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55화 (349/450)

70화. 실종 (2)

빙궁 외곽의 산골에 숨겨진 석탑.

빙궁을 떠난 강엽은 낭왕과 함께 석탑이 있는 산길에 올랐다.

문득 강엽이 낭왕을 돌아봤다.

“저 혼자 가도 됩니다만....”

“아, 궁금하니까 그렇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길래 놈들이 그렇게 이 난리를 치는지 말이다.”

결국 심심해서 따라오겠다고 한 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낭왕의 모습에 강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낭왕을 뿌리치고 가진 않았다.

마침 머릿속 의문에 대해 논할 상대가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고견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암만 현명한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내다볼 순 없다. 진조와 혈마, 광명마교주 같은 초인들도 실수하지 않던가.

강엽은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른 이의 의견을 구하는 데 거리끼지 않았다.

앞서가는 강엽을 힐끗한 낭왕이 시선을 돌리며 툭 내뱉었다.

“말해봐라.”

“광명마교주가 강림하지 않은 것 말입니다.”

팔사도를 심문하기 전엔 불권에게 당한 일로 심상이 불안정해져 그녀와 소통이 끊긴 게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석탑의 기능과 목적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탑 주변에서 죽은 사람들은 광명마교를 믿는 것과 별개로 몽상정토라는 곳에 들어갑니다.”

“그놈이 예전에 말한 낙원 말이냐?”

“실제로는 심상세계입니다.”

강엽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대강 설명한 뒤에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내놨다.

“일전의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 광명마교주도 이쪽의 상황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예.”

설사 원영신으로 강림할 수 없어도 모용세가에서 그랬듯 전력을 투사할 수는 있었을 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글쎄,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 그놈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두 가지 정도가 생각나는구나. 팔사도를 구할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했거나.”

설령 팔사도가 죽는다고 해도 몽상정토에 들어온다면 되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는 일.

낭왕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변수가 많은 만큼 섣불리 판단할 계제는 아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으니까.”

강엽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근자에 천하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광명마교와 혈교는 방문좌도의 사술을 밥 먹듯 쓰는 만큼 행동 양식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여기 온 이유는 뭐냐?”

나무 사이로 언뜻 드러난 석탑 꼭대기를 바라보며 낭왕이 물었다.

“지금쯤 처형식이 시작되었겠지요.”

강엽이 잠시 도시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죽으면 혼백이 이쪽에 올 겁니다. 그때 술법으로 혼백을 붙잡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심검으로 벤다면 바로 귀천시킬 수 있으리라.

상단전의 영성은 그리 속삭였지만, 그와 별개로 석탑의 공능을 마비시킬 방법을 강구해볼 심산이었다.

주변에 돌이나 나무 등으로 진축을 갖춘 뒤, 해와 그림자의 방향을 확인하고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본디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남다 천천히 자연지기와 섞이지요.”

하나 광명마교의 석탑은 혼백을 사로잡아 몽상정토로 인도한다.

“마침 모산파에도 혼백을 다루는 술법이 있습니다.”

모산혈조가 부린 망령의 군세.

강엽은 망자를 부릴 생각이 없기에 이제껏 쓰지 않았지만, 그 개요는 알고 있었다.

본래는 귀신을 진혼하기 위해 고안된 술법.

수인을 다 맺은 강엽이 시린 안광을 뿜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진언을 읊조렸다.

-강령진율령(降靈鎭律令).

휘이이이이잉...!

투명한 주력이 살바람처럼 소나무숲을 할퀴고 지나가자, 낭왕이 팔뚝을 쓸며 중얼거렸다.

“을씨년스럽구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팔사도의 혼백이 날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건만, 한나절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술법이 실패한 거 아니냐?”

“이상하군요. 분명히 성공했는데....”

실전에선 처음 써본다지만 사전에 몇 번이나 연습해본 만큼 실수할 구석은 없었다.

진식을 점검하는 강엽을 보면서 낭왕이 으차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처형식이 좀 늦나 보군. 그래도 혈족이니 유언을 남길 시간을 주는 거 아니겠냐?”

“....”

낭왕은 여상한 어조로 말했지만 강엽은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싸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

거센 진동이 지면을 흔들고, 찬란한 백금광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낭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거 그 석탑이 작동하는 거냐?”

* * *

쿠두두두두두...!

굳세게 닫혀있던 석탑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왔다.

“사람 하나 구하자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말을 삼가라, 칠사도. 교주님의 명령이다.”

열 명 남짓한 무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전설 속 송옥과 반악처럼 절세의 용모를 지닌 청년이 무심코 지면에 발을 들이려고 할 때였다.

