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부활 (1)
빙궁과 도시가 때 아닌 격동으로 부산스러운 가운데.
강엽은 야율산산에게 대피를 맡겨놓고, 빙오선이 가져온 물건을 챙겨 그녀와 함께 나섰다.
도중에 아설하가 복귀하여 괴뢰마의 분신들 중 세 명이 도주했음을 보고하며 자책했지만, 야율산산은 그녀를 문책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한 사람의 전력이 아쉬운 판국이었다.
‘놈들은 팔사도를 찾으러 왔겠지.’
팔사도가 빙궁주를 납치한 건지, 아니면 빙궁주가 그녀를 데려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가 동굴에 있는 이상 괴뢰마의 분신들이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쿠구구구구궁......!
그 와중에도 땅이 흔들리며 지붕에서 돌조각이 떨어지고, 개와 말 등의 가축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하늘 저편에선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올라 태양빛을 가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림자로 들어간 강엽이 피부를 자극하는 통증이 경감되는 것을 느낄 때였다.
“여기일세.”
전각군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우물.
깊이만 삼 장에 이르렀는데, 진작에 수맥이 말랐는지 습기가 거의 없었다. 바로 근처에 멀쩡한 우물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의아한 일.
“주력이 느껴지는군요. 환영진(幻影陣)입니까?”
“...그걸 한눈에 알아보나?”
기감이 민감한 절세고수는 주력을 느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종류까지 맞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인연이 닿아서 술법을 좀 익혔습니다.”
“허어, 이 년 전에 만났을 땐 자네가 이런 존재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늘....”
고개를 흔든 빙오선이 말했다.
“자네 말대로 이건 환영진일세. 오행 중 수기를 이용한 환영진이지.”
휑하니 드러난 우물의 밑바닥.
정안의 힘으로 진법의 짜임새를 관찰한 강엽은 그 요체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환영만 있는 건 아니군. 암시의 효과도 있어.’
우물에 접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장소를 꺼림칙하게 여겨 발길을 돌리게 하는 암시였다.
물론 이런 암시는 그 요체를 파악한 순간부터 효과가 없기에 강엽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빙오선 역시 마찬가지.
“이대로 가면 되네. 먼저 가지.”
지팡이를 짚은 노구에 어울리지 않게 표홀한 움직임으로 우물 너머로 뛰어드는 그녀였다.
강엽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던지면서 환영진을 통과했다.
돌과 흙으로 막힌 밑바닥이 신기루처럼 몸을 통과시키며 그 안에 숨겼던 진실을 보여준다.
한참을 떨어진 강엽은 별안간 탁 트인 동공에 펼쳐진 절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천장과 벽에 박힌 수많은 수정들이 청록색의 광채를 토하며 어둠 속을 밝히고 있는 게 아닌가?
“허허, 처음 오면 누구나 그리 반응하지. 나도 옛날엔 얼마나 놀랐던지....”
강한 바람을 맞으면서 빙오선이 작게 웃었다.
몇 마디 대화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끝 모를 무저갱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은, 아니 무림인이라도 이만한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심장이 마비되리라.
하나 두 사람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절세고수.
강엽은 물론이고, 빙오선 역시 낙하 지점에 이른 순간 부드럽게 기파를 운용하며 속도를 줄였다.
타탁!
무서운 기세로 떨어진 것치고는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착지한다.
강엽은 희미하게 보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천장단애라고 하더니만.’
흔히 깎아지른 절벽을 천 장 높이의 절벽이라 하여 과장스레 부르지만, 이 경우엔 정말로 천 장쯤은 될 법한 아득한 높이였다.
“나갈 수는 있는 겁니까?”
“있었는데 막아놨지. 능공허도나 어검비행으로 나가야 하네.”
“.......”
강엽이 살짝 떨떠름한 기색으로 바라보자 빙오선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떠올랐다.
“말하지 않았는가. 궁주 외엔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설사 궁주라도 그만한 무공이 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음이야.”
“위험하다는 게 그런 뜻일 줄은 몰랐군요.”
“갇히면 굶어죽으니 당연히 위험하지. 하지만 내가 위험하다고 한 건 높이 때문만은 아닐세.”
“그 말씀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
“...그렇군요.”
강엽도 그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이쪽을 향해 은밀히 다가왔던 것.
쩌저저저적...!
한서불침의 공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오싹한 냉기가 동굴의 수정벽을 새하얗게 얼린다.
-흐으으으...!
귓가를 자극하는 처절한 흐느낌.
빙오선이 혀를 차며 말했다.
“빙정에 대한 건 소궁주에게 들었겠지? 그게 일월신교주의 뱃속에 들어갔다는 것도.”
“대강 들었습니다.”
“하면 빙정의 연원에 대해선 들었나?”
“모릅니다.”
