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실종 (3)
상단전의 직감이 경고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늦는다.’
문제는 강적들이 앞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직감은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나, 이들을 떼어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가거나, 아니면 이들이 개입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을 수밖에.
“내가 저놈을 맡으마.”
좌검우도를 쥔 낭왕이 괴뢰마를 눈빛으로 견제하며 거리를 벌렸다.
괴뢰마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팔존이라지만 그런 몸으로 나와 싸우겠다?”
“틀렸다, 잡것아.”
낭왕의 입가를 비집고 흉흉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비록 이런 몸이라도 너 같은 놈은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입만 살았군.”
괴뢰마가 움직이자 그가 조종하는 열 명의 분신이 뒤따르며 병장기를 꼬나쥐었다.
자연히 홀로 남은 일사도가 강엽을 향해 검을 겨누는 그 순간.
파앗!
괴뢰마의 분신들 중 절반이 현장을 이탈하여 빙궁이 있는 방향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아앗!”
“쫓아라!”
아설하를 향해 외친 낭왕이 수중의 도검을 휘둘러 짓쳐들어오는 괴뢰마를 막았다.
강엽이 재빨리 조풍을 내쏘려는 찰나 일사도가 한 박자 먼저 거리를 좁히며 검극을 찔러들어왔다.
일사도의 검을 심검으로 받아친 강엽은 손에 닿는 묵직한 감각에 눈썹을 치켜떴다.
아무리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보검이라 한들 심검과 부딪치면 견딜 수 없을 터.
하지만 놀랍게도 일사도의 검은 강엽의 심검과 정면으로 부딪치고도 밀리지 않았다.
투명한 힘이 물결치듯 검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심검인가?”
심상의 기운이 검신을 감싸면서 심검과 싸울 힘을 부여한 것이다.
파지지지지직...!
검신을 따라 타오른 샛노란 뇌광이 강엽의 전권을 침범하고 피부를 태워버리려고 한다.
강엽은 굳이 호신강기로 맞서는 대신 심검의 기운으로 태극반을 펼쳐 일사도의 뇌기를 막아냈다.
심검으로 펼친 검막이 뇌기를 흩어버리고, 외려 강엽의 의념에 따라 한 데로 뭉치기 시작한다.
절세고수의 기운조차 이용하는 사량발천근의 무리.
역팔자를 그리는 일사도의 눈썹을 보며 강엽이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매달았다.
“저번엔 신세를 졌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렁찬 굉음이 귓가를 강타하기도 전에 한데 뭉친 뇌기가 일사도를 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생각보단 타격을 많이 받지 않았는지 낙법을 취하면서 바로 일어서는 일사도의 모습.
그 사이 아설하가 괴뢰마의 분신들을 쫓는 것을 힐끔거린 강엽은 심검을 손바닥에 덮어씌웠다.
심검 대신 심조(心爪)의 형상으로 변모한 심상의 기운이 허공을 찢어발기자 검은 먹선이 그어진다.
그것이 심상절예의 변초임을 알아본 일사도가 눈가를 까딱하는 순간, 허공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한번 실전에서 써보고 싶었는데 잘됐군.”
심상절예를 열 개의 손가락에 나누어담은 만큼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응용할 여지는 더 컸다.
촤아아아아악!
면면부절 이어지던 뇌기가 심조에 찢기면서 그대로 사멸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허공에 열 줄기의 섬광이 그어지자 허공에 검은 먹선이 질주하면서 일사도를 쫓았다.
가까스로 전권을 빠져나온 일사도가 무감한 얼굴로 검을 뻗었다.
한데 모인 뇌기가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사위를 샛노랗게 불태웠다.
-신뢰통천(神雷通天).
...콰아아아아앙!
일순 대기를 가른 섬광이 강엽을 덮치고, 궤적을 따라 뻗은 열기가 공기를 달구었다.
온 초목이 뇌기를 맞아 숯덩이가 되고, 대지에 시커먼 낙인이 새겨질 만큼 강렬한 일격.
지옥의 가마처럼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오는 땅에 발을 내딘 일사도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그래, 이런 걸로 죽으면 섭섭하겠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쇄도하는 시커먼 참격.
그러나 일사도는 예상했던 것처럼 옆구리를 틀어 참격을 피하면서 강엽을 향해 검격을 내리쳤다.
