 내공을 안 써도 살아남을 수 있....’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강엽은 혈목의 줄기에 딸려나온 인영을 보고 멈칫했다.
정신을 잃고 축 처진 금발의 여인.
정작 강엽은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팔사도를 혈목이 챙겨온 것이다.
칭찬을 바라듯 끝부분을 까딱하는 혈목의 모습에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쓰다듬어줬다.
“그래, 잘했다. 이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켜줘라.”
끼리릭!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가리를 까딱인 혈목이 좌우로 줄기를 뻗치며 네 사람을 감쌌다.
유일하게 정신줄을 붙잡은 빙오선만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냈다.
“허어, 이런 괴이가....”
“여기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구멍이 닫히기 전에 그녀의 지팡이를 회수한 강엽이 돌려주며 말했다.
“운기를 하는 동안 호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운기를 하겠다고?”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빙오선이었지만 강엽은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반개하며 호흡을 고른다.
바깥에서 떨어지는 파편이 혈목을 건드리든 말든 운기에 여념이 없는 초탈한 태도.
반쯤 입을 벌린 얼굴로 망연히 바라보던 빙오선은 이내 현실을 깨닫고 짙은 쓴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없는데도 굳이 운기를 한다는 건 강엽의 단전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뜻. 반면 일월신교주는 얼마나 강한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물론 이무기와 함께 지상으로 가려면 좁은 입구를 부숴야 할 테니 그 역시 적잖은 내공을 소모하겠지.
하지만 그에겐 빙정과 태양지체의 피에서 갈취한 무지막지한 내공이 있었다. 그 힘으로 반로환동과 환골탈태를 이뤘으니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렇게 여삼추 같은 한식경이 흘렀을 때.
“깬 것 알고 있네.”
“....”
“대답하지 않겠다면 기습을 할 용의가 있는 걸로 간주하지. 셋을 셀 때까지-”
“쳇.”
노골적으로 혀 차는 시늉을 하는 인영.
안색이 부쩍 수척해진 팔사도가 비스듬히 상반신을 일으키며 빙오선의 노안을 노려봤다.
빙오선 역시 기가 차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도 참 질기구먼. 그쯤 피를 흘렸으면 진작에 삼도천을 건넜을 터인데.”
“...그래서 아쉬운가요?”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빈정거린 팔사도가 여전히 정신을 잃은 빙궁주를 흘깃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죽이지 그래요?”
“죽어서 몽상정토로 가려고?”
“...!”
“암, 나도 알고 있네. 자네가 공공연히 말을 흘린 덕분이지.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순교하면 낙원에서 살 수 있다고 배신자들을 꾀어내지 않았나?”
물론 그 말을 진짜로 믿는 이들은 없었다.
광명마교가 배신자들을 꾀어낸 비결은 사후의 보장이 아니라 당장의 안위였다.
“...수십 년 전부터 궁주님들과 가신들은 일월신교주와의 싸움에서 희생하셨지. 궁주님들도 내상을 입어 천수를 누리지 못하셨고, 가신들은 무수히 죽었네.”
피붙이와 사부를 잃은 이들은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죽고, 후손들에게 그 운명을 대물림할 것을 알았다.
빙궁의 가신은 궁주를 보필하며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궁주와 함께 죽을 사람.
그렇기에 광명마교가 은밀히 접근하여 해법을 제시했을 때부터 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광명마교를 도우면 본궁의 강호 진출을 돕겠다고 했던가? 참 허무맹랑한 소리인데 그딴 말에 낚인 자들이 있다는 게 착잡하더군.”
광명마교의 도움을 받아 강호에 진출한들 그때는 이미 무림이 광명마교에 복속된 뒤겠지.
반대로 광명마교가 대계에 실패한다면 약속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만큼 열망했다는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힘겹게 대답한 팔사도가 빙오선을 응시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척박한 이 땅을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강호에서 살기를.”
안온한 삶을 미끼로 던져주며 몇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빙궁을 잠식했던 것이다.
“저 빌어먹을 작자 때문에 그르쳤지만.”
운기 삼매경에 빠진 강엽을 흘겨본 팔사도가 금발을 쓸어올리며 구시렁거렸다.
워낙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머리가 핑 돌았지만, 강엽의 치료가 세심했던 덕에 고비는 넘겼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정신을 못 차렸나요?”
“으음....”
어째 피를 많이 흘렸던 팔사도보다도 뒷목을 맞고 기절한 빙궁주가 깨어나는 게 더 늦었다.
“...섭혼술에 당했으니 어쩔 수 없지.”
섭혼술이 풀렸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정신을 잃은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착잡하게 중얼거린 빙오선이 입을 다물자 팔사도도 말이 없어졌다. 빙오선의 신경을 긁으려고 해도 그녀가 따라주질 않으니 김이 샌 것이다.
그 순간, 강엽의 눈꺼풀이 들리면서 핏빛 안광이 스쳐지나갔다.
눈이 마주친 팔사도가 마른침을 삼키면서 주춤거렸을 때.
“움직여라, 혈목.”
끼이익-!
강엽의 말뜻을 헤아린 혈목이 바깥을 향해 줄기를 엮었다.
거미의 그것처럼 관절이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네 쌍의 절지(節肢).
그것을 이용해 파편들을 기어오르거나 틈새를 쑥 통과하며 위를 향해 올라간다.
“.......”
안쪽에선 바깥 정경이 보이지 않지만, 절세고수답게 기감으로 헤아린 두 여인은 눈을 끔뻑였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방금 전까지 기싸움을 했던 사실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