강엽이 고개를 젓자 빙오선이 입맛을 다셨다.
“시간이 없으니 핵심만 말하겠네. 빙정은 어떤 마수(魔獸)의 내단일세. 전설에 의하면 천 년이나 이 땅을 지배한 사악한 영물이라고 하더군.”
빙궁을 개파한 초대 조사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백 일이 넘는 혈투 끝에 마수를 쓰러트렸다.
이후 마수의 가죽을 자르고 내단을 취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지. 그 안에 담긴 원념과 음기가 너무 강해서, 그분께서도 쥐는 게 고작이었네.”
다만 내단이 있는 곳에서 운기를 할 순 있었다.
사람의 몸으로 녹일 수 없다면 세월로 녹일 수밖에.
그렇게 빙정이라 불린 영물의 내단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빙궁의 축복이자 과제가 되었다.
“초대 조사께선 그걸 보물로 남겨주셨으면서도, 언젠가는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지.”
“마수의 원념 때문입니까?”
“아마도.”
어느새 발밑까지 얼린 성에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궁주님께선 빙정의 기운을 흡수할 때마다 분노와 원한이 느껴진다고 하시더군. 심지어 선대 궁주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네.”
쩌저적! 쩌저저저저적...!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문 빙오선이 지팡이를 내려찍자 웅혼한 기파가 움텄다.
절세고수의 경파가 동심원처럼 넓게 퍼져나가며 냉기를 막고, 바깥의 존재를 자극한다.
-키에에에에엑!
“유감스럽게도 마수의 원념은 빙정에만 있지 않았지.”
“.......”
빙오선의 설명은 끝을 고했지만, 강엽은 그녀가 하지 않은 뒷말을 짐작했다.
“일단 여길 벗어나야겠군요.”
빙오선의 경파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날씨 궂은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몰아치면서 냉기가 더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아지랑이처럼 반투명한 구렁이가 움츠러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눈알을 뒤루룩 굴리면서 호시탐탐 빈틈을 엿봤다.
“사람이 망령이 된 건 봤어도 영물이 망령이 된 건 처음이군. 하지만 그래봤자 망령이다.”
“얕보지 말게. 힘으로 제압해도 다시 나오는 놈이야.”
두 사람의 앞에 등장한 희끗한 망령은 허상. 근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그래도 계속 두드리면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여태껏 그래왔....”
빙오선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강엽이 수인을 맺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떨어진 수정들이 규칙적으로 배치됐기 때문이었다.
-강령진율령.
팔사도의 혼백을 잡기 위해 썼던 술법.
정작 목표인 팔사도가 실종된 바람에 재미는 못 봤지만, 지금은 명백히 목표가 존재했다.
-카아아아아아악...!
몸을 배배 꼬며 괴로워하는 기색.
자극을 받은 구렁이가 거칠게 몸을 틀며 반항했지만, 강엽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진언을 외우자 영체가 돌처럼 굳어지며 꿈쩍도 하지 못했다.
-천명율령(天命律令).
-키야아아아악!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것처럼 구렁이의 영체가 강엽의 손에 들린 수정돌에 쏙 들어온다.
상상도 못한 괴사에 빙오선은 턱이 빠질 만큼 놀란 얼굴로 강엽을 돌아보았다.
“...대체 뭘 한 겐가?”
“봉인했습니다.”
술가에서 수정은 진식을 펼치기에 용이한 귀한 광물.
영체가 빨려들어간 수정돌 위로 괴황지 부적을 붙인 강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부적을 떼기 전까진 못 나올 겁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한결 안전해졌군요.”
“정말이지... 이 늙은이의 예상을 매번 뛰어넘는구먼.”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강엽을 보던 빙오선이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술사를 초빙할 걸 그랬네. 수십 년간 개고생만 했어.”
강엽은 말없이 쓰게 웃었다.
구렁이의 영체를 제압한 것은 그가 모산혈조에 필적하는 술법의 경지에 오른 덕분이었다.
그 이하의 술사가 이 자리에 왔다면 구렁이의 영체를 잡기는커녕 도리어 잡아먹혔겠지.
빙오선이 그걸 몰라서 너스레를 떤 건 아닐 터.
‘그래도 추운 건 여전하군.’
구렁이의 영체를 제압했음에도 뼛속까지 에일 만큼 싸늘한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냉기의 근원.
땅을 박찬 두 사람은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하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 * *
복잡한 지형 속에 숨겨진 동공.
구중궁궐이 들어설 만큼 광활한 동공엔 전각 몇 채를 합친 것만큼 거대한 뼈무덤이 있었다.
놀라운 점은 그것이 수십, 수백의 시체가 모여 생긴 묘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지. 마수는 죽어 뼈를 남겼다.”
비대한 덩치 탓에 동공에서도 몸을 쭉 펴지 못하고 돌돌 만 채 죽음을 맞이한 이무기.