심상의 기운을 두른 검과 심조가 얽히면서 무지막지한 기파가 팽창, 주변의 공기를 밀어버렸다.
실금이 내달린 대지 위로 초목들이 우후죽순 쓰러지면서 저 멀리까지 흙먼지를 피워올린다.
자신과 대등하게 맞서는 일사도의 모습에 강엽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더 강해졌군.”
“아니.”
대번에 강엽의 말을 부정하는 대답.
“이제부터 더 강해질 거다.”
쩌저저저저적...!
심조와 얽힌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출된 경력을 검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
그 현상을 깨닫고 강엽이 뜨거운 기광을 뿜는 찰나, 검이 산산조각 터지면서 파편을 흩뿌렸다.
잘게 부서진 쇳조각들 사이로 나타난 백금의 광검.
그것이 일전에 광명마교주가 다룬 몽상정토의 힘임을 알아본 강엽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심상절예 구현.
일사도의 몸에서 뿜어진 심상의 의념이 일대를 휩쓸면서 강엽을 향해 쏟아졌다.
-신여뇌극락(神余雷極樂).
신이 몸에 임하니 벼락과 함께 극락을 거니노라.
“...!”
일전에 부딪쳤을 때도 심상절예를 구현하기 직전까지 갔던 일사도였다.
그땐 목숨을 바쳐 심상절예를 억지로 짜내려고 했지만, 지금은 몽상정토의 힘을 부분적으로나마 다루면서 온전한 심상절예를 구현한 것.
그러나 놀라는 것과 별개로 강엽도 심상의 기운을 하나로 밀집하여 심상절예를 짰다.
-......!
만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세상이 새하얗게 타오르고 소리마저 끊긴다.
강대한 기파가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그도 모자라 온 산을 흔들면서 하늘 높이 뻗어가는 광경.
일사도 역시 버티지 못하고 수십 그루의 나무를 쳐부수고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뒤늦게 귀를 괴롭히는 이명에 미미하게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입가의 피를 닦을 때.
우우우우우웅...!
대기가 흔들리면서 거울처럼 반투명한 조각들이 사위를 에워쌌다.
“...진법?”
갇히기 전에 백금의 광검을 휘둘렀지만, 이전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하지 못하고 스러진다.
사방팔방의 거울벽에 비친 일사도가 말했다.
[‘유리경반진’이라고 하지.]
“...귀영.”
일사도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건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강엽의 것이었다.
유리경반진은 과거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얻은 술법진 중 하나.
강엽은 일사도의 주의가 느슨해진 사이 미리 깔아둔 진법을 발동시켜 그를 가둬둔 것이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런 걸로 날 붙잡을 순 없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
“....”
진법으로 일사도를 묶어두는 동안 빙궁에서 출현한 강적을 쓰러트리려는 심산.
그제서야 강엽의 속내를 알아차린 일사도가 입을 다물고 백금의 광검을 땅바닥에 꽂았다.
“무리하는군. 시운이 따라서 그걸 쓰러트린다 한들 뒷감당을 할 수 없을 텐데.”
[네가 걱정할 계제는 아니지.]
“....”
시간이 없다는 말을 방증하듯 그 말을 끝으로 강엽의 기척은 진법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홀로 남은 일사도는 가부좌를 틀며 중얼거렸다.
“어부지리인가.”
* * *
도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거의 날다시피 도시에 들어온 강엽은 울부짖는 가축들과 불안감에 떠는 사람들을 보았다.
오싹한 기운이 도시 전역을 뒤덮으면서, 간헐적으로 건물과 지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으허억!”
“천지신명께서 노하셨는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각자 믿는 신과 부처를 찾아 용서를 구해도 지진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강엽은 지진이 일어나는 땅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가를 좁혔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증유의 기운이 하늘 높이 올라가며 혼란을 자아내고 있다.
내공도, 자연지기도 아닌 다른 무언가.
‘그렇군. 이게 바로....’
염왕과 불권, 광명마교주 등 초인들이 닿은 경지.
강엽은 어느덧 자신 역시 그들처럼 천기를 엿보는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처럼 먼 훗날을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극히 일부의 흐름만 엿보는 단계.
그럼에도 지금 천기를 어지럽히는 무언가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빙궁의 담을 넘어 궁주전으로 들어가자 궁주 부인과 함께 있던 야율산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 공자님, 무사하셨군요!”