주변을 둘러본 소년이 돌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서두르지 마라, 일사도. 사방이 적의 함정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절세고수의 기감도 속일 만큼 은밀하게 함정을 깔아놨다.

하지만 괴뢰마는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한 박자 늦게 괴뢰마의 말뜻을 깨달은 일사도가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저편에서 오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 네놈이 북해에 왔을 줄이야....”

“귀영?”

괴뢰마 역시 강엽을 알아보고 콧잔등을 구겼다.

“쯧,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도착하자마자 저놈을 마주치다니 운도 참 지지리 없어.”

강엽도 두 사람을 알아보고 눈매를 가늘게 떴다.

어디서 싸우고 오기라도 한 듯 의관이 흐트러졌고, 옷깃엔 핏물이 덕지덕지 묻은 행색.

“누구랑 싸운 거지?”

“네놈이 알 바 아니다.”

일사도는 차갑게 대답했지만, 강엽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낭왕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전주님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여유가 없어서 팔사도를 구출할 전력을 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 사도의 몸엔 의관도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로 격하게 싸우다 온 흔적이 역력했다.

“귀영과 낭왕이라... 이거 팔사도를 구하기 전에 우리 목숨부터 걱정해야겠는데.”

“죽을 염려도 없는 주제에 말이 많군, 칠사도.”

“이건 특별한 몸이니까. 이 몸까지 잃으면 타격이 크다.”

일사도를 타박한 괴뢰마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싸울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협상을 하자, 귀영.”

“내 사전에 협상은 없는데.”

강엽이 바로 심검부터 꺼내서 미간을 겨누자 아찔한 감각이 덮친다.

괴뢰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누구와 싸웠는지 궁금하지 않나?”

강엽이 잠시 멈칫하는 틈을 타서 건조하게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면 후회할 거다. 난 일사도와 달리 융통성이 있어. 여차하면 알려줄 용의도 있다.”

“...계속 지껄여 봐.”

“섬무검예라고 하던가?”

대뜸 백서희의 별호를 입에 올리는 태도.

강엽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면서 오싹한 살기가 쏟아졌다.

괴뢰마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지만, 그럼에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강엽을 도발했다.

“큽, 이러는 게, 좋진 않을 텐데... 네 여자가, 본교의 수중에, 있다면....”

“서희를 잡았다는 거냐?”

“그 계집뿐만 아니지.... 네가 아는 이들이, 우리와 싸우다 방금 전에....”

“증거는?”

“흐흐, 그런 걸, 들고 다닐 리가 없지. 네가 여기 있는 것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렇군. 잠깐만 기다려봐라.”

“...음?”

괴뢰마가 의아해하든 말든 강엽은 적들을 앞두고 태연히 반지를 꺼내 공력을 불어넣었다.

거리가 멀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법구.

하지만 백서희가 이전에 당부한 대로 산서에 갔다면, 아슬아슬하게 닿을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이 지나니 반응이 왔다.

[...강엽?]

“어디야?”

[와, 목소리 잘 들리네. 나야 산서에 있지. 지금은 당 소저와 소창후랑 함께 있어.]

“뭐 하고 있는데?”

[응? 밥 먹고 있는데? 아니, 혜심 스님 그 요리는 돼지고기 들어간... 그렇다고 뱉진 말고요. 당 소저, 벌써 두 그릇째인데 더 들어갈 구석이 있어요?]

아무래도 저쪽에서도 활발히 대화하는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여과 없이 들리고 있었다.

강엽은 우두커니 선 괴뢰마를 흘깃거리면서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혹시 괴뢰마 만난 적 있나?”

[괴뢰마?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그 새끼 분신 만나서 박살 내줬어. 광명마교의 보급로를 발견했는데 그 새끼가 있지 뭐야. 근데 그건 왜?]

“그놈이 지금 내 앞에서 널 인질로 잡았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어서.”

[진짜? 그놈도 참 공사다망하네. 산서에 갔다가 북해까지 가고. 몸이 여러 개라 그런가?]

“아무튼 별일 없다니 다행이다.”

[조심해.]

“그래. 아, 그리고 혹시 하오문 분타가 근처에 있으면 의뢰는 성공했다고 전해줘.”

[오, 역시 대환단이야. 성능 확실하구만.]

그렇게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대화가 끝나자 강엽은 반지를 품속에 넣어두고 삐딱하게 섰다.

이쪽의 대화를 들은 괴뢰마가 실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눈알을 뒤룩 굴리고 있었다.

“서희를 뭐 어쨌다고?”

“그게... 그러니까....”