천 년의 세월 끝에 용이 될 뻔한 마수의 뼈를 돌아본 빙궁주가 입꼬리를 쭉 찢었다.
“.......”
“흠, 정신을 잃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이복누이를 위아래로 살펴본 그가 어깨를 들추면서 몸을 돌렸다.
누더기옷 아래 고인 붉은 피웅덩이가, 바닥에 파인 고랑을 따라 중심부로 이어진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선처럼 빙빙 회전하는 구조.
이복누이를 제물 삼아 인신공양의 술법을 펼친 빙궁주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의식을 잇기 위해 피가 묻은 손으로 수인을 맺을 때였다.
-크우우우웅!
마치 코를 고는 듯한 우렁찬 굉음.
뼈만 남은 마수가 숨을 쉴 때마다 절세고수의 경파처럼 일어난 파동이 동공의 천장을 때린다.
“지상은 난리가 났겠군.”
평생을 살아온 터전이 아수라장이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여상히 할 일을 이어간다.
그러던 그가 불현듯 행동을 멈춘 것은, 어느덧 자신과 팔사도 사이에 끼어든 인영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인식의 간극을 파고든 존재를 알아챈 빙궁주가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불청객을 맞이했다.
“이런. 이게 누구신가. 설마 강 무사가 올 줄은 상상도 못했구려.”
“.......”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빙궁주에게 등돌린 채 몸을 숙여, 팔사도의 목에 손을 대서 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할 뿐.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상황이었으나 빙궁주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설마 그 아이의 목숨을 걱정하는 거요? 어차피 당신이 죽이려고 하지 않았소?”
미약하지만 맥이 뛰고 있다.
내공을 봉인당했어도 절세고수답게 질긴 생명력으로 목숨줄을 붙잡은 것이다.
“내버려두시구려. 그냥 두면 숨이 끊길 거요. 내장을 찔러서 오래가지 못해.”
사실이었다. 칼을 찔렀다 비틀어 빼내는 바람에 상처 부위로 내장 조각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강엽은 아랑곳 않고 붉게 물든 복부에 손을 올려 주력을 집중했다.
은은한 빛이 내장 조각을 수복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지금은 죽어선 안 돼.’
혹시나 일사도와 괴뢰마가 빙궁을 점거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붙어있어야 협상을 해볼 수 있으리라.
“그건 모산파의 술법인데... 강 무사가 모산파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구려.”
“모산파의 술법을 잘 아는군.”
공대 따윈 때려치운 말투.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돌아보는 강엽의 모습에, 빙궁주가 짐짓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이래봬도 강 무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오. 소싯적에 그들과 교류했거든.”
“그게 언제인데?”
“음?”
“모산혈조가 백도 무림을 배신하기 전의 시절? 아니면 무림공적이 되어 악명을 떨친 시절인가?”
모산혈조가 제자들을 이끌고 마도로 전향하여 사대악인이 된 것은 수십 년 전의 일.
이제 막 중년이 된 빙궁주가 모산혈조와 교류했을 리 없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묘한 언동이라... 당신은 빙궁주가 아니야.”
“이거 참... 날카로운 식견이군.”
고개를 살살 가로지은 빙궁주는 의문에 답하는 대신 어딘가를 바라보며 안광을 빛냈다.
“여길 아는 사람은 둘밖에 없지. 저 남자를 데려온 건 빙 장로구려.”
“궁주, 정말 당신이 한 일이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빙오선의 얼굴.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진 늙은 가신을 물끄러미 응시한 빙궁주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저 친구 말을 못 들었나 보군.”
“그게 무슨...?”
빙오선이 무어라 외치려는 때 강엽이 말했다.
“그는 궁주가 아닙니다.”
“아니라니? 그가 궁주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혹시 궁주가 모산파와 교류했습니까?”
빙오선이 미간을 좁혔다.
“내 명예를 걸고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장담하네. 궁주가 태어났을 시절에 이미 모산파는 마도에 물들어 행방이 묘연해진 뒤였어.”
“궁주가 술법을 공부한 적은요?”
“그는 무공에만 매진했네.”
“그럼 저자는 누굽니까?”
“......!”
바닥에 새겨진 인신공양의 술법진이 원래부터 있진 않았을 터.
빙궁주의 외양을 하고 있되, 그가 결코 알 수 없는 지식을 습득한 괴인.
푸른 광채가 이글거리는 정안으로 빙궁주를 살핀 강엽은, 그의 육신 깊은 곳에 숨은 의념을 찾아냈다.
한쪽엔 뜨거운 불꽃이, 다른 한쪽엔 싸늘한 냉기가 휘몰아치는 심상.
빙궁주를 연기하고 있으나,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은 전혀 달랐다.
“당신, 일월신교의 교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