“빙궁주는?”
야율산산의 얼굴이 흐려진 것을 본 강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모시고 도망쳐라. 도시 바깥으로 가.”
“하지만....”
“잘 들어. 빙궁 전체가 전장이 될 거다. 어쩌면 도시까지 피해가 갈지도 몰라.”
“...그 정도인가요?”
“가만 있으면 몰살당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진만 해도 그랬다.
땅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지는 지경까지 간다면, 그 사상자는 최소 수백 명을 헤아릴 터.
‘이게 사람이 일으키는 일이라는 게 어이가 없지만....’
천기를 흐트러뜨리고 땅을 흔드는 존재를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아마 빙궁주가 사라진 일과도 무관하진 않을 거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로워.”
“...아버지를 의심하는 건 아니죠?”
“그가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있나?”
“....”
야율산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간신히 빙궁을 되찾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모르긴 몰라도 빙궁주도 휘말렸을 거다.”
“그, 그렇겠죠. 그러면 아버지를 찾아야....”
“내가 하지. 넌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궁주가 없는 지금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굳이 따지면 장로인 빙오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을 했다간 야율산산이 따라가겠다고 우길 것이다.
“혹시 빙궁에 비밀통로나 숨겨진 공간이 있나?”
“예? 아, 있긴 하지만... 그쪽은 이미 다 뒤져봤어요.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걸요.”
“그럼 이상한데.”
팔사도가 빙궁주와 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흔적은 빙궁의 중심부를 향해 이어졌다.
정확히는 그들이 있는 궁주전과 겹친 상황.
양피지에서 축소한 비율을 생각하면 완전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그때 안색이 하얗게 질린 궁주 부인이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하, 하나 있어요.”
“엄마?”
깜짝 놀란 나머지 외인이 있다는 것도 잊고 그녀를 평소처럼 부른 야율산산이었다.
뒤늦게 아차 했지만, 정신적으로 공황에 빠진 모친은 그녀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다.
“딱 하나... 거긴 뒤지지 않았어요.”
“아, 설마....”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야율산산이 탄식했다.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길래 그래?”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본궁의 지하에 있는 동굴이에요.”
“왜 안 뒤졌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거든요. 본궁을 세우신 초대 조사께서 궁주를 제외하면 누구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때문에 야율산산도 그 존재만 알 뿐 들어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들어가는 순간 수백 년간 이어진 초대 조사의 유지를 어기는 셈이니까.
“...근데 거긴 저도 있다는 것만 알 뿐 입구는 몰라요. 만약 아버지께서 그 동굴에 계신다면....”
만약 알았다면 혼자서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소궁주인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장소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무거운 침묵에 빠졌을 때였다.
“내가 알고 있네.”
바깥에서 빙오선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땅이 흔들리는 재난에도 절세고수답게 균형을 잃지 않고 침착함을 보여주는 품행.
그녀가 궁주 부인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송구합니다.”
“아, 아닙니다. 한데 장로님께서 알고 계시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 늙은이가 동굴로 가는 입구를 압니다.”
“저도 모르는데요?”
“노여워하지 말게, 소궁주. 이 늙은이가 알고 있는 건 대대로 내려온 직책 때문일세.”
“직책이라니요?”
“초대 조사께서 궁주 외의 출입을 금하신 건 위험하기 때문이었네. 빙정과는 다른 의미로 말일세. 하지만 동굴을 폐쇄할 수는 없었지.”
“왜죠?”
“본궁의 뿌리가 시작된 곳이니까.”
“...!”
“하지만 유사시를 대비해서 대대로 한 사람이 동굴을 관리했네. 궁주의 신변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후대에게 그 장소를 알려줄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이번 대는 이 늙은이지.”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강엽을 향했다.
“자네 추측대로 궁주께서 동굴에 계신다면 간과할 수 없네. 하나 비상시임을 감안해도....”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강엽이 철패를 꺼내 탁자에 탁 내려놓자 세 여인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과거 빙오선이 강엽에게 건넨 보은패였다.
“초대 조사의 유지를 지킬지, 아니면 빙궁과 도시 사람들의 목숨을 버릴지 말입니다.”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패를 쓰겠다는 건가?”
“아뇨.”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력으로 싸우기 위해 준비할 게 있습니다. 그걸 달라고 보은패를 돌려드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