설마 법구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문이 막혀서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에 강엽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연히 서희를 만나서 그걸로 엮어보려고 한 모양인데, 한참 잘못 짚었다. 차라리 무림맹주를 인질로 잡았다고 하지 그랬나?”

물론 어지간한 협박엔 눈 하나 깜짝 안 했겠지만, 최소한 이런 식으로 진실을 간파하지는 못했겠지.

낭왕도 헛웃음을 흘리면서 혀를 끌끌 찼다.

“제 꾀에 제가 당한 격이구나. 하긴 나라도 이런 식으로 까발려질 거라곤 생각 못 했다만.”

“제기랄.”

참다 못해 욕설을 내뱉은 괴뢰마를 한심스럽게 바라본 일사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칠사도, 본교의 명예를 더 이상 떨어트리지 마라.”

허리춤에 찬 검이 스르릉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피부를 타고 뇌광이 흐르는 기세.

깊은 무저갱처럼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빛엔 적을 쓰러트리겠다는 일념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언젠가는 쓰러트렸어야 했을 본교의 대적. 진조의 후예와 천하팔존을 쓰러트릴 수 있다면 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안 그래도 저번에 놓친 게 찜찜했었지.”

강엽 역시 심상절예를 펼치기 위해 공력을 모으면서 광명마교의 무리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정상적인 사람은 없나.’

이런 상황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자들.

교도들의 복식을 하고 있으나, 일사도를 제외하면 모두 괴뢰마의 꼭두각시들이었다.

“한 가지 알려주마. 팔사도는 이제 곧 처형당할 거다. 구하려면 날 넘어야 할 거야.”

“....”

팔사도의 목숨을 운운하는 도발에도 일사도는 말없이 검을 겨눌 뿐.

괴뢰마도 한숨을 쉬고 두 손을 모아 출수할 준비를 하고, 낭왕 역시 검과 도를 들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절세고수들이 충돌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 상황을 깬 것은, 산 아래에서부터 급하게 올라오는 어떤 이의 거친 숨소리였다.

“가, 강 공자님-!”

“저 처자는 소궁주의 측근이 아니냐?”

아설하를 알아본 낭왕이 의아해했다.

내가기공의 고수가 숨이 찰 만큼 힘겨워하다니, 산 아래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왔던 걸까.

그녀가 석탑에서 나온 광명마교의 무리를 보고 얼음처럼 굳어지는 그때 강엽이 불쑥 물었다.

“뭔 일이냐?”

“그, 그게....”

“그냥 말해. 전음으로 말해봤자 저놈들 실력이면 훔쳐 듣는다.”

“...궁주님과 팔사도가 사라졌습니다.”

“뭐?”

그 말에 놀란 것은 강엽만이 아니었다.

낭왕은 물론 일사도와 괴뢰마도 기파가 흐트러질 만큼 놀라서 아설하를 돌아보았다.

뭇 절세고수들의 시선을 받은 아설하는 덜덜 떨면서도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궁주님이 사라지셨고, 뇌옥에 있던 팔사도 역시....”

“습격인가?”

“...격전의 흔적은 남지 않았습니다. 호위무사들과 간수는 수혈을 짚인 채 잠들었고요. 현재 소궁주님과 빙 장로님이 무사들을 풀었지만....”

결국 찾지 못해서 강엽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리라.

낭왕이 마뜩잖은 기색으로 말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긴 것 같구나. 그렇다고 저놈들이 한 짓은 아닌 것 같고.”

광명마교의 소행이었다면 일사도와 괴뢰마가 석탑을 통해 나오지도 않았을 터.

‘한참을 기다려도 왜 혼백이 안 오나 했더니....’

비로소 내막을 깨닫고 탄식을 쏟은 강엽은 두 사도를 눈빛으로 견제하면서 유리병을 꺼냈다.

피가 찰랑거리는 유리병을 본 낭왕이 물었다.

“그게 뭐냐?”

“혹시나 해서 준비한 수단입니다.”

만약 팔사도가 죽었다면 이 피를 마시고 그녀에 대한 일은 깨끗이 잊었겠지만,

그녀가 빙궁주와 함께 실종된 지금 이 피는 두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항상 들고 다니는 양피지에 자신의 피와 섞어 떨어트리자 선명한 혈점이 떠오른다.

“.......”

“왜 그러느냐?”

낭왕뿐만 아니라 모두가 강엽의 입을 주목했다.

잠시 침묵한 강엽이 대답하려던 그 순간.

“......!”

아설하를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빙궁이 있는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 기척은....’

하수들은 감지하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

하지만 심상을 다룰 줄 아는 절세고수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들을 위협하는 뭔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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